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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40주년 특집(6)] ‘폭력과 사랑의 변증법’ 2020-05-11
김형석 whytimes.pen@gmail.com

▲ 5.18 당시의 전남대학교 후문에서 진압군과 대치하고 있는 장면 [사진=Why Times DB]


  얼마 전 미국 ABC방송 파넬 특파원이 한국의 코로나19 사태를 소개한 보도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사람의 인격'이란 오히려 위기에서 드러나듯 '도시의 품격' 또한 극한 상황에서 확인된다. 카뮈는 재앙에 맞서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라고 했다. 현실에서 그것을 체감할 수 있는 곳이 지금 대구다. 품격 있게 바이러스와 싸우는 대구는 결국 승리할 것이다.” 이렇게 대구는 초유의 위기 앞에서 절제되고 품격 있는 대응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번 코로나19 사태 당시 대구처럼 40년 전의 광주도 그러했다. 5.18은 격렬한 항쟁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질서의식과 치안 상황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더욱이 계엄군이 외곽으로 철수하고 해방구가 된 5일 동안 발생한 사건사고 숫자가 1건의 가족 살인사건과 3건의 단순 절도사건 뿐이다. 5.18 당시 72만 인구인 광주에서 하루 평균 1건에도 미치지 않는 사건이 발생한 것은 다른 도시와 비교해도 실로 놀라운 기록이다. 


  금융기관들에도 아무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 1980년 5월 20일 통계로 광주시내 42개 시중은행이 보유한 현금은 1,500억 원이었다. 만약에 은행이 털리면 큰 혼란이 야기될 수 있었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상황에도 은행을 습격한 사람은 없었다. 광주시 325개 기업체가 보유한 현금도 상당했고, 전남도청 회계과 사무실 금고에는 공무원의 급여를 지급하기 위해 찾아둔 현금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이 돈에 손대지 않았다. 


  1977년 7월 13일 미국 뉴욕시에 전기를 공급하는 웨스트체스터카운티의 콘에디슨발전소에 낙뢰사고가 발생하여 26시간동안 정전이 되자, 뉴욕에서는 1,616개의 가게들이 약탈당하고 1,037건의 화재가 발생했으며, 절도와 방화, 폭력 혐의로 체포된 사람만 3,776명에 달했으며 그로 인해 3천억 원이 넘는 재산상 피해가 있었다. 이 사건과 비교할 때 놀라운 사회현상인 것은 분명하다. 


  외국 기자들은 질서정연한 광주시민들의 생활을 목격하고 놀라워했다. 5․18항쟁 기간 동안 광주 시내 치안상황은 전반적으로 평온을 유지했다. 금융기관은 물론이고 도심의 상가에도 몇 개 점포의 진열장 유리만 깨졌을 뿐 피해품은 거의 없었으며, 백화점들에서도 약탈이나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5.18의 공로자는 전남도청에서 항쟁하면서 노선투쟁을 벌인 소수의 지도부가 아니라, ‘혼돈의 도시’였던 광주에서 극심한 혼란의 시간을 거치면서도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준 광주시민들이었다.  


  그러면 무엇이 5․18항쟁 기간 열흘 동안 광주를 범죄 없고 서로 돕는 대동사회로 만들 수 있었을까?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의 최정운 교수는  '오월의 사회과학'에서 “폭력과 사랑의 변증법이 절대공동체를 등장시켰다”고 그 배경을 설명한다. 


