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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2-06 19:3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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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볼셰비키 정권은 공산혁명의 정당성 확보하기 위해 라스푸틴에 대해 부풀려진 소문 이용
-라스푸틴이 차르 황실에 미친 영향력을 이해하려면 니콜라이2세의 알렉산드라 황후부터 알아야
–니콜라이2세는 ‘사랑’으로 결혼… 빅토리아 여왕의 딸들처럼 국제관계 고려한 정략결혼 아니었다


‘사악한, 변태적’ 수도승, 예언자 라스푸틴은 정치 음모의 희생자였다. 제정 러시아 황실 가문 내부의 권력 다툼과 차르(러시아 황제) 반대 혁명 세력은 유언비어를 유포해 라스푸틴을 괴물로 만들었다.

 

라스푸틴이 유스포프 공작 일당에 의해 암살돼 네바 강에 던져졌던 날자가 1916년 당시의 러시아 력(율리우스 력) ‪12월 17일‬ (그레고리안 력 ‪12월30일‬)이었다(상세한 라스푸틴 암살 과정에 대해 별도 게시할 예정).

 

로마노프 왕조를 붕괴시킨 2월혁명은 율리우스 력으로 1917년 2월 23일이었다. 라스푸틴이 암살된 후 불과 69일만에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왕자와 공주들.


2월혁명 후 소비에트와 두마(국회)를 권력 기반으로 하는 임시정부는 로마노프 왕조 타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라스푸틴 문제를조사하였으나 발표할 수 없었다. 그 후 발생한 10월혁명 후의 볼셰비키 정권은 레닌이 이끌었던 공산혁명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라스푸틴에 대해 부풀려진 소문들을 이용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라스푸틴에 대한 진실은 오랜 기간 숨겨져 있었다.

 

차르 적폐 ‘조사위원회’의 공식 조사 보고서 중 12개의 부분은 1927년에 공포되었다. 그러나 13조사특별부서가 조사한 부분인 13번 째 부분은 황실과 라스푸틴을 과녁으로 하는 ‘어두운 힘’을 밝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1964년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1964년 조사위원회 최고 책임자의 요약보고서가 소비에트저널에 발표되었다. 라드진스키는 1980년에 조사 자료실의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자료를 샅샅이 훑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13 조사부의 조사 자료는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1995년 런던 소더비즈 경매에 올려진 서류뭉치가 바로 제정 러시아에 대한 적폐조사위원회 13 조사부의 조사자료 원본이었다.

 

세계적인 음악가 로스트로포비치는 소련 억압체제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소리 높이 외치며 저항을 멈추지 않았던, 양심적 예술가였다. 그는 소련의 탄압을 받고 모든 것을 버리고 해외로 망명했다. 그가 라스푸틴에 대한 서류 진본이 경매에 나왔다는 소리를 전해듣고는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해 낙찰을 받았던 것이다. 얼마나 높은 가격을 제시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소더비즈에서는 그가 낙찰받았다는 점만 확인해 주었다.

 

라스푸틴의 역할과 차르 황실에서 미친 영향력을 이해하기 위해 라스푸틴을 총애했다는 니콜라이 2세의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1908년)에 대해 먼저 이야기한다.

 

니콜라이 2세의 부인이 된 12세의 알렉산드라(표도로브나)와 니콜라이는 알렉산드라의 언니 엘리자베스와 니콜라이의 삼촌인 러시아 대공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Sergej Alexandrowitsch)와의 결혼식이 있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처음 만났다. 언니와 세르게이의 결혼은 정략 결혼이 아닌 사랑의 결혼이었다.

 

니콜라이는 만나자마자 알렉산드라를 좋아했다. 어머니를 일찍 잃고, 종교에 깊이 빠져 있었던 알렉산드라는 수줍어하고 조용한 내성적 성품을 갖고 있었다. 니콜라이는 이렇게 잘난 척하지 않으며 나서지 않는 가정적 성품의 여인을 선호했다. 니콜라이의 모친인 마리야 표도로브나(Fjodorowna )가 어릴 때부터 그러한 가정교육을 시켰던 것이다. 그녀의 사교적이지 못한 성품은 나중에 로마노프 왕가로 시집간 후에는 큰 문제가 되었지만 니콜라이에게 매력적으로 보였다.

 

니콜라이도 역시 영국인 가정교사로부터 러시아에서는 특별한 영국식 신사 교육을 받았다. 그는 조용하고 침착하며 책임감이 강한 신사로 자라났다. 물론 유약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러한 성품이 제왕이 갖춰야 하는 성품인가는 다른 문제이다.

 

니콜라이의 부친 알레산드르 3세와 모친인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아들이 알렉산드라와 결혼하는 것을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라의 모친이 덴마크의 공주 태생이다. 독일 슈레스비히-홀슈타인이 덴마크에 대항해 치렀던 3년간의 전쟁(1848 – 1851)으로 인한 반 독일 분위기에서 성장했던, 알렉산드라의 시어머니가 될 마리야는 독일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헤센 대공의 딸은 왕국의 공주보다는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신분상의 이유에서도 그 결혼을 탐탁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 눈먼 아들은 알렉산드라에 함빡 빠져있어서 그녀와의 결혼을 끝까지 고집했다. 종교 문제도 걸림돌이었다. 그녀는 헤센 공국에서 루터 신교를 믿고 있었고 또 아주 신앙심이 깊었다. 그래서 러시아로 시집가지 않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니콜라이의 그녀에 대한 사랑은 종교의 차이도 넘어설 수 있게 했다. 니콜라이는 그녀에게 러시아 정교로 개종을 재촉하지 않았고, 언니가 러시아 대공과 결혼했지만, 두 종교를 함께 가지며 신앙 생활을 할 수도 있었기에 종교 문제는 별 어려움이 없게 되었다.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는 결국 사랑한다는 이유로 결혼에 골인하였다.

 

성공한 제왕은 사랑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관계를 고려해 결혼해야 한다는 사례가 대영제국 빅토리아 여왕의 경우다. 빅토리아 여왕은 알렉산드라의 외할머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딸들을 모두 정략 결혼을 시켰다.

 

음모와 술수가 기다리는, 부패한 라마노프 왕가에 시집온 독일 출신의 순진무구한 황후가 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어떤 운명에 처할지는 결혼 당시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덧붙이는 글]
['제3의 길' 轉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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