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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국은 공짜가 아니다 2018-02-06
최재기 faust57@hanmail.net
-루소의 계몽주의 사상 기반으로 프랑스혁명의 희생 통해 전제군주정 타파하고 민주공화국 탄생했다
-레닌주의는 ‘대중의 자생성’ 부정하고, 대중은 직업혁명가 조직인 당의 ‘지도’ 받아야 할 대상으로 간주
-공화국 지키려면 시민들은 자유를 파괴하려는 악당들을 정직하게 만들기 위해 늘 불침번을 서야 한다

민주공화국의 인간관 – 이성적, 자율적, 공개적 인간

 

근대 시민혁명을 통해 정립된 근대 민주공화정 체제는 인간에 대한 몇 가지 전제가 깔려 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고, 개별자로서 자율적(mastery of self) 존재이며, 정치사회에 참여할 때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공개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인간관은 근대 민주공화국의 사실상 설계자인 장 자크 루소의 저작에서도 잘 드러난다. 프랑스혁명을 주도한 로베스피에르는 스스로 자신이 루소의 제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치체나 주권자는 사회계약에 의해서만 비로소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외부 사람에 대하여 절대로 (자기가) 속박을 받아서는 안 된다.’

‘개인의지에서 지나친 것과 부족한 것을 가감 상쇄하여 그 차이의 합계로서 일반의지가 남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의지가 충분히 표명되려면 국가 내에 부분적인 당파가 존재하지 말아야 하며, 각 시민은 독자적인 의견을 가져야 한다.'(루소, <사회계약론>)

 

다시 말해 이성적 개인이 의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해야 일반의지가 도출되므로, 민주공화국은 독자적인 의견을 가진 공개적인 개인을 전제하고 있다.

 

근대 계몽주의 사상, 특히 루소의 사상을 기반으로 18세기 말부터 약 1세기에 걸친 프랑스혁명의 투쟁과 희생을 통해 전제군주정과 봉건적 계급질서를 타파하고 마침내 민주공화국이 탄생하였다. 여기서 ‘민주’란 군주정(monarchy)이나 전제정(tyranny), 귀족정(aristocracy)이나 과두정(oligarchy)이 아니라 민주정체(democracy)라는 의미이고, ‘공화국’이란 ‘법과 공공선에 기반을 두고 주권자인 시민들이 만들어낸 정치공동체'(모리치오 비롤리, <공화주의>)를 의미한다.

 

전체주의적 인간관 – 감성적, 예종적, 비공개적 인간

 

그러나 정치사회를 구성하는 이런 공개적이고 이성적 인간에 의해 도출된 일반의지에 따른 주권자인 민주공화국을 만든 자유로운 인간관과 국가관은 20세기 들어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레닌주의는 인간의 의지의 자유로운 발현이라 보이는 ‘대중의 자생성’을 부정하고, 대중은 직업혁명가 조직인 당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본다. 그런 점에서 근대 시민혁명을 통해 달성한 시민적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민주공화국의 이상과 정확히 배치된다.

 

‘노동자들 사이에 사회민주주의적 의식성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중략) 사회민주주의의 이론적 교의는 노동계급운동의 자생적 성장과는 전혀 독립적으로 발생했다.’

‘만약 우리가 모든 측면에서 (대중)전체에 대한 정치적 폭로를 조직하는 일에 착수하지 않는다면,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우리의 임무를 완수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 레닌주의는 대중은 직업혁명가 조직인 당의 ‘지도’를 받아야 할 대상으로 본다


레닌은 정치가 (대중들의) 자생성에 굴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대중은 폭로의 대상이고 선전과 선동의 대상일 뿐이다. 또 레닌은 비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로지 이론으로 무장한, 즉 의식화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지도해야만 혁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운동은 있을 수 없다.’

