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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40주년 특집(5)] ‘도청안의 쿠데타’ 학생수습위원회의 가장 큰 이슈는 무기 반납 2020-05-07
김형석 whytimes.pen@gmail.com


▲ 5.18 직전인 5월 16일 광주시내에서 일어난 햇불시위 [사진=김형석/ Why Times]


5월 25일 저녁에 일어난 소위 ‘도청안의 쿠데타’는 5.18의 흐름을 완전히 되돌린 분수령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학생수습위원장이 김창길에서 김종배로 바뀌고, 명칭이 학생수습위원회에서 민주투쟁위원회로 바뀐 것만이 아니라, 그때까지의 민주화운동이 무장 항쟁을 통한 사회주의혁명으로 선회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4일 저녁에 열린 학생수습위원회의 가장 큰 이슈는 무기 반납이었다. 그것은 무기 회수와 달리 ‘시민군의 무장해제’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무기 반납을 통해서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려는 김창길 위원장과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비폭력을 주장한 종교계의 주장이 일치하면서 무기를 속히 반납하자는 입장으로 급진전되었다. 그러나 반발도 만만치 않아서 회의는 자정을 넘어서까지 계속되었고, 25일 새벽 1시경에는 학생수습대책위원 중 일부가 조직에서 이탈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5일 새벽에 학생수습위원회는 김창길의 주도로 모든 무기를 반납하기로 결정했다. 시민군의 총기를 회수하여 전남도청 안에 모아놓고 모두가 도청에서 빠져나가기로 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윤상원은 무기 반납을 반대하던 부위원장 김종배와 상황실장 박남선을 규합하여 무기 반납을 막고 시민군을 한군데 집결시켜 전투력을 강화하자는데 뜻을 모았다. 그날 오후 윤상원은 YWCA에서 운동권 학생 30명을 데려와서 회의장 옆방에 대기시켰으며, 회의장에는 강경파인 김종배·허규정에 전남대 출신 운동권인 윤상원·정상용·이양현이 합류했다. 


이들은 7시경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김창길을 비롯한 온건파를 투항파로 몰아세웠다. 격렬한 논쟁을 마친 9시경에 김창길이 학생수습위원장직을 내려놓고 도청을 떠났으며, 김종배를 위원장으로 한 항쟁파 지도부가 새롭게 태어났다. 이것이 1980년 5월 25일 도청 안에서 쿠데타의 실상이다.


 그러나 이때 박남선이 권총으로 김창길을 위협하여 강제로 내쫓았다는 설이 유력하게 전해지고 있다. 김종배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도 신변 위협을 느껴 박남선이 붙여준 무장 경호원 두 명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민주화운동을 위해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학생수습위원회가 기성 정치인들 뺨치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어쩌면 그들이 그토록 증오하던 군사쿠데타를 닮은 듯이 행동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이 같은 궁금증은 이때까지 학생수습위원회와 거리를 두고 있던 노동자계급의 참여라는 시각에서 이해할 수가 있다. 


노동운동가 이정로가 <노동해방문학> 2호에 쓴 ‘광주 봉기에 대한 혁명적 시각 전환’에 의하면, “무기회수와 ‘무기회수 반대’간의 투쟁은 광주지역에서 확보한 무장봉기의 승리를 유지하면서 전국적인 파쇼타도투쟁으로 발전시킬 것인가, 아니면 파쇼 권력에게 무기력하게 투항할 것인가의 문제였다”라고 정의한다. 이런 시각에서 그는 ‘광주봉기는 민족·민주혁명의 교과서’라고 평가한다. 여기서 말하는 노동운동가 이정로는 1989년 박노해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결성한 백태웅의 필명이다.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로 시작된 5.18은 19일부터 민중항쟁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시위 형태가 시가전의 성격을 떼기 시작하면서 시위대에는 어느 듯 노동자들이 학생들보다 더 많은 숫자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대오의 선두에서 활약했기 때문이었다. 본격적인 무력항쟁이 시작된 20일에는 오후 2시부터 무등경기장에 모인 2백여 명의 택시 운수 노동자들이 도청을 향해 돌격하였고, 운수노동자들의 활약에 고무된 박남선 오한균 등은 동운동 고가도로 밑의 주유소에 본부를 정하고 고속도로 톨케이트를 점령하고 고속도로를 차단한 모든 차량을 징발하는 작업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화물트럭과 대형버스가 선두와 양 옆을 호위하고 소형 택시들이 대오를 이루는 차량돌격대를 편성하였으며, 오후 7시에는 유동 쪽에서부터 수많은 차량이 일제히 비상 라이트를 켜고 동시에 경적을 울리면서 도청을 향해 돌진했는데, 대형트럭 4대와 시내버스 11대가 선두에 서고 2백여 대의 택시가 그 뒤를 따랐다. 다음 날인 21일에는 아세아자동차공장에서 APC장갑차 3대를 포함한 360여대의 차량을 징발하였고,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나주로 향하는 버스 7대에는 방직공장 여성노동자들이 돌격대로 나섰다.


