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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벗칼럼] 대법원의 ‘강제징용 상고심’ 결과에 대하여(1) 2018-11-08
길벗 enkyryu1@naver.com
-한국인 비서 두고 한국어도 직접 배우는 등 최고의 친한파 인사 고노 다로 외상마저 등돌려
-“재판의 원고들은 징용이 아니라, 모집에 응한 한반도 노무자”라는 아베 발언, 절반의 진실
-청구권협정 직후 일본도 한국 국민의 일본 내 권리 소멸시키는 내용의 ‘재산권조치법’ 시행


▲ 징용이냐 모집 노동자냐. 해방 이전 조선인들이 동원되어 일했던 후타세탄광의 모습 [제3의 길]


제가 우려한 것이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대법원이 지난 10월 30일, ‘강제징용 상고심’에서 일본 기업(신일본제철)에게 패소 판결을 내리자 곧바로 일본은 항의성명을 내고 일본 기업들에게 한국의 대법원 결정에 따르지 말도록 지침을 내렸습니다. 야후저팬의 관련 기사의 댓글에는 “당장 한국과 단교하라”는 등의 험한 이야기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 댓글들에 추천수도 2만 이상을 기록하는 등 일본 내의 분위기는 예상했던 대로입니다.


고노 다로 외상도 주일 한국대사를 불러 엄중 항의하고 친한파 국회의원들도 모두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고노 다로 외상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하는 ‘고노 담화’를 냈던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의 아들로 한국에 대해 무척 우호적인 인물입니다. 비서도 한국인을 채용하고 한국어도 직접 배우는 등 최고의 친한파 인사입니다. 물론 고노 다로는 일본 외상이니 일본 입장을 대변할 수밖에 없지만, 고노 다로 외상마저도 한국의 이번 결정에 대해서는 화가 단단히 난 것으로 보입니다. 예사롭지 않습니다.


앞으로 일본이 어떤 조치를 취할지 심히 우려됩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국제정세나 국제법을 무시한데다 한국의 대외신용도를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멍청한 처사입니다.


앞으로 한일간에 벌어질 일에 대해 우리 국민들은 너무 안이하게 생각합니다. 이번 대법원의 결정은 소중화주의에 빠져 쓰러져 가는 명나라를 끝까지 사대하던 척화파들의 정신승리와 다를 바가 있을까요? 그래도 척화파는 의리를 지킨다는 대의명분이라도 있었지만, 이번 대법원의 결정은 민족의 자존심을 세운 것도 아니고 역사를 바로 잡은 것도 아닙니다.


[‘징용공이 아니라 모집에 응한 조선인 노동자’라는 아베의 말은 사실일까?]


아베가 “재판 원고는 징용공이 아니라 모집에 응한 한반도 출신 노동자”라고 칭하자, 한국 내에서는 아베가 강제 징용한 사실을 희석화하려는 꼼수를 부린다고 비난합니다만, 사실 아베의 말은 완전한 잘못은 아닙니다. 아베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지만, 우리 국민들이나 언론들이 생각하는 ‘강제 징용’은 객관적 사실과 거리가 멉니다.


   [관련기사: “소송한 사람들, 강제징용 아니다”는 아베]


이번 대법원 판결의 원고들이 신일본제철에 노역을 하게 된 시기와 일본에 가게 된 경위는 아래와 같습니다. 2012년, 이들 원고들에게 승소 판결을 내린 대법원 소부의 판결문에 나와 있는, 관련된 내용을 올리겠습니다.


<신일본제철 주식회사에 강제 징용된 피해자들의 사연(대법원 2012.5.24. 선고 2009다68620)>


•신일본제철주식회사는 1943년 평양에서 오사카제철소의 공원모집 광고를 냈는데, 그 광고에는 오사카제철소에서 2년간 훈련을 받으면 기술을 습득할 수 있고 훈련 종료 후 한반도의 제철소에서 기술자로 취직할 수 있다고 기재되어 있었다. 원고 여○○, 신○○는 1943. 9.경 위 광고를 보고, 기술을 습득하여 한반도로 돌아와 취직할 수 있다는 점에 끌려 응모한 다음, 평양에서 신일본제철 주식회사의 모집담당자와 면접을 하고 합격하여 위 담당자의 인솔 하에 신일본제철 주식회사의 오사카제철소로 가서, 훈련공으로서 노역에 종사하였다.


•오사카제철소에서 원고 여○○, 신○○는 1일 8시간의 3교대제로 일하였고, 한 달에 1, 2회 정도 외출이 허용되었으며, 한 달에 2, 3엔 정도의 용돈만 지급받았을 뿐이고, 신일본제철 주식회사는 임금전액을 지급하면 낭비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원고 여○○, 신○○의 동의를 얻지 않은 채 위 원고들 명의의 구좌에 임금의 대부분을 일방적으로 입금하였으며, 그 저금통장과 도장을 기숙사의 사감에게 보관하게 하였다.


