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랄산맥 아래서 발견된 '종말의 요새']
러시아가 우랄산맥 깊숙한 곳에서 냉전시대 핵 지휘시설을 대대적으로 현대화해 온 사실이 드러났다. 핵전쟁으로 모스크바의 지휘체계가 파괴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보복 능력을 유지하기 위한 시설로 알려진 곳이다. 그런데 거의 동시에 러시아는 네슬레·오샹·메트로 등 유럽 기업의 러시아 자산에 대한 경영권을 잇달아 빼앗아 임시관리 체제로 넘겼다. 핵전쟁 이후까지 대비하는 지하요새와 외국기업을 압박 카드로 사용하는 경제정책은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이지만, 지금 러시아가 어디까지 극단적인 상황을 상정하고 움직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두 장면이다.

덴마크 탐사보도 매체 단워치(Danwatch)는 지난 9월 26일, 영국 선데이타임스, 러시아 독립 탐사조직 도시에서센터와 함께 러시아 군의 공공조달 문서 200만 건 이상을 분석한 결과를 공개했다. 여기서 단워치(Danwatch)는 “러시아가 냉전시대에 건설했던 극비 핵 지휘시설을 대대적으로 확장·현대화해 온 사실이 드러났다.”면서 “러시아 국방부가 2018년부터 스베르들롭스크주 코스빈스키 카멘 산속에 있는 '1335호 시설(Object 1335)'에 수천 건의 물자를 집중적으로 투입해 온 사실이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단워치(Danwatch)는 이어 “이 극비 핵시설은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약 1300㎞ 떨어진 우랄산맥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으며, 암호명은 '그로트(Grot·동굴)'”라면서 “냉전기부터 러시아 전략핵전력의 핵심 지휘시설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왔지만 내부 구조와 최근 공사 규모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이례적”이라고 짚었다.
[강철 2만2000t·시멘트 5만6500t…단순 보수가 아니다]
그런데 규모가 놀랍다. 조사팀이 확인한 조달 내역에는 최소 2만 2000t의 강철과 5만 6500t 이상의 시멘트, 600㎞가 넘는 전력 케이블 등이 포함됐다. 여기에 대규모 환기설비와 변전시설, 암반 굴착 장비가 투입됐다. 특히 방사성 물질과 화학·생물학 작용제를 걸러낼 수 있는 공기정화 장비와 방폭·내진 설비도 포함됐다. 단순히 오래된 군사시설을 수리하는 수준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의미다.
위성사진에서도 산에서 대규모로 암석을 파낸 흔적과 새로운 진입로가 확인됐다. 조사팀은 러시아가 산 내부를 추가로 굴착하면서 기존 시설을 확장하고 방호 능력을 강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화강암 300m 아래…핵공격 뒤에도 살아남는다]
1335호 시설이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이곳이 일반적인 지휘벙커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설은 300m가 넘는 화강암 아래에 자리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외부에서 강력한 공격을 받더라도 내부 지휘체계가 살아남도록 만들어진 구조다. 최근 공개된 자료에는 최소 24개의 지하공간이 언급되고, 출입구 사이 거리만 약 2.5㎞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목적은 명확하다. 디인사이더(The Insider)에 따르면, 러시아의 정치·군사지휘부가 공격으로 무력화되고 일반 통신망까지 파괴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전략핵무기에 명령을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냉전시대 소련이 구축했던 핵 지휘체계 '페리미터(Perimeter)'가 등장한다. 서방에서는 흔히 'Dead Hand', 즉 '죽음의 손'이라고 불려왔다.
['죽음의 손'이 부활했나?]
다만 여기서는 한 가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일부 보도는 이번 공사를 두고 러시아가 '죽음의 손'을 다시 가동했다고 평가했다. 스탠퍼드대 핵전문가 제프리 루이스도 공개된 자료를 토대로 러시아가 이 체계를 다시 적극적으로 운용하고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러시아 전략핵전력 전문가 파벨 포드비그는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디인사이더에 “재가동됐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애초에 비활성화된 적이 없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더 중요한 것은 페리미터가 흔히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인간의 판단 없이 자동으로 핵미사일을 발사하는 '종말 기계'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핵심 기능은 최고 지휘체계와 일반 통신망이 파괴됐을 경우 살아남은 핵전력에 명령을 전달하는 비상 지휘·통신체계에 가깝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푸틴은 왜 지금 이 시설을 강화했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러시아는 왜 이런 시설에 막대한 자원을 쏟아붓고 있는가? 현대화 작업 자체는 2018년에 시작됐다. 따라서 이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밀린 푸틴이 갑자기 겁에 질려 만든 피난처라고 설명하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그러나 공사가 우크라이나 전쟁 기간에도 계속됐고, 러시아가 핵전력 전반의 현대화와 핵 억지력 강조를 병행해 왔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적어도 크렘린이 러시아의 핵 지휘부가 공격받고 기존 통신망까지 파괴되는 극단적인 상황을 군사계획에서 계속 현실적인 대비 대상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최근 러시아가 경제 분야에서 보여주는 행동과 묘하게 겹친다.
