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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2-02 16: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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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96년11월22일 분당 소재 경원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주최 제9회 통일문제 학술세미나에서 당시 제15대 국회의원이었던 필자가 행한 “북한의 주체사상과 대남전략(對南戰略)에 대한 이해”라는 제목의 기조연설문입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의 종북 주사파의 준동이 절정에 이르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도 특히 젊은이들이 읽으면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서 소개해 드립니다. 참고가 되어 드리기를 간망합니다.


▲ 북한을 지배하는 주체사상. 이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것이 주체사상탑이다. 주체사상탑은 평양 대동강 인근에 1982년에 세워졌다. (2018년 7월 9일 촬영) 【평양=뉴시스】 사진공동취재단


북한에서 언제부터 ‘주체(主体)’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는가에 관해서는 사실 정설이 없습니다. 북한의 선전기관들이 1982년 3월 31일 김일성(金日成) 탄생 70돌을 기념하기 위한 ‘전국주체사상토론회’에 보낸 김정일(金正日)의 논문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주체사상에 대하여'에 의하면 김일성은 1930년 6월 만주의 카륜이라는 곳에서 진행된 ‘공청(共靑) 및 반제청년동맹(反帝靑年同盟) 지도간부회의에서 ‘주체사상의 원리’를 처음으로 천명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북한의 장기(長技) 중의 하나인 역사적 사실의 변조일 뿐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1956년 스탈린 사후의 소련에서 후르시초프 정권이 등장하여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이면서 모든 위성국가들에게 수정주의 노선을 강요하고 나섰을 때 중국과 함께 이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북한이 들고 나온 것이 문제의 ‘주체사상’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1960년대 초부터 단편적인 형태로 ‘주체’에 관한 언급이 비롯되기 시작하여 급기야는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自主)” “국방에서의 자위(自衛)” “경제에서의 자립(自立)”이라는 “주체사상 4대 지도원칙”의 형태를 완성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북한이 등장시킨 ‘주체사상’의 본질은 매우 단조롭고도 단순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은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한 마디로 집약되고 있습니다. 북한측 설명에 의하면 이것이 ‘주체사상’의 ‘철학원리’라고 합니다. 즉 ‘주체사상’이야 말로 “사람중심의 새로운 철학사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주체사상’이 하나의 철학체계를 이루고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대체로 부정적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철학자인 신일철(申一澈) 교수는 그 동안 북한의 ‘주체사상’을 가장 깊이 연구한 분 중의 한 분입니다. 그런데 저는 몇 해 전 신 교수님으로부터 더 이상 ‘주체사상’ 연구를 계속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왜 그러시느냐는 저의 질문에 대한 신 교수의 대답은 그 동안의 연구결과 “‘주체사상’은 정치적 구호들로 구성된 하나의 ‘통치이념’에 불과하지 철학이나 사상체계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 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한총련’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주체사상’에 의하여 현혹되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이 많은 국민들을 의아하게 만드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그 같은 의문에 대한 해답은 있습니다. 즉, 이들 젊은이들은 성급하게도 ‘주체사상’이라는 ‘동전(銅錢)’의 양면(兩面) 가운데 한 면만을 보고 결론을 내리고 있을 뿐 아니라 자기가 아닌 남이 내려 주는 결론, 그것도 북한측이 제공하는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체사상’이라는 ‘동전’의 한 면에는 “사람은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동전’의 다른 면에 담겨진 ‘주체사상’의 또 하나의 메시지는 이와는 상반된 것입니다. 즉, “각자에게 자기 운명의 결정권을 주면 세상은 오가잡탕(五家雜湯)의 혼란에 빠지게 되기 때문에 개개인이 각자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게 방임할 수 없다”면서 따라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은 당사자 본인이 아니라, ‘당’과 ‘수령’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의 개개인의 존재는 처음부터 하나의 허구(虛構)였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소위 사람의 ‘사회적 존재론’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의 ‘사람’은 갑자기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인민대중’으로 치환됩니다.


즉 ‘주체사상’은 이제는 개개인으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인민대중’과 ‘당’ 및 ‘수령’과의 관계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주체사상’은 여기서 “지도와 대중의 결합” 문제를 제기합니다. 즉 “인민대중이 자기의 혁명임무와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는가의 여부는 ‘당’과 ‘수령’의 올바른 영도를 받는가 받지 못하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당’과 ‘수령’을 표기하는 순서에 잠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982년 김정일이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할 때까지만 해도 문제의 두 단어는 ‘당’과 ‘수령’의 순서였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그 순서가 ‘수령’과 ‘당’의 순서로 뒤바뀌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그것은 지금의 소위 ‘주체사상’은 지난 몇 해 동안에 처음에 등장했던 ‘주체사상’과는 다른 것으로 변질되어 있음을 증언해 주는 하나의 사례입니다.


지금 미국 조지아 주립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박한식(朴漢植)  교수는 1992년 10월과 11월 사이에 3주일에 걸쳐 북한 ‘주체과학원’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하여 주로 ‘주체사상’의 이론과 실제를 살펴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박 교수가 관찰한 ‘주체사상’은 본래의 ‘주체사상’과는 엄청나게 다르게 변형‧변질된 ‘주체사상’이었습니다.