•원고들은 화로에 석탄을 넣고 깨뜨려서 뒤섞거나 철 파이프 속으로 들어가서 석탄찌꺼기를 제거하는 등 화상의 위험이 있고 기술 습득과는 별 관계가 없는 매우 고된 노역에 종사하였는데, 제공되는 식사는 그 양이 매우 적었다. 또한, 경찰이 자주 들러서 위 원고들에게 ‘도망치더라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말하였고 기숙사에서도 감시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위 원고들은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하였는데, 원고 신○○는 도망가고 싶다고 말하였다가 발각되어 기숙사 사감으로부터 구타를 당하고 체벌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일본은 1944. 2.경 훈련공들을 강제로 징용하였고, 원고 여○○, 신○○는 징용 이후에는 용돈도 전혀 지급받지 못하였다. 오사카제철소의 공장은 1945. 3.경 미합중국 군대의 공습으로 파괴되었고 이때 훈련공들 중 일부는 사망하였으며, 원고 여○○, 신○○를 포함한 나머지 훈련공들은 1945. 6.경 함경도 청진에 건설 중인 제철소로 배치되어 청진으로 이동하였다.


원고 여○○, 신○○는 기숙사의 사감에게 임금이 입금되어 있던 저금통장과 도장을 달라고 요구하였지만, 사감은 청진에 도착한 이후에도 위 통장과 도장을 돌려주지 아니하였고, 원고 여○○, 신○○는 청진에서 하루 12시간 동안 공장건설을 위해 토목공사를 하면서도 임금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 원고 여○○, 신○○는 1945. 8.경 청진공장이 소련군의 공격으로 파괴되자, 소련군을 피하여 서울로 도망하여 일제로부터 해방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원고 이○○은 1941년 대전시장의 추천을 받아 보국대로 동원되어 보령에서 신일본제철 주식회사 모집담당관의 인솔에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신일본제철 주식회사의 가마이시제철소에서 노역에 종사하였는데, 임금을 저금해준다는 말을 들었을 뿐 임금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


•원고 이☆☆는 1943. 1.경 군산부(지금의 군산시)의 지시를 받고 모집되어 신일본제철 주식회사의 인솔자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신일본제철 주식회사의 야하타제철소에서 노역에 종사하였는데, 임금을 전혀 받지 못하였고, 도주하다가 발각되어 약 5일 동안 구타를 당하기도 하였다.


•원고 이○○, 이☆☆는 1945. 8.경부터 같은 해 12.경까지 사이에 각 제철소가 공습으로 파괴되고 일본이 패전하여 신일본제철 주식회사에서 더 이상 강제노동을 시킬 수 없게 되자 각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음은 ‘재일한인역사자료관’의 홈피에 나와 있는 <재일100년 연표> 중 1934년부터 1945년까지의 일본이 실시한 징병, 징용 등과 관련된 각의 결의, 법령 내용입니다.


1934년 10월 30일, ‘조선인 이주 대책의 건’ 내각회의 결정으로 조선인의 일본으로의 도항 억제코자 함.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 발발.
1938년 4월 1일, ‘국가 총동원법’ 공포, 일본 본토에서만 시행, 조선에는 실시하지 않음.
1938년 7월 8일, ‘국민징용령’ 공포, 일본 본토만 시행, 조선에는 미시행.
1939년 7월 31일, ‘조선인 노동자 내지이주에 관한 건’ 통달, 회사 모집에 의한 일본으로의 조선인 노무 동원 개시.
1942년 2월 13일, ‘조선인 노무자 활용에 관한 방책’ 내각회의 결정, 관 알선에 의한 일본으로의 조선인 노무 동원 개시.
1944년 8월 8일, ‘반도인 노무자의 이입에 관한 건’ 공포, 조선인에 대한 징용제 실시.
1944년 9월, 조선인에 대해 ‘징용’에 의한 조선 국내, 일본, 만주, 등으로의 노무 동원 개시.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전, 조선 해방.


일본 정부는 1934년, 조선인들이 밀항으로 대거 일본으로 밀려들자, 조선인의 일본 도항을 억제하기 위해 ‘조선인 이주 대책의 건’을 내각회의로 결정해 공표합니다. 동남아 외노자들이 불법 체류하면서까지 한국으로 돈 벌러 왔던 현상과 유사하지요.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국민징용령’을 공포하고 일본 본토의 일본인에 대해 징용이 실시됩니다.


