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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근현대사: 제7화] 나폴레옹 3세의 군대와 조선군의 싸움: 병인양요 2019-02-03
이민원 minwon1128@hanmail.net


[한강변의 절두산 성지와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

 
서울 한강변의 88고속도로를 따라 김포공항 쪽으로 가다보면, 강 건너로 누에머리처럼 보이는 작은 봉우리가 보인다. 잠두봉(蠶頭峰)이라 불렸던 곳인데, 병인박해 이후 절두산(切頭山)으로도 불려왔다. 과거에는 누에머리처럼 불쑥 솟아 보였지만, 지금은 주변 환경이 변하고 공해도 심하여 주의를 잘 기울여야 멀리서 윤곽이 보인다. 절두산이란 이름은 산 정상에서 천주교도들의 목을 쳐 절벽 아래 한강물로 떨어져 내리도록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신앙을 위해 죽음을 택한 천주교도들의 혼이 깃든 곳이다. 8천 여 명의 희생자를 냈다는 병인사옥(혹은 병인박해), 수년간 지속된 박해 속에서도 가장 생생한 현장이기도 하다. 세력을 팽창하려던 제국주의 국가와 이를 막으려던 약소국의 닫힌 정권 사이에서 애꿎게 희생된 순박한 조선 천주교도들의 순교지이다.


▲ 절두산 천주교도 순교성지 [Naver Blog]


사연은 이러했다.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의 와중에서 조선을 탈출한 신부가 있었다. 리델(Felex Clau Ridel) 신부가 그다. 병인박해 당시 그는 폐롱(Stanisas Feron), 깔레(Adolphe Nicolas Calais) 등의 프랑스 신부와 연락을 취하면서 지방에 은신해 있었다. 대책을 모색한 이들은 리델로 하여금 충청도 해안에서 배로 천진에 가서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Pierre Gustave Rose) 제독에게 조선의 천주교도 박해 사실을 알리게 하였다. 신부와 천주교도 구출을 위해 조선에 군함을 출동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로즈는 북경주재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Henri de Bellonet)에게 즉각 이를 알렸다.


벨로네는 가까운 시일에 조선을 쳐서 국왕을 갈아치울 것이라는 내용의 공문을 청국의 총리아문에 보내었다. 조선은 청국의 속방이기는 하지만 정교(政敎)는 자주에 속한다고 하니, 종교 문제로 벌어진 이 사태에 대해 청국은 양해하라는 뜻이었다. 놀란 청국의 총리아문사무(總理衙門事務) 공친왕이 나서서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중재를 하고자 했다. 조선 정부가 천주교도를 박해하였다면 무력을 행사하기 보다는 우선 진상을 조사해야 할 일이고, 조선도 천주교도 박해에 대해 나름 이유를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양측에 통보하였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의 국법질서를 어지럽힌 자들을 다스리는데 프랑스가 웬참견이냐는 식이었고, 로즈제독과 벨로네 대리공사는 진상조사는 무슨 진상조사, 이 기회에 조선을 정벌하겠다는 식이었다. 프랑스야 그렇다 쳐도, 조선까지 막가는 상황이었으니 청국으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아편전쟁, 애로우호 사건, 태평천국의 난 등을 겪으면서 서구 열강에게 돌아가면서 곤욕을 치렀던 청국으로서는 조선이 뭘 믿고 저렇게 날뛰나, 앞으로가 어떠할지 불을 보듯 뻔하하다는 생각이었다. 흥선대원군이야 말로 세계 돌아가는 사정을 모른 채 기고만장하고 있다고 여겼다.


프랑스 측은 왜 약소한 조선을 두고 그렇게 조급하게 나왔을까. 당시는 나폴레옹 3세의 시대, 종교의 사명과 국가의 목적을 혼동할 정도로 천주교를 침략의 도구로 삼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직접 지시한 것이 아니지만, 로즈사령관과 벨로네 대리공사가 천주교도 박해를 구실로 이 참에 조선을 개항시키려 했다는 주장이 강하다.


