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의 사랑은 알 수 없는 힘을 준다. [사진=pixabay]
나이가 든다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 줄고 챙겨야 할 일들은 많아진다는 것 같다. 그 중 하나가 약 먹기가 아닐까싶다. 하룻밤이라도 자고 오는 여행길이라도 되면 제일 신경 써서 챙겨야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나 내이 세대만 해도 건강을 위해 먹는 약보다는 치료를 위해 먹어야 하는 약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혹시 여행이라도 할라치면 아예 매끼 먹을 약을 분리해 넣을 수 있는 용기(容器)에 준비한다. 4.5일 정도 된다면 열 끼 분 1개로는 안 되어 두 개를 채우기도 한다. 먹는 약의 종류도 많아 내 경우엔 비타민 C까지 하면 한 번에 먹는 양이 열 알은 된다. 약을 잘 못 먹는 사람은 열 번을 먹어야 하는 것을 다행히 나는 한 줌을 통째로 입에 넣어 물 한 모금으로 해결하니 그것도 감사하다. 누구나가 다 그렇겠지만 사실 나도 약 먹는 것을 참 싫어했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큰 수술도 여러 번 받게 되고 보니 자연 약을 먹어야 하는 게 당연하게 되어버렸고 이젠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버렸다.
어릴 적엔 어디가 아프다고 하면 자연 한방 처방으로 쓴 약을 한 대접씩 마시게 했었다. 약은 입에 쓰고 또 써야 약이 된다고 생각하던 옛 어른들의 지론이 아니라도 약은 대개 쓰기 마련이었고 몸에 좋은 약이라도 여름 더위를 이기라고 해주는 익모초 같은 것은 유난히 더 썼다.
배가 아파 끙끙대고 있으면 할머니가 무슨 물을 한 대접 가져오시곤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것은 초가지붕에 물 한 바가지를 던져 지붕에서 흘러내린 물을 받은 것이었단다. 가뜩이나 비위가 약했던 나는 시큼털털한 맛의 그 물이 그런 것이었다는 걸 알고 헛 구토를 수없이 해댔지만 신기하게도 거기에 어떤 성분이 있어서였는지 여하튼 배앓이가 가라앉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 황토로 큰 배를 싸서 아궁이에 넣어 구워 주셨는데 그것을 숟가락으로 퍼먹던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구운 배를 먹고 나면 기침은 거짓말처럼 멎었다. 나는 아프지 않을 때도 그 맛이 생각나면 나오지도 않는 기침을 콜록콜록 대며 할머니 눈치를 살폈고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채신 할머니는 장날이 되면 배 하나를 사다 내 가짜 기침병을 고쳐주시곤 했다.
그런 할머니가 가신지도 30여년이 되어가지만 나는 지금도 할머니가 해 주시던 그때의 기침약 배 맛이 생각나곤 한다. 언젠가는 흙 대신 신문지로 싸서 전자레인지에 배를 구워 먹은 적도 있다. 하지만 어찌 할머니가 해 주시던 그 때의 그 맛이 나오기나 하겠는가.
또 하나 원기소의 추억을 잊을 수 없다. 원기소는 60-70년대에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소화효소제인데 고소한 맛의 중독성에 국민영양제의 자리를 오랫동안 누렸었다. 선반 위에 올려놓고 한 알씩만 꺼내주던 그걸 더 먹겠다고 의자를 놓고 올라가 몰래 훔쳐 먹다 걸려 혼 줄이 났던 추억 하나쯤은 그 시대를 살았던 세대들이라면 필히 갖고 있을 터였다. 약이되 서로 더 먹겠다고 했던 아이러니, 그 이상한 약이 회사부도로 없어지고 말았었는데 다시 생산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지만 그 역시 그 때 그 맛이 날지는 모르겠다.
내일은 아침 일찍 제주로 떠나야 한다. 교회 정책당회를 2박3일간 제주에서 한다. 나는 3일간 먹을 약을 챙겨 용기에 넣는다. 아침에 먹는 약과 저녁에 먹는 약이 다르니 그 또한 신경을 써야 한다. 조금 피곤하면 금방 입술이 부르트는 나는 거기에 대비하는 약도 챙긴다. 허리가 안 좋아 파스도 챙긴다. 다른 것에 앞서서 우선적으로 챙겨야 하는 약은 어쩌면 이젠 내 살아있는 동안 같이 가야할 반려인 셈이다.
아프다는 소문이 다 나서 나는 늘 아픈 사람이 되어버렸다. 해서 여기저기 나를 아는 사람들은 좋다는 약들을 보내오곤 한다. 보내면서 아내가 먹으면 좋을 영양제도 같이 보내주는데 아내는 참 약 먹기를 싫어한다. 먹으면 좋다는데도 나나 잘 먹으란다. 자기는 안 먹어도 건강하다나? 건강도 타고 나는 것이라지만 좋은 약이 많이 나와서 죽을 수밖에 없던 사람도 이젠 거뜬히 나아 남은 삶을 잘 살아갈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러고 보면 나도 분명 문명의 최대 혜택이랄 수 있는 그 약의 보은을 입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약 안 먹고도 건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 몸에 좋다는 것은 무엇이건 먹으려 드는 현대인들의 생각도 조금은 변했으면 싶다. ‘약 좋다고 남용 말고 약 모르고 오용 말자’라고 했던가. 언젠가 약국마다 붙어있던 표어 같은데 꼭 나보고 하는 소리 같다. 그러면서도 또 저녁에 먹을 약을 챙겨 입에 넣는다. 그와 함께 사는 삶이다.
요즘 며칠 무리를 해서인지 감기 기운도 몸살 기운도 있는 것 같은데 제주에서 돌아오면 옛날 할머니가 해주셨던 것처럼은 못 해도 전자레인지에라도 배를 구워 숟가락으로 파먹는 추억놀이라도 해 봐야겠다. 그럼 또 모르잖는가. 맛있는 그 때의 맛도 보고 그때처럼 감기 기운도 몸살기도 다 달아나 버릴지. 그 배 맛을 생각하다 보니 가신 지 오래인데도 할머니가 ‘원현아!’ 부르시며 문을 열고 들어오실 것만 같다.
『한국수필』로 수필,『조선문학』에 문학평론 등단.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사)한국수필가협회 사무처장. 월간 한국수필 주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조연현문학상·신곡문학상대상 수상,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그냥》등 16권,《창작과 비평의 수필쓰기》등 2권의 문학평론집, 중학교《국어1》《도덕2》,고등학교《국어》《문학》 등에 작품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