이렇게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시위대에 의해 이날 전남도내 17개 시군의 38개 무기고가 털렸으며, 화산탄광에서는 광부들의 협조로 다이너마이트와 뇌관이 넘겨졌다. 이런 가운데 21일 오후 4시경 광주공원에서 최초로 120여명의 무장혁명군을 편성하고 시민군으로 불렀다. 항쟁의 선두에서 활약하던 트럭운전사 출신의 박남선은 상황실장, 자개조각공 윤석루는 기동타격대장, 식당종업원 김화성은 경비대장으로 선임이 되어 시민군의 중추를 이루었다. 그리고 박남선과 김화성 등은 25일 새벽에 일반인도 참여하는 확대 학생수습위원회의 성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노동자 시인으로 유명한 박노해는 박남선의 등장에 대하여 “도청 지도부 실세는 무장력을 관장하는 박남선을 중심으로 하는 상황실이었다. 박남선은 봉기한 광주 민중의 무장력을 출중한 혁명적 지도력에 의하여 점차 조직적으로 장악해가고 있었다. 무장투쟁에서 익힌 ‘안면’과 역동하는 봉기상황에서 발휘한 ‘단호한 결단력’이 그의 지도력의 핵심이었다.”고 평가하였다. 


그런데 이 같은 박남선을 주목하고 학생수습위원회를 장악하는데 활용한 사람이 윤상원이다. 박노해는 두 사람의 만남을 이렇게 설명한다.


“박남선은 항쟁지도부에서 갑작스럽게 부상했지만 정치의식이 부족하고 조직적으로 훈련되지 못한 인물이다. 그런 한계를 알면서도 며칠간의 혁명적 상황에서 수십 년을 상회하는 정치의식과 지도력을 응축하여 체득한 혁명 지도자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선 사람이 윤상원이었다. 그 당시 박남선은 탁월한 ‘민중봉기의 영웅이자 스타’였지만, 그를 이끌어줄 감독이 필요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박노해의 말처럼 윤상원과 박남선의 만남은 학생운동권과 노동운동권의 연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5.18에 참여한 세력의 성향을 분류하면 네 그룹으로 나눌 수가 있다. 제1 그룹은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 참여한 광주시민사회와 종교계 어른들로 이들은 국가의 공권력을 존중하고 치안과 질서유지를 우선시하던 국가주의자들이었다. 제2 그룹은 학생수습위원회 내의 온건파들로 민주화를 주장하면서도 체제 순응적인 성향을 띠었다. 제3 그룹은 학생수습위원회 내의 강경파들로 사회 변혁을 꿈꾸며 파리 코뮌 스터디그룹에 참여하고 있었다. 제4 그룹은 노동자 해방과 사회주의국가 건설을 지향하면서 무장봉기를 주장하던 시민군 세력이었다. 


제1그룹과 제2그룹은 평화시위라는 공감대를 공유하면서 나흘 동안 무기 회수와 구속자 석방을 추진했고 마지막에는 무기 반납을 통한 조속한 사태 수습을 도모했다. 그에 비해 제3그룹과 제4그룹은 사회 변혁을 지향했기 때문에 최후의 일전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 제3그룹과 제4그룹의 가교 역할을 하면서 김종배와 박남선을 연결하여 혁명세력을 구축하고 도청 안의 쿠데타를 주도한 사람이 윤상원이다. 


