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로이터=연합뉴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올해 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에서 연쇄 회담을 통해 대규모 동맹국 지원을 이끌어내며 강화된 외교적 입지를 보여주었다.
우크라이나군이 자체 개발한 고성능 장거리 드론을 활용해 러시아 내부의 핵심 에너지 공급망을 집요하게 타격하면서 전황을 우세하게 이끌자, 서방 동맹국들 사이에서 종전에 대한 기대감이 급격히 확산하는 모양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러한 군사적 성과와 독보적인 드론 기술력을 지렛대 삼아 전방위적인 외교 공세를 펼쳤다.
9일(현지시간) 공개된 소셜미디어 게시물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 7일부터 8일까지 튀르키예 앙카라에서 개최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 기간에만 약 20차례에 달하는 각국 정상 및 국제기구 수장들과의 연쇄 회담을 연달아 소화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 등 서방 핵심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과 연이어 단독 회동을 가졌다.
특히 대한민국 이재명 대통령과도 사상 첫 정상회담을 개최하며 외교 지평을 넓혔다. 회담에 나선 동맹국 수장들은 한목소리로 조속한 전쟁 종식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동시에 지속적인 군사 자원 제공을 약속하며 우크라이나 정부에 확실한 힘을 실어주었다.
가장 눈길을 끈 대목은 그동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친밀한 관계를 내세우며 우크라이나 지원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던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전향적인 입장 변화다. 트럼프 대통령은 고질적인 방공 무기 고갈 문제를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돕기 위해 미국의 첨단 요격 체계인 패트리엇 미사일을 우크라이나 현지에서 자체적으로 제조할 수 있도록 전격 허가하겠다는 방침을 피력했다.
아울러 전장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우크라이나산 드론을 미국이 직접 구매하겠다는 의사까지 내비쳤는데, 이는 지난 3월 미국의 독자적 기술력을 과신하며 지원이 불필요하다고 단언했던 기존 입장을 완전히 뒤집은 결정이다.
실제로 우크라이나의 고도화된 드론 기술은 이번 회의에서 전 세계의 집중 조명을 받았으며, 북유럽의 에스토니아는 정상회의 현장에서 우크라이나와 별도의 드론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 나토 회원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나토 방산포럼의 기조연설자로 연단에 오른 젤렌스키 대통령은 유럽 국가들을 향해 "자체적인 탄도미사일 방어체계와 이를 위한 생산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조언하며 방위력 강화를 촉구했다.
이어 나토 정상들은 우크라이나에 올해 총 700억유로(약 120조 4천억 원) 규모의 군사 장비와 훈련 프로그램을 공급하고 내년에도 동일한 수준의 예산을 책정하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공동 선언문을 공식 채택했다.
이 같은 전폭적인 환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의제가 다른 국제 현안에 밀려 주목받지 못했던 지난해 나토 정상회의 당시의 냉랭했던 기류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지난 2022년 2월 러시아의 전면 침공 직후 열린 나토 회의에서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최우선 현안으로 다뤄졌으나, 지난해에는 오랜 전쟁에 따른 피로감과 미·이란 간의 핵 협상 등 타 지역 이슈가 부각되면서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당시 뤼터 나토 사무총장이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제발 동맹국의 지원 의지를 알아달라"며 이례적으로 호소했던 일화 역시 우크라이나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 저하를 방증하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최근 우크라이나가 독자 기술로 제조한 무인기를 앞세워 러시아 본토의 니즈네캄스크 유전 지대와 아조우해 보급로 등 유류 시설을 집중 공략하면서 국제사회의 평가가 반전됐다. 이날도 러시아 트베리주와 스타브로폴주의 석유 저장소가 우크라이나 드론 공습으로 전소되는 화재가 발생했으며, 제재를 우회해 연료를 수송하던 유조선 2척이 아조우해에서 피격당했다.
세계 2위의 원유 수출국인 러시아는 이 같은 정유 시설 타격으로 심각한 고충을 겪은 끝에 최근 자국 내 연료 부족 사태를 공식 인정하고 인도와 카자흐스탄으로부터 휘발유를 수입하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디젤 연료의 해외 수출까지 전면 통제하는 처지에 몰렸다.
-국제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