[이번에는 유럽 기업…"겁먹게 놔두라"]
29일 로이터가 전한 러시아 정부 고위 관계자의 한마디는 지금 모스크바의 대유럽 접근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Let them be scared.” “겁먹게 놔두라.”
러시아는 9월 들어 스위스 식품기업 네슬레, 독일 도매기업 메트로 AG, 프랑스 유통기업 오샹의 러시아 자산을 잇달아 임시관리 체제로 넘겼다. 결과적으로 기존 외국 주주들은 해당 러시아 사업체를 직접 경영할 권리를 잃게 됐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러시아 정부 관계자가 이 조치의 정치적 목적을 사실상 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로이터에 “비대칭 조치를 취할 때가 왔다”며 “유럽이 제재를 결정할 때 러시아의 대응을 생각하게 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탈리아 우니크레디트나 오스트리아 라이파이젠은행이 다음 대상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바로 “겁먹게 놔두라”고 답했다.
[전쟁 이후 135개 외국계 기업에 손댔다]
이번 조치는 고립된 사건도 아니다. 로이터가 인용한 타스 집계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가 임시관리 조치를 적용한 외국계 연관 기업은 135곳에 이른다. 다논과 칼스버그 등 유럽계 기업들이 대표적이다. 유럽기업협회 회원 가운데 러시아에서 사업하는 기업 수도 1년 사이 약 400개에서 330개로 감소했다.
흥미로운 부분은 미국 기업보다 유럽 기업들이 최근 조치의 중심에 있다는 점이다. 로이터는 “대형 미국 기업들은 아직 같은 방식의 조치를 받지 않았다”고 전했다. 러시아 정부는 EU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다. 결국 러시아는 외국기업의 자산과 경영권 자체를 서방의 제재에 대응하는 국가적 압박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현대차도 결국 러시아 공장을 되찾지 못했다]
한국 기업의 사례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현대차는 러시아 정부의 임시관리 명령으로 공장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전쟁과 제재·부품조달 문제로 생산이 어려워진 뒤 러시아 사업을 매각했다. 현대차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을 포함한 러시아 사업을 현지 업체에 매각하면서 일정 기간 되살 수 있는 바이백 옵션을 확보했지만, 이 옵션은 2026년 1월 31일 행사되지 않은 채 만료됐다.
현대차 감사보고서도 이를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현재 해당 공장에서는 AGR이 '솔라리스' 브랜드로 차량을 생산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차 사례는 '러시아의 기업자산 몰수' 사례라기보다 전쟁 이후 글로벌 기업이 러시아 시장에서 얼마나 큰 비용을 치르며 철수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쓰는 것이 정확하다.
[Why Times Insight | 푸틴의 러시아는 왜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나?]
1335호 시설과 유럽 기업 자산 통제는 성격이 전혀 다른 사건이다. 하나는 핵전쟁에 대비하는 군사시설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 보복조치다. 그런데 두 사건을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다. '최악의 상황을 전제로 움직이는 러시아'다.
우랄산맥에서는 국가 지휘체계가 파괴된 뒤에도 핵 보복 명령을 전달할 수 있도록 지하시설을 강화한다. 지상에서는 서방의 추가 제재에 대응하기 위해 외국기업의 경영권과 자산을 압박 수단으로 사용한다. 러시아 정부 관계자는 이제 그런 의도조차 숨기지 않고 “겁먹게 놔두라”고 말한다.
이것을 곧바로 푸틴 개인의 공포나 정신상태의 증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러시아의 국가운영 방식이 전쟁 장기화 속에서 더 강한 군사적 대비와 경제적 강압 수단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외국기업의 재산권을 국가 간 충돌의 압박 카드로 사용하는 방식에는 상당한 장기적 비용이 따른다. 지금은 유럽을 압박할 수 있지만, 전쟁이 끝난 뒤 외국 자본에 다시 러시아로 돌아오라고 할 때 투자자들은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다음 충돌이 일어나면 우리 자산도 정치적 협상 카드가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1335호 시설에서 더 중요한 것은 '푸틴의 비밀 피난처'라는 자극적인 이미지가 아니다. 러시아가 수년 동안 막대한 자원을 들여 국가 지휘부가 파괴되는 최악의 핵전쟁 시나리오에서도 살아남을 체계를 강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겁먹게 놔두라”는 말에서 더 중요한 것도 네슬레나 오샹 한두 기업의 운명이 아니다. 군사적으로는 화강암 300m 아래로 들어가고, 경제적으로는 외국기업의 재산권까지 지정학적 압박수단으로 끌어들이는 러시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푸틴 개인의 심리를 진단할 단서라기보다, 장기전 속 러시아 국가체제가 어디까지 극단적인 시나리오를 상정하며 움직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일 수 있다.

-중국 푸단대학교 한국연구원 객좌교수
-전 EDUIN News 대표
-전 OUR NEWS 대표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기획팀장
-전 대통령실 홍보기획비서관
-사단법인 한국가정상담연구소 이사장
-저서: 북한급변사태와 한반도통일, 2012 다시우파다, 선거마케팅, 한국의 정치광고, 국회의원 선거매뉴얼 등 50여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