[프랑스군의 강화도침략]


1866년 8월 10일(음력 9월 18일) 로즈 제독은 기함(旗艦) 프리모오게(Primauget) 등 3척의 군함을 거느리고 산동의 지부 항구를 출발하였다. 리델 신부와 조선인 신자 3명도 통역 겸 수로안내인으로 동승하였다. 이들이 경기도의 작약도 앞 바다에 도달한 것은 15일, 이중 암초에 걸려 손상을 입은 프리모오게 함을 제외한 나머지 2척이 강화도와 육지 사이의 염하(鹽河)를 거슬러 올라 동쪽으로 돌아 마침내 한강으로 진입하였다. 얼마 후 양천의 염창항, 양화진을 거쳐 서강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서울을 관찰한 프랑스 군함은 다음날 강을 내려가 기함과 합류하였고, 로즈 제독은 군함을 거느리고 지부로 돌아갔다. 충돌은 없이 순전히 정찰을 위한 1차 원정이었다.


▲ 병인양요 당시의 프랑스함대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강화부 중군 이일제가 파면당하고, 유수 이인섭이 추궁 당하였다. 조정이 내막도 잘 모르겠고, 마냥 불안하기만 하니 애꿎은 지방관과 장수에게 일단 죄를 뒤집어 씌우고 본 것이다. 프랑스 군함이 한강을 거슬러 오자 어영중군 이용희가 기마대와 각 부대 군인들을 동원하여 한강변을 경계하였다. 그러나 시꺼먼 연기를 내뿜고 굉음을 내며 다가오는 괴상한 배, 즉 이양선(異樣船)을 어쩌겠는가, 마냥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러나 천지신명이 도왔는지  프랑스 함대는 다시 물러갔다.


프랑스 함대가 다녀가자 민심은 흉흉해지고, 관리들은 동요하였다. 조정에서는 연안의 경비를 강화하랴, 각 읍에 성을 쌓고 배를 수리하랴 부산하였다. 전국의 많은 유자들이 서양세력을 배격해야 된다고 목소리를 드높였다. 사악한 서양 오랑캐와는 결코 교류해선 안된다, 요컨대 척사(斥邪)를 주장하는 상소가 쇄도했다. 그중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의 상소가 으뜸이었다. 서양과 통교하면 이삼년 안에 백성은 서양화 되고 사람은 짐승으로 전락할 것이니 단연코 배격해야 되는데, 방법은 인심을 하나로 묶는 것이라 하였다. 로즈가 들었으면 이 뭔 소리인가 했겠지만, 유림과 백성은 그의 주장을 절대 지지하였다.


이내 프랑스 함대가 조용히 물러가자 백성들은 환호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도 조정도 이들이 조만간 재침하리라 예측하고 열심히 대비하였다. 과연 프랑스 함대는 다시 조선에 출현하였다. 이번에는 공격이었다. 9월 5일(양력 10월 13일) 물치도(勿淄島) 앞바다에 7척의 프랑스 군함이 집결하였다. 물치도는 현재의 작약도로 영종도와 인천항 사이에 위치해 있다. 나무가 울창하여 서양인들은 우디랜드(Woody Island)라고도 불렸다. 프랑스군은 일본의 요코하마(橫濱)에 주둔한 병력까지 싣고 와 군사는 600명이나 되었다. 요코하마는 도쿄 만 서쪽의 작은 어촌이었으나, 1859년 이웃 가나가와가 외국인 거주와 교역을 위한 항구로 선정되면서 발전했고, 메이지 유신 이후 완전히 개방되면서 이후 외국 군함과 상선이 왕래하던 중요한 항구이다.


그러나 한강의 물길이 좋지 않다고 판단한 그들은 강화부를 점령하여 한강의 하류를 봉쇄하는 작전을 폈다. 서울로 이어지는 뱃길이 막히면 세곡 운반이 불가능해지고, 그러면 서울의 식량사정이 악화되어 조선이 결국 굴복하리라 판단하였다.


