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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2-06 10: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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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마음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어떤 그림일까?


▲ 1962년 크리스마스씰 `한국인의 마음`


한국인의 마음은 미세한 구석까지 세세한 감각으로 그려내는 사실주의 그림도 아니고 빛과 그림자의 강력한 조화를 이루어내는 인상파의 그림도 아니다. 한국인의 마음은 형체를 알수 있을 듯 말 듯한 반추상화이다.

한국인은 약속을 세세게 하지 않고도 가부간의 분명하게 경계를 긋지 않아도 불편없이 살아갈 수있다.

시간 약속을 하더래도 3시경에 서울역 앞에서 만나자는 식이다.

3시면 확실히 3시이어야 하고 3시10분이면 3시 10분에 만나자고 확실히 약속하지 않는다.

서울역 앞도 그렇다. 그 넓은 서울역 앞의 어디서 만나자는 구체적인 장소 지정이 없다.

우리의 심성은 다분히 대략적이며 또한 이에 익숙해 있다.

술집에 가서 주문을 할 때도 ‘맥주 서 너병 가져오고 안주는 아무거나 가져와라’라는 식으로 주문한다. 맥주를 세병 가져오고 네병 가져오는 것의 판단은 웨이터의 몫이다.

손님 대접을하고자 ‘어떤 종류의 음식을 좋아하십니까?’ 하고 물으면 ‘저는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하는 대답을 십중 팔구 듣게 된다.


쓸데없는 질문을 하고 하나마나한 대답을 한격이다.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고 받는 한국인의 행태가 잘 나타나 있다. 대접을 받는 입장에서는 얻어 먹는 처지이니 겸손되히 아무것이나 먹겠다는 의도이고 질문하는 사람은 기왕 대접하는 것이니 최대한의 봉사를 하겠다는 아름다운 마음이 녹아 있다. 반면 매사에 확실하지 않고 두리 뭉실하게 처리하는 우리들의 초상도 잘 반영되어 있다.


오래 전 마이클 페이라는 18세 미국 소년이 싱가포르에서 차에 페인트칠을 하다 처벌을 받게된 일이 있었다. 페이군에게 내려진 처벌은 笞刑 6대. 대나무로된 회초리로 볼기짝을 까고 공개리에 처벌되는 것이다. 이러한 싱가포르의 방침에 미국의 대통령을 비롯하여 세계의 여론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의 언론들이 발 벗고 나섰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야만적인 태형이냐는 것이다.

뉴욕 타임즈 같은 신문은 싱가포르 대사관에 항의 전화 운동을 벌이자면서 친절하게 전화 번호까지 가르쳐주고 있다. 우리는 동남아에서 가장 맑은 선진국가로 싱가포르를 꼽는데 아무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싱가포르를, 특히 적법한 법집행을 놓고 ‘인류에 대한 범죄’ 운운하면서 야만적인 독재국가로 비난하는 것을 보면 아연하지 않을 수 없다.

페이군의 행위가 10일동안 차에 페인트를 칠하고 계란을 던졌음을 감안하면 다분히 의도적이고 악의에 찬 행동이었다. 이런 행위를 처벌하는데 미국의 대통령까지 나서는 것은 다분히 미국 우월주의와 ‘감히 미국인을 처벌하느냐’하는 방자함이 깔려있었다.

로마에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이야기는 우리나라 초등학생도 들어서 알고 있다. 미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페이군을 무죄 석방하라는 이야기는 일종의 국가 폭력이다.


실제로, 어떤 나라건 미국이 압력을 행사하면 이를 거스릴 수 있는 나라는 몇나라 되지 않는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회초리를 6대에서 4대로 감형해주기는 했으나 태형을 강행했다.

싱가포르 법무상은 ‘지구상의 모든 나라는 각각 처해있는 문화권이 다르며 여기에 맞는 법 구조와 법집행을 하고 있다. 따라서 남의 나라 법이 자국의 그것과 다르다해서 무시해서도 안되고 또한 간여 해서도 안된다’ 고 하고 있다. 또한 태형의 야만성에 대해서는 사형과 같은 더욱 야만적인 처벌도 존재하고 있으며, 싱가포르의 이같은 형벌은 미국과 같이 범죄가 흉흉한 나라가 되지 않도록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계속 존치 하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한마디로 미국은 남의 나라 일에 참견하지 말고 너희 나라 범죄나 잘 다스려라 하는 이야기다. 우리와는 직접 관계가 없는 먼 나라 이야기이지만 왠지 우리를 시원하게 해준다.

맺고 끊음이 분명한 나라. 강은 강이고 산은 산임이 분명한 한폭의 사실주의 그림이다. 명백하고 잔인의 극치를 이룬 살인 사건에 대해서도 주민들이 들고 나서야 법 집행이 이루어지는 우리나라의 실정을 생각해보면 더욱 부러워 보일 수 밖에 없다.

사건의 본질 자체가 국가의 안위를 위태롭게 한것도 아니고 살인 강도와 같은 중범죄도 아닌, 어쩌면 이슈화 되기도 힘들고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눈감아 줄 수 있는 정도를 이렇게 당당하게 처리하는 싱가포르는 분명 우리의 귀감이다.