윤상원은 광주운동권 인사들의 모임 터인 녹두서점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민주회복통일국민회의 사무국장과 전민노련 중앙위원 겸 광주지역 노동운동 총괄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22일 시위대가 도청을 장악하자 안으로 들어가서 녹두서점과 YWCA에 머무르는 운동권을 학생수습위원회의 강경파와 연결했다. 그러다가 25일 새벽 학생수습위원회가 무기 반납을 결정하자, 김종배·박남선과 연대하여 번복시키고 김창길의 온건파를 무너뜨리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도청 앞 광장에서 열린‘광주지역 10개 대학연합 민족 ․ 민주화 대성회’는 5.18민주화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댕긴 사건이었고, 그 대미를 장식한 16일 밤의 횃불행진은 모범적인 ‘평화 시위’로 기록될만한 민주화운동이었다. 광주지역 학생운동연합 지도부가 이날의 시위를 횃불행진으로 진행키로 결정한 것은 5․16군사쿠데타에서 유신독재로 이어진 18년간의 암흑기를 민주화의 횃불로 밝히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당시 현장에 참여한 전남대 송기숙 교수는 1990년 <월간 예향>에 기고한 「5월의 꿈, 5월의 분노」에서 그 감동을 이렇게 묘사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횃불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 천여 개가 넘는 횃불이 밤하늘을 밝혔다. 횃불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횃불은 아득히 금남로를 뻗어 나갔다. 장관이었다. 경찰의 저지가 없었으므로 학생들은 그만큼 기분이 안정되어 있었고, 사흘간의 집회를 마무리 짓는 축제였기 때문에 한결 느긋한 기분들이었다.


솜뭉치에 불이 활활 타는 횃불은 어둡고 괴로웠던 유신의 땅에 민주화의 새벽을 밝히는 성스러운 불빛이었다. 그 횃불 하나하나는 모두가 생명으로 펄펄 살아 이 땅에 펼쳐질 찬란한 민주화를 춤추는 환희였고, 압제와 수탈을 거부하는 굳건한 의지를 하늘 높이 소리치는 함성이었으며, 간악무도한 독재사슬을 불태우는 활화산이었다. 기나긴 횃불행렬은 젊은이들의 우렁찬 노랫소리에 맞춰 너울너울 춤추며 광주의 거리를 장강대하처럼 굽이굽이 누비고 있었다. 거리마다 쏟아져 나온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터질듯 한 감격과 지지를 고함으로 내질렀다. 학생과 시민이 한 덩어리로 어우러지는 가슴 벅찬 공감의 한마당 드라마였다. 횃불행진은 질서정연했고 그 모양은 하나의 예술을 방불케 한 장관이었다. 운동과 예술의 아름다운 결합이었다.


교수들은 학생들의 치밀한 준비와 일사불란한 행사 진행에 감탄을 했다. 신학기 시작 때부터 학생회가 탄생할 때까지의 각종 행사 계획과 진행이며, 학교와의 일정한 협력관계 등 보직교수들도 이구동성으로 학생들의 성숙성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교수들은 만일의 사고에 대처하려고 횃불행렬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한 건의 사고도 없이 행진은 끝이 났다. 


학생들은 이 횃불시위로 사흘간에 걸친 ‘민주화성회’의 대단원을 장식한 것이다. 사흘간의 ‘민주화성회’를 이런 축제로 마무리 지은 학생들의 발상은 놀라운 것이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이 한마당 횃불의 축제로 학교 운동장에서만 목메게 외치던 학생들의 민주화에 대한 의지와 확신을 광주 전 시민들의 가슴속에 못을 박듯 확실하게 각인을 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청안의 쿠데타는 ‘민주화 대 성회’ 이래 지속된 열흘간의 평화적 민주화운동의 성격을 무장 봉기를 통한 사회주의국가 건설로 바꾼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5.18이 과연 민주화운동인가? 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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