  “20일 오후 3시경 수백 명의 시민들이 최루탄 연기 속에서 연좌농성을 시작했다. 학생 하나가 연설하며 구호를 선창하고 유인물을 낭독하며 시민들의 분위기를 돋웠다. 군중은 삽시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학생들은 시민들에게 운동권 노래를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누군가 모두가 다 아는 애국가와 아리랑을 부르자고 했다. 아리랑을 부를 때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 이미 시민들은 하나 됨을 확인했고 시위는 전 시가를 거쳐 걷잡을 수 없이 거세졌다. 길거리에는 시민들이 김밥, 주먹밥, 음료수, 수건, 담배 등을 가지고와 나눠주며 시위대를 도왔다. 광주시민은 하나로 뭉쳤고, 수많은 사람들이 시 외곽에서 몰려왔다. 이처럼 삽시간에 전 시민이 하나로 똘똘 뭉쳐지는 과정을 합리적인 언어로 설명할 방법은 없을지 모른다. 이심전심으로 유사한 시간에 시민들은 공포를 극복하고 시위에 합류했다. - "


  최정운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절대공동체는 군대와 같이 누군가 투쟁을 위해서 개인을 억압하여 만든 조직이 아니다. 폭력에 대한 공포와 자신에 대한 수치를 이성과 용기로 극복하고 목숨을 걸고 싸운 시민들이 만나 서로가 진정한 인간임을, 공포를 극복한 용기와 이성 있는 시민임을 인정하고 축하하고 결합한 절대공동체다.


 “살아남기 위해 싸운다.”, “우리 고장은 우리 손으로 지킨다.”는 말은 분명히‘개인의 목숨’과 ‘공동체의 삶’이 일치되었음을 보여준다. 생명의 나눔은 헌혈을 통해 피를 나눔으로써 구체화되었다.


20일 수만 명에 이른 시위대가 어디를 가든 아주머니들이 김밥, 주먹밥, 음료수 등을 수고한다며 올려 주었고, 차 안에는 먹을 것이 그득히 쌓였으며 시위대는 시민들의 뜨거운 성원에 확신을 갖고 결의를 다졌다. 저녁부터 눈에 띄던 음식 제공은 21일 아침에는 전 광주시민으로 파급되고, 기존의 반상회 조직은 돈이나 쌀을 갹출하는 조직으로 활용되었다. 


  5월 18일부터 21일까지의 저항기간에 광주에 한시적으로 등장한 절대공동체는 무자비한 폭력에 맞섰던 시민들의 희생정신과 공동체정신이 빚어낸 사랑의 변증법이었다. 또 다른 ‘사랑의 실천 장’은 병원이었다.


  당시 광주기독병원 진료기록부에는 5월 20일 응급환자 4명이 병원 응급실로 들어왔는데, 1명은 외상, 3명은 총상환자였다.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있은 후에는 병원에 총상 환자가 몰려왔다. 병실이 가득 차서 복도, 대합실, 휴게실, 분만실까지 매트리스를 깔고 환자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의료진은 수술에 대해 우선순위를 정할 수밖에 없었고, 관통상을 입은 환자부터 먼저 수술을 실시했다. 


  이때부터 광주기독병원의 5개 수술실은 3일 동안 불이 꺼지지 않았다. 외과와 정형외과 의사들이 모두 참여해서 50명이 넘는 총상환자를 수술했고 피로를 가눌 수가 없을 정도로 밀려왔지만 수술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곳곳에서 신음하는 환자들과 피비린내로 가득 찬 병원 모습을 보고 광주기독병원 사람들은 집에 갈 수도 없었다. 간호사들은 4인 1조 3교대 근무였으나 모두 쉬지 않고 1주일 동안 계속 근무했다. 


  수술과 관련 없는 내과, 치과 등의 의사들과 관리직원들은 환자를 옮기고 약품을 나르는 등 쉬지 않고 일을 도왔다. 병원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한 직원들도 찾아와서 각 분야에 배속 되어 구호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50명이 넘는 총상 환자를 한 명도 죽이지 않고 살려내는 기적이 일어났다. 