‘사회민주주의자의 이상은 노동조합의 서기가 아니라 인민의 지도자여야 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력하게 주장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마침내 자신의 이상대로 대중의 모든 영역을 지도하는, 즉 모든 대중조직 위에 군림하는 당의 모습을, 당과 자생적 대중조직인 노동조합 간의 관계 묘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노동자 조직은 첫째, 노동조합 조직이어야 한다. 둘째, 가능한 한 광범위해야 한다. 셋째, 조건이 허락하는 한 공개적이어야 한다. (중략) 다른 한편으로 혁명가 조직은 제일 먼저 혁명 활동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중략) 이 조직은 지나치게 광범위해서는 안 되며, 가능한 한 비밀스러워야 한다.’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여기서 인류가 온갖 희생을 겪으면서 어렵게 정립한 민주공화국의 인간관과 국가관은 전면적으로 부정된다. 레닌주의 당은 대중들, 즉 시민들을 외곽조직의 구성원으로 폭로와 선전 선동의 대상으로 여기므로, 그들은 대중을 이성적이고 판단력을 가진 자율적 존재가 아니라, 감성적이고 당의 방침과 다른 독립적 의지를 가지지 않고 당에 무조건적으로 예종해야 하는 대상으로 취급한다. 당연히 그들에 대한 대중(조작) 기획은 비공개적으로 대중조직 외부에서 공급해야 한다고 본다.

 

그들은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고, 개별자로서 자율적 존재이며, 공개적인 존재라는 근대 공화국의 인간관을 부정한다. 인간은 감성적이고, 직업혁명가 조직인 당에 의해 ‘지도’되어야 할 대상이며, 이런 지도의 과정은 비공개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시민사회 각 영역은 당이 주도하는 ‘정치의식의 발전’ 대상이고 정치사회의 필요에 따른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마침내 시민사회 모든 영역은 과잉 정치화하게 된다. 과잉 정치화는 필연적으로 전체주의 사회로 전락하기 쉽다. 북한 정권에서 자행되는 인민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자아비판, 즉 생활총화 사례는 극단적인 과잉 정치화의 결말이다. 당이 인민들의 일상생활 모든 영역까지 지도하겠다는 것이다.

 

인권과 자유의 근거지 – 시민사회의 자립

 

우리가 흔히 인권이니 기본권이라 부르는 것도 자세히 따져보면 자유권의 일종인데, 이런 자유권은 근대에 와서야 비로소 정치사회로부터 독립한 시민사회를 통해서 온전히 보장될 수 있었다. 근대 시민사회는, 첫째로 종교개혁으로 인간의 세속적 요구가 종교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정교분리, 政敎分離)를 통해서, 이차적으로 경제생활에 대한 정치의 개입을 최소화하여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재산권 행사를 가능케 한 정치와 경제의 분리(정경분리, 政經分離)를 통해서, 역사적으로 처음 등장한 것이다. 첫 번째 정교분리는 종교개혁을 통해 이루어졌고, 두 번째 정경분리는 시민혁명, 즉 프랑스혁명을 통해 인류가 많은 희생을 치르고 마침내 이룩한 성과이다.

 

근래 사드 문제를 둘러싼 경제보복 논란을 지켜볼 때 중국은 적어도 정경분리가 불완전한 체제라는 걸 알 수 있다. 국제적으로도 시장경제 지위가 여전히 시비거리가 되는 것으로 보아, 중국식 모델은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우리와 가치지향 면에서 거리가 있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80년대 ‘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국가주의적 경제운영 틀을 벗어나게 되어 정경분리가 완성되는데, 이때부터 비로소 시민사회가 자립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렇게 어렵게 자립한 시민사회가 정치사회에 동원되어 깊이 예속될수록 시민적 인권과 자유권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자립적인 시민사회는 인권과 자유의 근거지였다. 종교집단의 자의적 권력이든 정치집단의 자의적 권력이든 그 어떤 자의적 권력이든 받아들이는 순간 시민들은 예속될 수밖에 없다. 공화정은 시민들이 복종(obedience)하나 예종(servitude)되지 않게 하는 정치체제이다. 여기서 시민들이 복종해야하는 것은 법이고, 예종되지 말아야 할 것은 자의적 권력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법은 ‘인민의 일반적 이익과 사고를 존중하고, 어떤 개인 또는 집단의 자의적 의지의 도구가 아닌’ 법을 말한다. ‘자유를 누리고자하는 공화국은 어떤 사람에게도 법보다 강한 힘을 갖도록 허용해서는 절대 안 된다.'(모리치오 비롤리, <공화주의>)

