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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3-01 12: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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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대구에서 일어난 2.28의거는 정부수립 이후 민중이 불의에 저항했던 역사적 사건의 시작
-마산 앞바다에서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오른 것이 결정적 계기
-민주화 과정에서 북한•공산주의 추종자들이 진보의 이름으로 한국사회 어지럽히는 부작용도 발생


▲ 2.28의거는 불의에 저항했던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의 출발점이다.


2.28대구의거가 일어난 지 60년이 다 되어간다. 2.28의거의 의미는 1960년 대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정부수립 이후 불의에 저항했던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의 출발점이다. 또한 2.28의거는 부마항쟁과 6.10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2.28의거는 우리나라 정부 수립 후 최초로 민중들이 독재에 저항했던 사건이다. 물론 2.28의거 이전에도 규모는 작았지만 불의에 저항했던 사건이 있었다. 1956년 5월 15일 정•부통령 선거 당시의 사건이 그것이다. 이 선거에서 부통령에 야당인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당선될 것이 확실시되자 여당이던 자유당은 선거를 무효화하려고 했다. 마지막으로 개표가 진행되고 있던 대구의 투표함을 불태워버리려고 한 것이다. 정치깡패들이 그 수단으로 동원됐다.


대구시민들은 이러한 정권의 음모에 온몸으로 맞서 싸웠다. 저녁에는 횃불을 들고 투표함을 지켰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대구의 개표를 속개하라고 발표한다. 대구시민들이 투표함을 지켜낸 것이다. 바로 1956년의 이 사건이 2.28의거의 뿌리라고 생각한다. 불의에 저항했던 대구시민들의 정신이 계속 발전해온 것이다.


1956년 선거를 통해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장면 등 정•부통령이 서로 다른 정당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우리 국민이 권력의 집중을 막고 독재를 방지하고자 선택한 결과였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부통령 자리마저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더욱더 강하게 야당을 탄압했다. 야당이 선거유세를 못하도록 온갖 방법을 총동원하였다.


특히 2월 28일은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대구의 고등학생들을 등교시키라고 지시하였다. 그날 수성천변에선 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선거연설회가 계획되어 있었다. 이에 대구 지역 학생들이 장면 박사의 유세장에 몰려들어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을 우려한 당시 자유당 정부는 이를 방지하고자 대구시내 공립 고등학교에 일요일 등교를 지시했다. 일부 학교는 3월에 있을 중간고사를 앞당겨 친다는 핑계를 댔고, 일부 학교는 단체 영화관람이나 심지어 토끼 사냥을 간다는 핑계로 등교를 종용했다.


그러나 당시 대구의 고등학생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2.28의거 하루 전인 2월 27일 오후 대구 동인동 이대우 경북고등학교 학생부 위원장 집에 경북고등학교, 대구고등학교,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등 학생 8명이 모였다. 이들은 부당한 일요일 등교 지시에 항의하기 위해 시위를 조직했고, ‘백만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는 결의문도 작성했다.


2월 28일 오후 1시 학생 800여 명이 대구 반월당을 거쳐 경상북도청으로 가는 과정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며 시위대의 규모가 계속 커졌다. 정부와 여당에 보내는 경고였다. 하지만 정부 여당은 이를 철저히 무시하고 탄압하였다. 오림근 경상북도 지사와 이강학 치안국장은 학생들이 북한에 이용당하고 있다며 왜곡하였다.


그러나 대다수 시민들은 구타 당하는 학생들을 보고 경찰에게 달려들어 뜯어말리고 박수치는 등 격려했다. 8개 학교 총 1,2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했고, 그 중 120여 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사람 중에는 학생들을 도와주던 교사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경찰은 시민들의 따가운 눈초리 속에 결국 처벌을 완화해야 했고, 주동자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학생은 석방하였다. 하지만 이후 언론이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전국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민심이 등을 돌렸음에도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침내 부정선거를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이때가 1960년 3월 15일이었다. 당일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마산과 광주에서 있었다. 3.15의거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인의 장막에 가려서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3.15의거는 4·19의거를 촉발시키기에 이르렀다. 가장 결정적인 것이 마산 앞바다에서 4월 11일 아침 당시 마산상업고등학교의 학생이었던 김주열의 시신이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오른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3일 서울대병원으로 가서 시위를 하다가 부상당한 학생들을 위문하면서 “불의를 보고도 일어나지 않은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라는 말을 남긴 뒤 26일 대통령직을 하야한다.


4.19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로 2.28의거를 통해 대구에서 불의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저항이 마산과 광주를 거쳐 서울까지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국민의 힘으로 대통령을 물러나게 하는 위대한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우리 국민이 왕조시대의 신민에서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28의거는 처음부터 밖으로 나가서 시위를 한 것이 아니다. 선거라는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자신들의 뜻을 피력한 이후에도 정부가 민심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자 직접행동으로 나선 것이다. 이러한 2.28의거의 모습은 부마민주항쟁와 6.10민주항쟁에도 영향을 주었다.


1978년 12월 12일 10대 총선에서 여당인 공화당보다 야당인 신민당이 1.1%더 많이 득표한다. 이는 당시 국민들이 1972년에 선포된 유신헌법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정권은 이를 무시했다. 그러자 다음해인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시민들이 직접 행동에 나섰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경호실장 차지철의 왜곡보고에 의지해 강경진압을 생각한다. 중앙정부부장 김재규가 말한 대화 건의는 무시하였다. 결국 박정희는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당한다.


1985년 총선에서는 5.18의 피로 집권한 5공정권을 규탄하면서 대통령 직선제를 내세웠던 신한민주당이 제1야당이 되는 돌풍을 일으켰다. 신한민주당은 창당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5공정권을 국민이 지지하지 않는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정권은 역시 이를 무시하였다. 그러자 2년 후인 1987년 6월 전국에서 정권에 대한 저항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6월 29일 군부정권은 대통령직선제를 수용한다. 우리 국민이 선거를 통해 심판을 하고 이것을 무시하면 직접행동으로 나서서 끝에 가서는 승리를 이끌어내는 것이 가능했던 전통은 2.28의거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2.28의거는 단순히 대구만의 일이 아니다. 그 뿌리는 1956년 정•부통령선거 방해 저지 사건에 있으며 2.28의 정신은 3.15의거, 4.19의거, 부마민주항쟁, 5.18광주민중항쟁, 6.10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그러면서 우리의 민주주의는 계속 발전할 수 있었다. 다만 그 발전과정에서 의도하지 못한 독버섯들이 많이 자라난 것은 큰 과오라고 생각한다.


북한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진보라는 이름으로 한국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2.28의거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삼균주의자 조소앙 선생과 같은 진보주의자가 우리나라에 좀더 많아지고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2.28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덧붙이는 글]
['제3의 길' 轉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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