  [기독교수습대책위원회와 광주시기독교비상구호위원회]


  한편 5.18 당시 종교계 차원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한 것은 기독교다. 5.18이 일어나자 다음 날인 19일 광주제일교회에서 한완석 목사의 주재로 전남노회 대표들이 모여서 대책을 논의하였으며, 22일에는 15개 교파의 200여 교회를 대표한 100여 명의 목사․장로들로 광주시기독교수습대책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광주 교계의 원로인 김신근 목사(1914-1996, 광주 숭의학원 설립자)를 위원장에 추대되었고, 한완석 목사는 고문을 맡는 한편 전남도청에서 모인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 참여했다. 같은 기독교이지만 신앙노선과 사회참여 문제를 놓고 대립하던 15개 교파가 이렇게 빠른 시간에 동참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뒤이어 25일 오전에 주일예배를 마친 교계 지도자 50여 명이 오후에는 광주제일교회에서 기도회를 가졌는데, 이때 한완석 목사가 설교에서‘교회가 평화적인 해결에 앞장설 것’을 촉구한 것이 일부 참석자의 반발을 불러왔다.


'계엄사 상황일지'의‘ 시국 수습을 위한 목사 동향’보고서에는 한 목사가 계엄당국의 포고령에 의해 집회가 금지되어 저녁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계엄사와 접촉하여 예배를 정상화하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한 것이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이에 기독교수습대책위원회는 광주제일교회에서 모임을 갖고 명칭을 광주시기독교비상구호위원회로 바꾸고 위원장에 한완석 목사, 총무에 방철호 목사를 선출했다. 불필요한 오해와 시비에서 벗어나 구호활동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동 위원회는 모금운동을 전개한 결과 국내·외 94개 교회와 기독교기관이 보내온 성금은 약 4천만 원(39,999,761원)이었다. 이 성금으로 광주기독병원·전남대병원·조선대병원·국군통합병원 등에 입원한 민간인은 물론 군인, 경찰 등 549명(타 지역으로 이송된 48명: 서울 34명, 대구 7명, 대전 3명, 부산 3명, 진해 1명 포함)과 개인병원에 입원한 환자 33명에게도 위로금을 전달하고, 목사들을 12개 조를 편성하여 사망자 102명(경찰 포함)의 가정을 일일이 방문하여 위로금을 전달하고 유족들을 위로했다.  


  사망자에 대한 장례가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구용상 시장을 방문하여 묘지를 망월동으로 지정해 줄 것을 요청한 결과 29일에 변남주·방철호·노정열 목사의 집례로 망월동묘지에서 기독교식으로 47명의 장례식을 처음으로 거행했다. 또한 보안대, 정보부, 경찰서 등을 계속 방문하여 구속자 석방을 건의하고, 교도소를 방문하여 위문품과 영치금을 넣어 주며 위로해 주었다. 광주시기독교비상구호위원회의 활동은 5.18로 인한 시민의 상처를 위로해주는 인도주의적인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그해 11월 8일까지 6개월 동안의 활동을 마치고 해산했다. 


  [5.18의 실상이 외부에 알려지다]


  광주시기독교비상구호위원회의 모금운동이 국내외 기독교계로 확산되면서 5.18의 실상이 외부에 알려지게 된 것은 특히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런 가운데 5월 30일 서강대 무역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의기가 종로5가 기독교방송국 6층에서 신군부의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와 유혈진압을 비판하는 '동포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유인물을 뿌린 뒤 투신하여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경북 영주 출신의 김의기는 대학에 입학한 후 KUSA(Korea Unesco Student Association, 한국유네스코학생회)에 가입하여 농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농촌봉사활동에 앞장섰다. 


  서울의 대표적인 운동권 교회이던 형제교회를 출석하면서 감리교청년회 농촌선교위원장, 한국기독청년협의회 농촌선교분과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함평고구마사건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광주를 왕래하던 중 5.18을 목격하고, 서울에서도 지원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던 중  5월 30일 기독교회관에서 모이는 금요기도회 소식을 듣고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작성하여 참석자들에게 배포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회관 6층에서 광주사태의 실상을 폭로하는 유인물 뿌리다가 경찰에 쫓기게 되자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은 5.18이  서울로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의기의 모교인 서강대학교에는 사단법인 김의기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 그를 추모하는 기념사업이 펼쳐지고 매년 5월마다 ‘의기제’가 열리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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