 

위험한 권력획득 게임 – 시민사회의 정치화

 

시민사회의 정치화는 위험한 정치게임이다.

 

특정 이데올로기로 의식화된 집단이 자신들의 조직을 기반으로 시민사회를 동원하여 권력획득 게임을 벌이기 시작하면, 그에 반대하는 이데올로기로 의식화된 집단도 시민사회를 정치사회로 동원하는 권력획득 게임을 하려 할 것이다. 그러면 인권과 자유의 요람으로서 시민사회는 갈갈이 찢어지고,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동원된 시민대중 집단 간의 충돌은 불가피해질 것이다.

 

프랑스혁명의 사례를 볼 때, 가치관이 다른 전제왕정파와 공화정파 간의 충돌은 법정에서 시비가 가려지는 게 아니라 결국 내전(civil war)을 통해 한 쪽 세력인 전제왕정파를 절멸시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혁명의 과정은 잔혹하다. 알베르 마띠에 등 프랑스혁명사 연구자들의 추산에 의하면 약 1세기에 걸친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약 50만 명의 시민들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그런 희생을 토대로 공화정파가 최종 승리함에 따라 근대 민주공화정 체제와 자립적인 시민사회가 어렵게 정립된 것이다.

 

우리가 시민사회라 부르는 학계, 언론계, 종교계, 법조계, 연예계 등 시민사회의 각 영역에서 활동하는 자는 그 영역에서 얻는 명예라는 보상만으로 만족해야지, 시민사회 영역에서 얻은 명성을 토대로 정치권력까지 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근대 민주공화국의 작동 원리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시민사회의 자립과 공화정에 대한 이해도 없이, 시민사회에서 좀 유명세를 타거나 대중매체 등을 통해 이름이 조금 알려졌다 싶으면 그저 정치사회로 직행하려고 선동질에 능한 사람들을 많이 본다. 일부 매체들은 이들을 ‘개념’ 연예인이니, ‘의식이 있다’느니 하며 추켜세우기도 하여 이들의 일탈을 부추긴다. 어느 선진 사회에서 교수가, 연예인이 별도의 정치사회에 입문하는 절차도 없이 정치하겠다고 기웃대던가?

 

정당성 문제

 

레닌이 설계한 당은 어떤 숭고한 목적을 가졌다고 포장하든 정당성 문제가 남는다.

 

모든 권력을 움켜쥔 당의 구성원, 즉 ‘직업혁명가’들은 누가 선발하는가? 한 무리의 ‘의식화’된 사람들이 스스로 직업혁명가라 자처하면서 비밀리에 조직을 짜고 시민들에게 복종을 요구하면 시민들은 무조건 받들어 모셔야 하는가? 그렇게 할 근거는 무엇일까?

