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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달의 미국 이민 이야기 #1 2018-04-06
봉달 callmeplz@gmail.com
-미국에 오지 않았다면 뭘 하고 있었을까. 로또 당첨? 혹은 단타매매로 20000% 수익?
–회사일 잘 하고 열심히 교회 나가고 근검절약이 몸에 밴 바른생활 기자의 카지노 사랑?
–세입자보호법이 적폐처럼 켜켜이 쌓여있는 미국. 세입자 역시 아무데서나 살면 안된다


▲ 미국 생활에서 가장 먼저 닥쳐오는 문제가 고비용 저효율의 주거비이다

며칠 전 병원 간다고 조퇴를 해서 밀린 일을 하느라 저녁 7시가 다 되도록 아직도 회사다. 원래 4시반이면 칼퇴근인데 오늘 너무 무리하는 것 같다. 배도 고프고 머리도 멍하고 사무실엔 아무도 없고 일에 집중도 잘 안 되네. 오늘은 이쯤 해서 접어야겠다.


하릴없이 페북 탐라를 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난다. 거의 자포자기 심정으로 무작정 미국에 온 게 2006년이다. 그 전에도 96년 대학생이 된 후 LA 삼촌집에 놀러가긴 했었지만 그거야 암 생각없이 몇달 관광이나 한 거니 안 칠란다.


암튼 나이 먹어 남들처럼 준비성 있게 유학이나 주재원으로 온 게 아니고, 인생이 잘 안 풀려 에라 모르겄다 도망치듯 왔다. 사실 그것도 내 의지가 아니라 한국서 다니던 회사 그만 두고 빌빌대고 있으니 큰아버지가 막내 삼촌네나 갔다오라고 비행기 표를 끊어주신 덕분이었다.


그게 아니었음 지금쯤 나는 뭘하고 있었을까. 아마 한국에서 로또가 돼 아너소사이어티의 일원으로 기부를 하면서 매주 단타매매로 20000% 수익도 내고 뭐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암튼 가는 김에 LA 찍고 과 친구가 사는 시카고도 들리겠다고 하니 그렇게 부킹이 됐다.


친구놈은 고시생이었다. 다들 그렇겠지만 항상 공부만 할 순 없고 그렇다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해 유흥비가 넘치는 것도 아니니 신림동 오락실 같은 데나 출몰하는, 그렇고 그런 많은 고시생들 중 하나였다. 이 인간도 세월만 가고 시험은 붙을 기미를 보이지 않자 징징대며 군대를 갔다.


제대 후 식은 머리 더 식히러 잠시 고모가 사는 시카고에 갔다. 거기서 어학연수를 핑계로 1년 가량 빈둥댔던 것 같다. 고시생 버릇이 어딜 가겠나. 맨날 하던대로 베짱이 놀이나 하고 있으니 꼴뵈기 싫은 고모가 사지 멀쩡한 게 어디 가서 캐시잡이나 하라고 잔소리를 했단다. 그래서 찾아본 게 현지 교포사회 회계사 사무실.


미국에서 회계사 특히 한인 회계사들은 하는 일이 한국과는 조금 다르다. 세무, 법무등기, 각종 민원 및 신고 등 기타 잡무를 대신 해주는 경우가 많다. 이놈도 회계사 사무실서 그런 일로 알바를 시작했다.


고모에게는 룸펜이었으나 사장님이나 손님들에겐 성실하면서 꼼꼼한 업무로 날이 갈수록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몇명 밖에 없는 사무실이지만 정식으로 채용되면서 고모집에서 나와 독립할 수 있었다. 어차피 한국 가봤자 별 뾰족한 수도 없고 고시에 미련도 없는데다가 미국에서 여유있게 사는 삶이 괜찮아 보여서였다.


문제는 방이었다. 정직원이면 뭐하나? 급여가 열정페이 수준이라 비싼 렌트를 감당할 수 없었다. 마침 다니던 교회에서 알게 된 횽이 룸메이트를 구한다길래 같이 살기로 했다. 그는 시카고 한국일보 기자였는데 마찬가지로 얼마 되지 않은 월급에 열정이 넘치던 사람이었다.