1939년부터는 민간 기업의 모집에 의해 조선인이 일본에 노무자로 들어가기 시작하지만, 이는 징용과 무관하고, 조선인들의 자발적 의사에 따라 일본 민간기업의 모집에 응소해 일본에 돈 벌러 갔던 것입니다.


1942년에는 관의 알선으로 일본으로 일을 나가기 시작하지만, 이 때도 마찬가지로 ‘징용’이 아니라 형식은 자발적 의사에 따른 일본 진출이었습니다. 실제 ‘징용’은 1944년 9월부터 시작되어 1945년 8월까지 약 1년간에 걸쳐 일어난 일이고 이 시기에 조선, 일본, 만주 등에서 ‘징용’으로 노역한 사람들이 실제 ‘징용자’들입니다.


‘징용’이란 국가가 법에 의해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로 노역을 명하는 것으로 ‘징용’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강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강제징용’이란 말은 ‘역전앞’이라는 말과 같이 단어 반복으로 적절한 용어는 사실 아닙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1944년 9월 이전에 민간기업의 모집이나 관의 알선에 의해 본인의 의사에 따라 일본에 돈 벌러 간 사람들도 ‘강제징용’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1944년 9월~1945년 8월 사이의 ‘징용’과는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지어 밀항하여 일본에 돈 벌러 간 사람들도 ‘징용’ 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소송을 한 원고들은 모두 민간기업의 모집이나 관 알선으로 일본으로 돈 벌러 건너갔다가 1944년 8월, 조선인에 대해서도 징용령이 발령되자, 그 때부터 ‘징용자’ 신분으로 전환된 사람들입니다.


아베가 ‘재판의 원고들은 징용이 아니라 모집에 응한 한반도 노무자’라고 한 배경에는 이런 역사적 내막이 있습니다. 제가 아베의 말이 반은 맞다고 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아베는 1944년 9월 이후부터는 이들이 ‘징용자’로 신분이 전환되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은 틀린 것이죠.


[일본 법원의 판결과 한국의 대법원 판결 비교]


먼저 일본 법원이 어떻게 판결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일본 판결은 원고들에 대한 징용경위에 대하여 “당시 일본국 정부, 조선총독부 등이 전시 하의 노무동원을 위한 적극적인 정책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위 원고들은 모두 노동자 모집 당시의 설명에 응하여 그 의사에 의하여 응모함으로써 오사카제철소에서 노동하기에 이른 것이고, 이들의 의사에 반하여 강제 연행한 것은 아니”라고 보아, “위 원고들이 응모한 1943. 9.경에는 이미 ‘조선인 내지 이주 알선요강’에 따라 사업주의 보도원(補導員)이 지방행정기관, 경찰, 그리고 조선노무협회 등이 연계된 협력을 받아 단기간에 목적한 인원수를 확보하고, 확보된 조선인 노무자는 사업주의 보도원에 의해 인솔되어 일본의 사업소로 연행되는 ‘관 알선 방식’으로 징용이 실시되었는데, 이것은 일본국 정부가 후생성과 조선총독부의 통제 하에 조선인 노동력을 중요기업에 도입하여 생산기구에 편입하려는 계획 하에 진행된 것으로서 실질적인 강제연행이나 강제징용이었다”는 위 원고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당시의 원고 등을 일본인으로, 한반도를 일본 영토의 구성부분으로 봄으로써, 원고 등의 청구에 적용될 준거법을 외국적 요소를 고려한 국제사법적 관점에서 결정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처음부터 일본법을 적용하였다.


일본 판결은 신일본제철이 사전 설명과 달리 위 원고들을 오사카제철소에서 자유가 제약된 상태로 위법하게 강제노동에 종사하게 한 점, 실질적인 고용주로서 위 원고들에 대하여 일부 임금을 지급하지 아니하고, 안전배려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아니한 점 등 위 원고들의 청구원인에 관한 일부 주장을 받아들였다.


일본 판결은 미쓰비시중공업주식회사 내지 신일본제철주식회사와의 관계에서 인정될 여지가 있는 원고 등의 청구권은 제척기간의 경과나 시효의 완성으로 소멸하였고, 그렇지 않더라도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과 일본의 재산권조치법에 의해 소멸하였다는 이유로 결국 원고 등의 피고에 대한 청구를 기각하였다.


