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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2-12 03: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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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들어 한국인들은 우리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관심 갖기 시작해
-80년대까지 북한체제와의 극한 갈등, 독재정권과 민주화세력의 투쟁이 우리의 관심을 독점
-복원된 한양도성에서 기괴함과 고귀함, 천박함이 공존하는 사이버펑크 도시 ‘서울’을  보다

대한민국, 혹은 남한은 1990년대에 십대를 보낸 내가 그 당시에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멀리 왔다. 실은 그 당시를 살아온 누구라도 이 지점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이미 겪으면서도 그게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어떤 조류’가 1990년대에 시작됐다는 것도 사실이다. 홍세화 선생을 비평한, 발표되지 않은 원고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1995년의 베스트셀러였다. [창작과비평]사가 1995년 3월에 출간한 이 책은 십년 동안 60쇄를 찍은 스테디셀러였고, 2006년 11월엔 개정판도 출간되었다. 당시의 베스트셀러 목록만을 지금 와서 훑어본다면, 이 책은 같은 해 7월에 [개마고원] 출판사에서 나온 강준만의 <김대중 죽이기>와 함께 묶일 것이다. <김대중 죽이기>는 강준만이라는 막강한 자유주의 논객의 탄생을 알리는 책이었고,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한 진보 논객의 도래를 예비하는 서곡이었다. 홍세화는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강준만의 관점에 영향을 받았고, 그의 조선일보 비판과 실명비판을 지지했으며, 불과 4년이 지나기 전에 강준만의 우군이자 안티조선 운동의 일원으로 기록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분위기를 돌이킨다면 그의 첫 책의 성공은 정치평론과는 다른 영역에 있었다.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강준만의 <김대중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같은 해 8월에 나온 에리카김의 <나는 언제나 한국인>과 함께 묶일 만한 책이었다. 십대 소년이던 나는 매주말 신문 문화면에 실리는 베스트셀러 동정을 살펴보았는데, 한참 동안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나는 언제나 한국인>과 함께 비소설 분야 최상위권에 랭크된 것을 본 기억이 난다. <김대중 죽이기>도 베스트셀러에 랭크되어 있었겠지만 아마도 정치/사회 도서로 분류되어 계열이 달랐을 것이다. 당시 나는 세 책 모두 읽을 기회가 없었다.

 

1995년은 자서전 류의 책이 강세를 보인 시기였다. 정계에 입문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았던 이명박의 <신화는 없다>가 출간된 게 그해 1월이었고, 아직 변호사였던 오세훈의 <가끔은 변호사도 울고 싶다>가 출간된 게 그해 10월이었다. <신화는 없다>는 원래는 이명박이 민자당 서울시장 후보에 도전하기 위해 홍보용으로 낸 책이었는데, 이명박은 당내 경선에서 정원식에게 패배한 반면 그의 입지전적인 자서전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나는 언제나 한국인>의 주인공인 에리카김은 8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영어 한마디 못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27세에 당당히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자신의 성공담을 책에 담았다. 그리고 이명박은 에리카김의 책 출판기념회에 참석할 만큼 그녀와 친분이 있었다. 강준만과 홍세화가 안티조선 운동의 서막을 열어젖히던 1999년에 에리카김의 동생인 김경준은 BBK란 이름의 회사를 설립했고 이 회사는 주가조작으로 수백억 원의 차익을 거둔다. 훗날 귀국한 김경준이 “BBK의 실소유주는 이명박”이라고 주장했지만 검찰조사 결과 김경준과 에리카김만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모두가 아는 그대로다.

 

훗날 에리카김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되리란 것은 당시의 독자들로선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에리카김의 자서전이 수용되는 방식은 당시로서는 이명박의 것보다는 홍세화의 것과 흡사했을 것이다. 에리카김의 자서전은 이명박의 것과 비슷한 종류의 성공담이었고, 홍세화의 책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성공담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에세이는 어떤 한국인이 다른 사회에 나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내용을 담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런 종류의 얘기는 오늘날에도 그럭저럭 상품성이 있지만, 90년대의 사람들에겐 더욱더 초미의 관심사였다.

 

1990년대 들어 한국인들은 갑자기 세계 속에서 우리가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외부적으론 서로의 멸망을 바라는 북한체제와의 극한의 갈등관계, 내부적으로는 독재정권과 민주화세력의 투쟁 정도 외에는 별로 시선이 가 닿지 않았을 것이다. 198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한국사회는 민주화와 경제발전의 성과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몇 년의 시차를 두고 ‘세계 속의 한국’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욕망은 출판계에 장르를 가리지 않고 투영되었던 것 같다. 정조의 개혁이 쉼없이 추구되었다면 조선왕조의 말로가 달랐을 거라는 소망을 품고 있는 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이 베스트셀러가 된 정황과,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한 정황이 비슷할 수 있다는 얘기다. 유홍준과 이인화의 책이 출간된 것은 1993년의 일이었다. 다음해엔 훗날 유재순의 저서에 대한 표절시비에 휘말리는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가 출간된다.

 

KBS 최초의 여성 특파원으로서 일본에 건너갔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 사회에 독설을 퍼부은 전여옥의 책은, 당찬 여성의 성공기라는 점에서 에리카김의 그것과 이미지가 포개졌다. 그리고 그 책은 한편으론 한국 사회의 잣대로 일본 사회를 가열차게 비판했다는 점에서 ‘물구나무선 홍세화’에 해당했다. 전여옥은 1995년에도 <일본은 없다 2>를 내며 인기몰이를 했다. 1990년대에 한국•한국사회•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고민을 던지는 에세이를 썼던 저자들이 모두 훗날 정치인이 되거나 적어도 정치적으로 논의되는 인물이 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참여정부 시절 문화재청장을 역임하게 되는 유홍준은 홍세화의 두 번째 책인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의 추천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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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된 반도라는 ‘섬’을 간신히 벗어나 세계 속의 한국을 인지하고 싶어진 그 시점부터 이십여 년, 한국은 이제야 세계인들 사이에서 중국이나 일본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세워나가고 있다. 한양도성은 그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1990년대의 내 관념으로 봤을 때, 한양도성은 ‘일제가 부셔버린 우리의 전통’이었다. 한국인들은 그것이 다시 세워질 수 있으리란 기대를 하지 않았고, 과속 산업화로 인한 소실조차 일제의 탓으로 돌리며 잘려버린 전통을 회고하기만 했다. 나 역시 수원 성곽처럼 보존되어 있지 않은 한양도성의 부재를 아쉬워하기만 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와 한국은 그것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역사성을 실질적으로 살피기 시작했던 것이다. 터를 파보니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산을 중심으로 세워진 한양도성의 상당 부분은 일제 침탈과 근대 산업화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었다. 산에 있는 성을 허물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남은 구간들의 일부는 복원되었다. 당연히 모두 복원될 수는 없다. 그러면 서울시내 교통과 부동산이 마비된다. 그러나 이 ‘잘려진 전통’과 ‘복원된 전통’이 공존하는 현실은 서울을 한층 더 운치있는 도시로 만들었다. 서울은 전통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울은 전통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소실된 한 성문에 서울시가 ‘보이지 않는 문’이란 이름의 공공미술품을 설치한 것은, 지나치게 감동적이다.


서울은 어떤 의미에서는 도쿄나 홍콩 이상의 사이버펑크 도시가 되었다. 기괴함과 고귀함과 천박함이 공존하는 곳이 되었다. 비록 거기에 살고 있는 우리가 그 지점에 질릴지라도, 이 지점에서의 미학적 성취는 분명히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그걸 좀 더 제대로 깨우치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제3의 길' 轉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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