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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백년대계 2-초중등학교를 스마트하게 혁명하라 !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 교육, 부활의 길을 찾다(3) 2018-07-18
천세영 sychun@cnu.ac.kr

▲ 스마트교육의 방향을 제시한 천세영 외 지음 ˝스마트 교육혁명- 2015 새로운 학교가 온다˝



21세기가 시작될 때 대한민국 교육은 교육정보화 1등 국가로 자리잡았으며 드디어 2011년 스마트교육을 선포하면서 세계 교육의 창창한 미래를 선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통탄에 또 통탄할 것이 어리석은 어른들이 18세기 산업혁명 때 있었던 러다이트적 바보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과연 언제쯤 그 바보짓을 반성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마트교육이 혁명적 조치였어야 했던 것은 말 뿐이 아닌 정말 그러해야했음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상적 개선이 아닌 구질서를 완전히 혁파하지 않고서는 실현되기 어려운 일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러하다.
왜 그러한가? 복잡한 이야기보다는 쉽게 이해해보아야 한다. 스마트교육은 약간 난해하게 들릴 지 모르나 그보다 많은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말은 미래 교육이다. 
물론 처음 들을 때 달콤할 뿐이지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행동지침을 만들때는 또 다시 난해해지고 만다. 사람들은 또 역량을 말한다. 창의력이며 협동심이며 도전감이며 공감력 들을 말한다. 
이쯤에 여지 없이 OECD가 등장하고 미래학자들이 등장하고 핀란드 교육이 등장한다. 핀란드 학교들이 교과목을 없앤다고 하니 우리도 그러하자고 한다. 
그러나 학교 선생님들에게 물어보고 학부모와 아이들에게 물어보라. 그 창의력과 역량은 어떻게 가르치며 또 얼마나 배웠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시험성적으로 낼 수 있는가 물어보라. 
답이 나오질 않는다. 허울좋게 원리를 이해하고 스토리 텔링을 하면 수학이 훨씬 잘 배워질 것이라며 학교 선생님들을 다그쳤지만 수포자는 늘어나고 말았다. 
새로 선출된 교육감들은 너도나도 미래교육을 말하며 학습혁명을 말한다. 시험을 없애자고 성적표를 없애자고 인터내셔널 바깔로레아를 도입하자고 하며 절대평가를 시행하자고 한다. 
그러나 이내 곳곳에서 오해와 불만이 섞인 소음이 들린다. 교육부는 국가교육회의를 만들고 시민위원회를 만들어 정책숙려제라는 이름으로 민주적 의사결정이라는 이름으로 치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자녀들의 기초학력에 대한 불안은 커져만 가고 대학졸업생들의 취업역량은 떨어지고 실업률은 높아만 간다.
제발 적어도 두 가지 만은 잊지말고 방책을 구하더래도 구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대한민국에 초등학교 6천개, 중학교 3,200개, 고등학교 2,300개교, 총 11,500개의 학교가 존재한다.  그런데 이 학교들은 모두가 동일한 교과서와 교육과정으로, 동일한 급여를 받고 동일한 자격을 갖춘 교사들로부터 말 그대로 획일적인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가난하고 아무도 못 배우던 시절에 이러한 획일성은 최소 표준의 보장이라는 관점에서 큰 기적을 낳았다. 60명을 넘어 100명에 가까운 콩나물 교실에서도 교육은 이루어졌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나 부잣집 아이들이나 선생님은 공평하게 오로지 시험 성적 하나만으로 대했으며 학생들 또한 성적 하나로 서로를 인정하고 노력에 노력을 더했다. 
그러나 최소표준을 보장하는 것만으로는 급변하는 미래를 열 수 없었다. 선진국을 따라가던 후진국을 벗어나 후진국을 인도해야 할 선진국으로서는 세상에 없는 새로움을 창조해야 했으며 그것은 획일화된 표준 교육과정으로 불가능하다. 