다음은 한국의 대법원이 어떻게 원고 승소 판결을 했는지도 보겠습니다. 이번 대법원 합의체 판결문은 아직 공개되지 않아 2012년 5월 대법원 소부가 원고 승소 판결한 내용을 원용토록 하겠습니다. 아마 대동소이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시효소멸과 관련해서는 이번 대법원 합의체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점은 감안하시고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4) 일본판결을 승인해야 하는지 여부


가) 일본판결의 근거


일본판결의 이유에는 일본의 한반도와 한국인에 대한 식민지배가 합법적이라는 규범적 인식을 전제로 하여, 일제의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을 한반도와 원고 등에게 적용하는 것이 유효하다고 평가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나) 일본판결이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위반’되는지 여부


A) 대한민국 제헌헌법의 내용


그러나 대한민국 제헌헌법은 그 전문(前文)에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상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하고, 부칙 제100조에서는 “현행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고 하며, 부칙 제101조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현행헌법도 그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규정하고 있다.


B) 사안의 검토


이러한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에 비추어 볼 때,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규범적인 관점에서 불법적인 강점(强占)에 지나지 않고, 일본의 불법적인 지배로 인한 법률관계 중 대한민국의 헌법정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그 효력이 배제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일본판결 이유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판결 이유가 담긴 일본판결을 그대로 승인하는 결과는 그 자체로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위반되는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일본판결을 승인하여 그 효력을 인정할 수는 없다.


(3) 청구권협정에 의한 청구권의 소멸 여부


1) 청구권협정의 의미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2) 사안의 검토


① 청구권협정 제1조에 의해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지급한 경제협력자금은 제2조에 의한 권리문제의 해결과 법적 대가관계가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


② 청구권협정의 협상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하였고, 이에 따라 한·일 양국의 정부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관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③ 원고등의 손해배상청구권에 대하여는 청구권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하지 아니하였음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도 포기되지 아니하였다고 봄이 상당하다.


④ 국가가 조약을 체결하여 외교적 보호권을 포기함에 그치지 않고 국가와는 별개의 법인격을 가진 국민 개인의 동의 없이 국민의 개인청구권을 직접적으로 소멸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근대법의 원리와 상충된다.


⑤ 국가가 조약을 통하여 국민의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키는 것이 국제법상 허용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국가와 국민 개인이 별개의 법적 주체임을 고려하면 조약에 명확한 근거가 없는 한 조약 체결로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 이외에 국민의 개인청구권까지 소멸하였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인데, 청구권협정에는 개인청구권의 소멸에 관하여 한일 양국 정부의 의사의 합치가 있었다고 볼 만큼 충분한 근거가 없다.


⑥일본이 청구권협정 직후 일본국 내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일본국 및 그 국민에 대한 권리를 소멸시키는 내용의 재산권조치법을 제정·시행한 조치는 청구권협정만으로 대한민국 국민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음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점 등을 고려해 보면, 원고 등의 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하더라도 그 개인청구권 자체는 청구권협정만으로 당연히 소멸한다고 볼 수는 없고, 다만 청구권협정으로 그 청구권에 관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이 포기됨으로써 일본의 국내 조치로 해당 청구권이 일본국 내에서 소멸하더라도 대한민국이 이를 외교적으로 보호할 수단을 상실하게 될 뿐이다.


3) 소결


따라서 원고 등의 피고에 대한 청구권은 청구권협정으로 소멸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원고들은 미쓰비시중공업회사와 신일본제철회사에 대하여 이러한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


(4) 일본기업이 소멸시효 완성의 항변을 할 수 있는지 여부


1) 준거법


가) 불법행위지에 따른 준거법


원고 등의 청구권이 성립한 시점에 적용되는 대한민국의 저촉규범에 해당하는 위 ‘법례’에 의하면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의 성립과 효력은 불법행위 발생지의 법률에 의하는데(제11조), 이 사건 불법행위지는 대한민국과 일본에 걸쳐 있으므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에 관하여 판단할 준거법은 대한민국법 또는 일본법이 될 것이다.


나) 원고들의 의사


그러나 이미 원고들은 일본법이 적용된 일본소송에서 패소한 점에 비추어 자신들에게 보다 유리한 준거법으로 대한민국법을 선택하려는 의사를 가지고 있다고 추인되므로, 대한민국 법원은 대한민국법을 준거법으로 하여 판단하여야 한다.


다) 현행 민법


나아가 제정 민법이 시행된 1960. 1. 1. 이전에 발생한 사건이 불법행위에 해당하는지 여부와 그 손해배상청구권이 시효로 소멸하였는지 여부의 판단에 적용될 대한민국법은 제정 민법 부칙 제2조 본문에 따라 ‘구 민법(의용 민법)’이 아닌 ‘현행 민법’이다.


라) 원고들의 의사가 분명하지 아니한 경우


한편, ‘법례’에 의하면 법률행위의 성립 및 효력에 관하여는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서 어느 나라의 법률에 의할 것인가를 정하고, 당사자의 의사가 분명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행위지법에 의하는데(제7조), 앞서의 사실관계에 의하면 미지급임금의 지급청구권에 관하여 판단할 준거법은 일본법이 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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