다음날 프랑스군은 강화도 갑곶진에 이르러 그곳을 점령하였다. 강화유수가 퇴거를 요구하자  "무슨 이유로 서양인 9명을 살해하였느냐? 이제 너희들도 죽음을 당할 것"이라 하였다. 프랑스군은 한강 입구를 봉쇄하였다. 다음날 아침 프랑스군은 강화부를 공격하여 간단히 점령하였다. 다음날 통진부도 습격하여 약탈과 방화를 하였다.


▲ 강화부를 행진하는 프랑스군


프랑스군이 강화부를 점령하자 조선 조정은 대경실색하였다. 조정은 서울의 방어책을 강구하면서 ‘기포연해순무사중군’이용희에게 2천 여 병력을 주어 출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통진부를 정찰했을 때 프랑스군은 이미 문수산성에서 철수한 뒤였다. 이용희는 강화부를 점령하고 있는 프랑스군에게 격문을 보내어 속히 물러가라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군의 응답은 선교사를 살해한 주모자를 엄히 징계하고, 속히 전권대신을 파견하여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목표는 통상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프랑스군은 연안을 정찰하거나 포격하면서 유유자적하였다. 문수산성을 정찰하고, 경기수영을 포격하는가 하면, 정족산성에 정찰대를 파견하여 전등사를 약탈하였다. 정부에서는 강화수비군의 군량을 늘리고 장병을 증모하였다. 다른 한편 오랑캐를 몰아내어 나라를 보존하자 하여 군민의 적개심을 고무하였다. 이용희는 천총(千摠, 정3품 무관직) 양헌수로 하여금 지방에서 모집한 호랑이 사냥꾼 약 500의 병력을 정족산성에 잠복시켰다.


조선인 천주교신자로부터 정보를 접한 로즈제독은 조선군을 얕잡아 보고 정족산성 안의 전등사를 약탈하기로 하였다.(10월 3일) 드디어 프랑스 해병 160명이 정족산성의 동문 쪽으로 올라 왔다. 그러나 미리 잠복해 있던 양헌수의 병력이 일제사격을 가하여 프랑스군 6명을 현장에서 즉사시키고, 30여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기습을 당한 프랑스군은 대경실색하여 줄행랑을 쳤다가, 갑곶진으로 가버렸다. 버리고 간 무기가 동문 앞에 즐비했다고 전한다. 조선 측 피해는 1명의 전사자와 3명의 부상자뿐이었다. 나폴레옹 3세의 막강한 프랑스군이 조선의 호랑이 사냥꾼에게 체면을 구긴 셈이었다.


▲ 정족산성 [한국관광공사]


프랑스군은 다음날 조용히 강화도를 철수하였다. 여러 사정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얼마 후 겨울이 닥칠 텐데, 조선군 병력은 늘어가고, 당장에 해결을 볼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냥 간 것이 아니었다. 로즈제독은 강화읍에 불을 지르게 한 뒤 외규장각에 소장된 의궤(儀軌) 등 귀중 도서와 무기, 금은괴 등을 약탈한 뒤 조선을 떠났다. 이로써 한강구 봉쇄가 풀렸다. 강화부는 약탈당했지만, 조선군은 오랑캐를 물리쳤다 하여 사기가 충천했고, 조정은 조정대로 겉으로는 흥분하였지만, 내심으로는 걱정이 태산같았다.


프랑스군의 내침 사건 이후 천주교도에 대한 조정의 태도는 더욱 강화되었다. ‘오랑캐가 양화진까지 침범한 것은 천주교도 때문이고, 우리의 강물이 이양선에 더러워진 것 역시 그들 때문이니 그들의 피로써 더러워진 것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 하였다. 한강변에 새로운 형장이 만들어 졌다.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이 와중에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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