이제 학생들을 동일한 교과 성적만으로는 가두어둘 수 없게되었으며 다양한 교과목도 만들 필요가 있었으며 사지선다형 시험만이 아닌 새로운 수행평가들도 필요했다. 
물론 많은 실험들이 도입되었고 지금도 하루를 멀다않고 도입되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외국에서는 작동이 된다고 하는데 우리에게서는 안되는 것인가? 
여러 이야기가 필요없이 한 가지만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K-pop 이 한류를 이끌고 돈을 벌어들이고 청소년들의 미래 희망이 되었다. 
초등학생부터 상당수의 아이들이 이를 배우고 싶어한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여전히 재미없는 국영수만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고 그런 것을 가르쳐주는 학교도 찾아보기 힘들고 설령 있다해도 가기도 쉽지가 않다. 
말이 필요없다. 교육감이 학교장이 그런 학교들을 열어주어야하고 그런 새로운 교과목들을 열어주어야한다. 가능할까? 물론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모든 학교의 교과목은 같아야 하고 수업시수도 같아야 하고 선생님의 자격도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풀지 않고는 그 어떤 혁명도 개혁도 불가능하다.
어찌해야 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학교자치를 실시해야한다. 
학교자치란 학교 스스로 교육과정을 결정하고 학교스스로 교장을 초빙하고 학교스스로 교사를 채용하여 학교마다 특색있는 교육을 실시해야한다. 
그래야만 자연세계의 법칙처럼 급변하는 환경에 도전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나설 수 있으며 선도하는 학교를 따라 배워가며 전체 학교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 영국의 대처수상이 왜 교육감 제도를 폐지하였으며 후배 수상들이 나서서 지역교육청까지 민영화하였는지를 벤치마크해야한다. 물론 국가는 학생1인당 최소필수교육비를 보장한다. 학교는 보장된 재정을 기반으로 하여 최고의 교육을 만들기 위해 선의의 경쟁을 할뿐이다.
둘째로 미래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진지하게 물어야한다. 
그것은 애매한 역량도 아니며 코딩교육 필수화도 아니다. 미래학자들이 말하는 미래의 본질은 무엇인지 겸허하고 진지하게 다시 들어보아야 한다. 
사실 그것은 2011년 대한민국이 스마트교육을 선언할 때 이미 담겨있었지만 바보들이 그것을 구석에 처박아버리는 바람에 제대로의 실천 전략도 만들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 역시 의외로 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문자와 숫자, 곧 국영수 기반 논리 능력만이 아닌 음미체 기반 감성 능력까지를 포용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핵심 비밀은 컴퓨터 기술의 도움을 받아 이제까지 천재들만의 영역이었던 예술과 문화적 소양을 보통 사람들도 쉽게 배우고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모든 학생이 국영수에 더해 음미체까지 모두 다해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쉽게 말하면 이제까지는 국영수만 최고 유일의 교과였다면 지금부터는 음미체 또한 최고의 교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학교에서는 공부를 잘 못하는 학생이 잘 하는 학생보다 많았으며, 여기서 ‘공부’란 국영수 과목을 말하기 때문에 앞으로는 음미체 교과가 ‘공부’의 대상이 됨으로써 모두가 공부 잘 하는 학생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미래 세대에게, 어쩌면 이미 수천년전부터 인류가 진실로 살아 온 기반 기술은 논리와 이성만이 아닌 직감과 감성이었을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는 그 직감과 감성을 배우고 활용할 수 있는 도구가 부족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컴퓨터 기술은 좀 더 쉽게 그림을 그리고 영화를 만들고 음악을 만들 수 있게 해준다. 
이제 학생들은 글씨 일기만 쓰는 것이 아닌 그림 일기를 넘어 영상 일기를 쓸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좀 더 풍부한 감성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함으로써 세상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갈것이다. 그러므로 학교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가는 기술들을 어린이들에게 가르쳐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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