우리나라도 많은 변화 조짐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어느 국민학교 4학년 여학생의 이야기다. 하루는 일기장에 “ 선생님은 왜 미희만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만일 선생님께서 이 일기를 보고 계신다면 그 이유를 써 주세요” 선생님이 일기장 밑에 메모를 했다.

“정은이는 선생님이 얼마나 정은이를 좋아하는지 모르는 것 같구나. 정은이 보기에 선생님이 미희만 좋아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사실은 미희 만큼 정은이도 좋아한단다”

일기장을 통한 사제간의 커뮤니케이션도 재미 있지만 얼마나 확실한 의사 표현인가.


반추상화적 표현 기법은 정은이가 공연히 선생님을 보면 뾰루뚱 한다든지 아니면 몇날 며칠을 이불속에 얼굴을 파묻고 우는것일 것이다.

회사 내의 요즈음 갖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의 태도들도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옛날처럼 상사의 지적이 옳지 않더래도 면전에서 얼굴 붉힐수 없으니 그냥 지나쳐져주지 않는다.

납득이 갈 때까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다. 옳고 그름 혹은 가부간의 확실한 태도. 이러한 아이들의 태도를 공손하지 못하다든지, 요즈음 아이들은 참을성이 없다든지 하는 식으로 이야기 할수도 있다.


‘중용의 도’ 나 ‘삶의 지혜’의 부족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저간을 살펴보면 이들의 명확한 태도를 좀 더 고무 시키는 것이 필요함을 알 수있다. 얼마 전 일본에서 ‘NO라고 말할수 있는 일본인’ 이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었었다. 일본인은 NO라는 표현을 하지 않으니 상황 판단에 주의 하라는 지침은 서양인들이 일본을 상대 할 때마다 항상 내려진다.


이러한 실상은 일본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바로 우리나라에도 필요한 이야기이다.

맺고 끊는것을 명확하게 하지 않음은 서로 간의 충돌을 피할수 있고 누구나 자기 의견을 존중 받고 싶어하는 인간 본성에 부합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용인할수 있는 수준을 이미 지나쳤다.


허락 여부에 개연성을 두는 것은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부패의 온상 역할을 하며 사회적으로 큰 손실을 유발한다. 예를 들어 보자. 관청의 허가 사항일 경우 담당 공무원의 대답은 보통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되지 않는 것 같은 두 뉘앙스를 동시에 풍긴다.


따라서 뒷거래 결과에 따라서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다는 추론을 불러일으켜 부패를 유발한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안될 것 같으면 일찌감치 다른 일에 매달릴 수 있는 것을 훼방하는 격이다. 이러한 분명하지 않는 태도는 사람들의 일상 생활에도 파급되어 비정상을 정상으로 인정하게 만든다.


상가 분양의 예를 들어 보자. 상가를 30평을 분양 받고서 가보니 실평수가 10평도 안 된다는 것이다. 분양 평수는 무었이고 실평수는 무었인가?. 복도 면적이니 화장실 면적이니 하는 것은 물건을 팔기위해서 갖추어야할 기본 사항이 아닌가. 실평수가 10평이면 10평 판다고 해야 할것이 아닌가. 10평이 30평이라는 기이한 논리구조이다. 그

러나 우리 사회는 별 저항없이 이러한 논리 구조를 그냥 인정하고 살아간다. 대강 그렇다면 그런줄 알아라는 식이다. 매사가 그러하면 이상한 것도 모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과거를 돌이켜보면 국민들의 두루뭉실함이 우리나라의 사회 발전에 끼친 폐해가 실로 엄청났다. 정부의 비행이나 국민적 분노를 일으킬 사건이 발생하면 국민의 관심을 돌이키기 위해 엉뚱한 일을 부각시킨다.


그렇다고 이미 행해진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적당히 시간만 보내면 고맙게도 국민들은 잊어버린다. 매사를 반추상적으로 파악하고 기억하는 반추상적 국민성 때문이다.


두루붕실하게 처리된 정보는 쉽게 잊혀진다는것은 과학적으로도 입증된다. 사람이 정보를 처리하는 방법으로 schematic processing 이라는게 있다.

사람들은 하루 일상중 업청나게 많은 정보에 노출된다. 눈에 보이는 시각정보, 차가 지나가면서 내는 소음등과 같은 청각정보 등등. 우리는 이와같은 모든 정보를 처리할수 없어 특이하고 중요한 것외에는 쉽게 처리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세세히 따지지않고 정해진 도식에 의해 정보를 처리하는 것이다.


이렇게 처리된 정보는 당연히 오래 기억 되지 않는다. 인간이 사회에 적응하고 살기위해 필요한 mechnism인 것이다. 우리가 두루뭉실하게 받아들인 정보는 두루뭉실하게 태도를 형성하고 기억속에서 일찌 잊혀져가는 원리이다.


선진국이란 다름 아닌 얼마나 사회가 합리적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판정지워진다. 명백하고 객관적인 행위 기준이 설정되어야 하고 이 기준이 정확히 운영되어야한다. 우리의 두리뭉실함 때문에 가치 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모든 일이 대강 운영된다면 더 이상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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