 

레닌주의 당은 (대의과정을 생략하고) 대중들의 진짜 요구를 직접 반영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더 ‘민주주의적’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대중은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에 평소 생업에 종사해야 하고, 특정 시기 외에는 늘 혁명운동에 관심을 갖고 살 수는 없다. 혁명운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소홀해져서(레닌은 이를 ‘운동의 쇠퇴기’라 불렀다) 권력을 가진 ‘레닌의 당’을 대중들이 견제할 수 없을 때는 누가 그들을 견제하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러면 혁명이라는 명분은 없어지고 당의 자의적 권력만 남게 된다. 계급을 없애자면서 출발한 사회주의 혁명은 결국 당이라는 새로운 계급조직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옛날에는 시민들이 왕과 신분귀족들의 자의적 권력에 자유를 억압당했지만, 지금은 ‘당’이라는 새로운 전제권력을 받들어 모시는 꼴이 된 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허위의식

 

혁명의 명분이 된 레닌이 주장한 사회주의는 현실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정치경제체제였다는 것이 지난 세기 인류의 경험을 통해 입증되었다. 즉 혁명의 명분으로 내건 사회주의는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으로서의 이데올로기로 귀결되었고, 혁명의 실상은 권력욕에 사로잡힌 특정 집단이 이런 이념조작으로 당에 대한 무조건적인 대중의 복속을 강제하여 전체주의적 권력을 만들어낸 정치적 사변이었을 뿐이다.

 

다른 인격을 복속시킬 수 있는 권력의 맛은 달다. 그래서 러시아혁명 이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권력욕에 사로잡힌 여러 집단들이 러시아혁명을 모방하여 각종 혁명을 명분으로 내걸고 권력탈취에 성공하여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하였다.

 

북한 정권의 이데올로기인 김일성주의, 즉 주체사상도 감성적 논리와 종교집단의 천년왕국설처럼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는 목표를 내걸고 인민들을 동원하는 전형적인 허위의식이다. 실상은 전체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대중적 이념조작의 도구일 뿐이다.

 

문제는 전체주의는 한번 작동하면 쉽게 부서지지 않는 체제라는 점이다. 인민 대중들이 허위의식으로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세계관이 고정되어 있고, 이미 시민사회는 부정되고 과잉 정치화로 인민들을 동원하여 이런 허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체계적으로 감시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체제 내부에서부터 체제전환의 동력을 이끌어내기는 대단히 어렵다. 우파 전체주의 체제인 나찌즘은 결국 전쟁에 패배하여 체제 자체가 강제로 해체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소멸되었다.

 

민주공화국은 공짜가 아니다

 

현대에 들어서 민주공화국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는 많은 위협요인들이 있다. 시민들이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공화국을 만들었지만, 공화국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공적인 의지(시민적 덕성)가 필요하다. 근대 영국 공화주의자로 미국 독립혁명을 적극 옹호했던 리차드 프라이스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재치있게 표현하였다.

 

“시민 또는 공동체를 자유롭다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단순히 자유를 소유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유로운 정부로부터 발생하고 이를 빼앗아갈 다른 권력이 존재하지 않을 때 생기는 자유의 소유에 대한 안전이다.”

 

독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민주적이었다는 바이마르공화국이 너무나 쉽게 나찌 당에 의해 붕괴되는 것을 경험하고 난 뒤, 1950년대 초반에 전체주의를 주창하는 유사 나찌 당과 유사 볼쉐비키 당들을 강제 해산시키고, 그 주요 구성원들은 공직에서 추방하였다. 전체주의 정체와 공화주의 정체는 양립할 수 없다는 확고한 방침을 천명한 것이다. 그 이후 시민사회를 정치사회로 동원하는 것을 금하고 그 자율을 존중하고, 그런 자율과 시민적 자유를 정치사회가 보장하게 하는 체제는 직접 민주정 체제가 아니라 대의 민주정 체제라는 인식이 시민들 속에 널리 자리 잡았다.

 

시민들의 자유와 ‘자유의 소유에 대한 안전’을 보장하는 공화국을 지키려면 시민들은 자유를 파괴하려는 악당들을 정직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자유의 대가는 영원한 경계(eternal vigilance)이다.'(필립 페팃, <신공화주의>)

 

마찬가지로 민주공화국을 지키기 위해서도 시민들은 늘 불침번을 서야 한다.

 

민주공화국은 공짜가 아니다.


[덧붙이는 글]
['제3의 길' 轉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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