한국일보 기자는 재밌는 사람이었다. 사람 자체가 위트 있거나 한 건 아니고 하는 짓이 특이해서다. 회사일 빠릿빠릿 잘 하고 열심히 교회 나가고 근검절약이 몸에 밴 사람이었는데,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기 마련이다.


일견 바른생활 그 자체였던 그의 문제는 도박이었다. 본인 말로는 병아리 똥만큼도 안 되는 월급으로 살기 힘들어 부득이하게 재테크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사는 데서 왕복 3시간이나 걸리는 카지노에, 그것도 주말은 교회 가야 하니 안 되고 주중 저녁 취재가 없는 날마다 가는 건 보통 정성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시카고가 있는 일리노이주는 이상한 법이 있어서 No casino on the land of Illinois, 즉 일리노이의 ‘땅’ 위엔 카지노가 못 들어서게 돼 있다. 그래서 너비가 좀 되는 강 한복판에 파일을 박고 카지노를 만들었는데 이 양반이 매주 하루나 이틀은 꼬박꼬박 거기서 밤을 새는 게 아닌가. 아침에 눈이 벌개져서 들어와 출근하고 취재를 핑계로 나가서 쪽잠으로 하루를 버텼다.


이 정도가 되면 사실 정성이 아니라 집착이고 중독이다. 허리띠 졸라매다못해 궁상을 떨면서, 때로는 남에게 민폐까지 끼쳐가며 돈을 모으면 뭐하나. 변호사비 아낀다고 영주권 수속도 본인이 여기저기 물어물어 알아서 다 했지만 그 노력은 고스란히 카지노와 일리노이주의 수익금이 됐을 뿐이다.


암튼 이런 전차로 이 양반은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고 페이첵이 나오는 2주마다 밀린 월세와 공과금을 해결하는, 말 그대로 거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인생이었다. 이제 막 알바에서 정규직이 된 내 친구도 가진 것 없는 빈털털이인 것은 마찬가지. 한국이었으면 무려 정규직 엣헴엣헴 양반 행세를 했겠으나 상놈들이 모여사는 미국에선 알바나 정규직이나 별차이도 없고 어떤 때는 차라리 알바가 나은 경우도 많이 있다.


잔소리쟁이 고모집에서 나와 고단한 몸을 뉘일 쪽방을 찾고 있었지만 미국이 또 어떤 나란가. 요새 페북에서 많이 보이는 패션 신자유주의자분들이라면 기함해 마지않을, 각종 쓰잘데기 없는 규제와 세입자 보호법이 적폐처럼 켜켜이 쌓여 있는 몹쓸 나라다. 남는 공간이 있다고 세를 줄 수도 없고 세입자 역시 아무 데서나 살면 안 된다.


다운타운이나 인기가 많은 업타운, 하다못해 교통이 편리한 시카고시 외곽도 아닌 멀리 서버브 지역인데도 방 한칸 빌리려면 2006년 당시 최소 한 달 500달러는 줘야했다. 그것도 집 사놓고 계좌 빵구날까 허덕이는 못돼쳐먹은 한인 영감네 방 하나 빌리는 비용이지 진짜 아파트 스튜디오를 빌리려면 가격이 적어도 700달러는 됐다.


이런 상황에서 최저임금에 시달리던 그 둘은 같은 교회를 다니다 절절한 기도가 응답을 받았는지 갑자기 은혜 충만하게 살림을 합치기로 했다. 써놓고 보니 좀 이상하지만 동성애나 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과부 사정은 홀애비가 안다고 눈빛만 봐도 몸이 아니 마음이 아니 의식주가 통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어느 페친분도 썼듯 동성애와 HIV를 응원, 아니 그런 것에 대해 아무런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해가 없길 바란다.


잡설이 길었는데 둘은 싸구려 방을 찾다찾다 결국 어떤 한국 사람의 방 2개짜리 지하실로 들어가게 됐다. 임대법상 지하실은 렌트를 줄 수 없으나 피차 이해가 맞아 계약서 같은 것도 없이 그냥 입주한 것이었다. 집주인은 노모를 봉양하고 식솔을 거느린 40초반의 아재였는데 당시 다른 많은 한인들처럼 서브프라임 직전 부동산 광풍에 몸을 맡긴 채 능력 이상의 집을 덜컥 샀던 용자였다. 그 바람에 월초마다 자기 은행에서 바운스가 날까 노심초사하면서 날짜가 되기도 전에 렌트비를 내라고 친절하게 안내해주곤 했다.


기계의 도움 없이 겨울에는 시원하게, 여름에는 따뜻하게 지내자는 자연주의자이기도 해서 나중 일이지만 나와 친구는 기나긴 시카고의 겨울밤을 가스불을 켜놓고 지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안 죽은 게 다행이지만 그땐 시멘트 바닥 히터도 안 들어오는 지하실에서 손발이 너무 시려워 어쩔 수 없었다. 군대 혹한기 훈련할 때 침낭에서 자다 기상해보면 유일하게 밖으로 나온 부분인 코가 얼어있었는데, 시카고 한인 자연주의자네 집 지하실은 아무래도 실내여서 그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침마다 얼굴도 시렵고 사람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여차저차 그 둘은 살 곳을 구했고 한동안 알콩달콩 신혼 아니 신접살림 아니 룸메가 되어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으나 기자의 노름벽 때문에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한두달 어떻게 긁어모아 렌트를 낸 게 전부고 그 뒤로는 감감무소식. 집 들어가기 전에 내는 보증금도 친구가 냈는데 렌트비의 절반을 계속 받지 못하니 회계조무사의 월급 가지고는 많이 힘든 상황이었다.


당시 친구는 나름 앞날에 대한 계획이 있어 미국 공인회계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었다. 한국에서 아무짝에도 쓸 데 없는 정치학을 전공한 문레기인데다 똥폼 잡느라고 고시도 사시로 준비했었기 때문에 학점 중 인생에 도움이 되는 과목이라곤 전무했던 처지였다. 하여 동네 커뮤니티칼리지에 등록해 회계사가 되기 위해 수강해야 하는 클래스를 매주 2-3일씩 저녁마다 가서 들었다.


혹시 이 글을 보는 페친 중에서도 문사철 전공하는 대학생이 있으면 일찌감치 때려치는 게 좋다.


코난 오브라이언이 일갈했던가, 인문계 졸업자들은 직장을 잡고 싶으면 고대 그리스로 가라고. 인문학은 사는 데 별 도움도 안 되고 특히 지금 한국 대학들은 조선시대 향교 서원이나 다름 없는 데서 되도 않는 것들이 훈장질이나 하는 곳이다. 정 그런 학문이 좋으면 취미 삼아 틈틈이 하거나 아니면 예술가 헝그리 정신으로 평생 남의 인정 못받은 채 거지꼴로 살 각오를 하고 전공해야 한다.


얘기가 딴 데로 샜는데 이따가 다시 짚을 테지만 미국이 좋은 게 하고자 하면 길이 있고 형편이 안 좋으면 대안이 있으며 그런 걸로 나중에 불이익을 받거나 가오가 죽거나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친구도 평생 심부름이나 하며 박봉에 시달리는 회계조무사로 인생을 마치고 싶진 않으니 스스로 길을 알아봤고 저렴한 가격에 필수 과목을 듣고 있었다.


근데 망할 룸메이트가 렌트비를 안내니 커뮤니티칼리지가 아무리 싸다고 해도 경제적으로 도저히 감당이 안 됐다. 이 인간은 지도 눈치가 보이고 그러는지 친구가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간 밤에만 잠깐 들어왔다가 다시 도박을 하러 나갔다. 가끔 집에 있는 날에도 친구는 일과 학업에 지쳐 들어오자마자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아침에 정신 좀 차리고 렌트비 얘기를 꺼낼라치면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런 날이 계속되던 중 내가 엘에이 찍고 시카고 들르겠다고 연락을 해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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