1992년 가을에 박 교수가 목격한 ‘주체사상’은 기독교와의 이단적(異端的) 접목을 통해 형성된 하나의 ‘사교집단’의 사이비 ‘교리’로 둔갑하고 있었습니다. ‘주체’는 더 이상 ‘사상’이 아니었습니다. ‘주체’는 하나의 ‘종교적 신앙’으로 변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변질된 ‘주체사상’은 그 나름의 ‘3위일체론(三位一體論)’과 ‘영생론(永生論)’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즉, 북한판 ‘3위일체’에서 김일성은 ‘성부(聖父)’, 김정일은 ‘성자(聖子)’, 노동당은 ‘성신(聖神)’으로 자리가 매겨져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 개개인은 ‘인민대중’에 편입된 ‘사회적 존재’로 정의되어 ‘사회생명체’에 접목됨으로써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永生)”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이 같은 ‘영생론’에 입각하여 북한의 ‘인민’들은 개개인이 ‘육체적’으로 죽더라도 ‘사회적’으로는 ‘인민대중’ 속의 다른 ‘인민’들에 의하여 그 ‘생명’이 대를 이음으로써 영원히 살아 있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북한의 ‘주체사상’이 기독교와 다른 점은 기독교의 신이 “저 세상의 하느님”, 즉 ‘내세신(來世神)’인데 반해 ‘주체’의 신인 김일성은 “이 세상의 신”, 즉 ‘현세신(現世神)’이라는데 있었습니다. ‘현세신’인 김일성은 북한 주민들에게 살아생전에 실현될 ‘낙원’을 약속하고 있었습니다. ‘조국통일’이 그것입니다.


김일성이라는 ‘현세신’은 바로 이 ‘조국통일’이라는 이름의 ‘낙원(樂園)’을 ‘인민’들에게 ‘약속’함으로써 ‘인민’들로 하여금 이에 대한 기대심리로 ‘최면’된 상태에서 당장의 모든 고통을 즐거운 마음으로 견디어 내게 했던 것입니다. 생전의 김일성은 이 ‘낙원’이 실현되면 북한 인민들에게는 “쌀밥에, 고깃국에, 기와집에, 비단옷이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었습니다.


박한식 교수가 본 ‘주체 교리’로 무장된 북한이라는 거대한 ‘사교 집단’에서 살고 있는 2,300만 ‘교도’들 가운데 70%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로보트’였습니다. 그들은 전기를 넣어 주면 움직이고 전기를 뽑아 주면 멎는 ‘자동인형’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들은 모든 ‘사고(思考)’는 ‘수령’과 ‘당’에게 일임한 채 피동적으로만 움직이는 기계적 존재입니다. 이들은 주입되는 대로 사고하고 행동합니다.


최근에 와서 식량난이 가중되자 북한의 로보트화된 ‘인민대중’에게는 심지어 “기아(飢餓)의 미화론(美化論)”이 주입되는 요지경(瑤池鏡)이 연출되기에 이르고 있습니다. 즉 “사람은 배가 고파야 인간 구실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한 홉의 미숫가루 나누어 먹기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김일성의 항일 유격활동 시절을 두고 조작된 수많은 거짓 ‘설화(說話)’의 하나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군량이 떨어져 고생하는 가운데 한 병사가 어디선가 “한 홉의 미숫가루”를 구하여 김일성에게 바치자 김일성은 “내가 어떻게 혼자 먹겠느냐”면서 부하 병사들에게 이 “한 홉의 미숫가루”를 나누어 먹임으로써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는 예수 그리스도가 두 마리의 물고기와 다섯 개의 보리떡으로 수천명의 사람을 먹였다는 성경의 ‘이어오병(二魚五餠)’ 고사에서 표절한 것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박 교수는 흥미롭게도 이 70%의 ‘로보트’화 된 ‘인민대중’을 제외한 30% 가운데 25%는 ‘주체사회’라는 이름의 ‘사교 집단’을 육체적으로 관리‧ 운영하는 ‘광신도(狂信徒)’들로, 그리고 그 나머지 5%는 제한된 독자적 두뇌 기능을 가지고 이 ‘사교 집단’을 움직이는 ‘사제(司祭)’들로 관찰했습니다. 이 5%의 ‘사제’들은 이른바 ‘참고소식(參考消息)’이라는 이름으로 전달되는 바깥 세계의 모든 정보에 사실상 무제한 접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도 “지피지기(知彼知己)는 백전백승(百戰百勝)의 요체(要諦)”입니다. 즉 북한의 체제를 밖으로부터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서는 바깥 세계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 문제의 5%의 ‘사제’들이야 말로 작금 우리 주변에서 회자되고 있는 ‘북한개방’ 논의의 대상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지피지기’의 차원에서 이미 바깥 세계의 정보에 충분히 ‘개방’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상대가 되는 한 우리가 추진하는 ‘개방’의 효력에 관해서도 양론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논자에 따라서는 이 같은 개방노력은 “불가사리에게 쇠붙이를 제공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1994년 김일성의 돌연한 죽음으로 북한의 ‘주체’ 사회라는 이름의 ‘사교 집단’은 예상치 못했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김일성이라는 ‘현세신’의 죽음으로 그가 당대에 실현될 것으로 약속했던 ‘낙원’도 ‘현세신’과 함께 무덤에 묻혀 버리는 위험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것은 북한의 지도층이 김일성의 건강을 지나치게 과신한 나머지 그가 죽었을 때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한데서 비롯된 치명적 실수였습니다. ‘낙원’이 소멸되는 것은 북한주민들로 하여금 더 이상 즐거운 마음으로 고통을 견디어 내게 할 수 있는 마취제(痲醉劑)가 소멸되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북한은 김일성이 죽을 경우에 대비한 구체적 대비책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따라 김일성 사후 2년여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북한은 죽은 김일성을 되살리는 작업에 전력해 왔습니다. ‘현세신’이었던 김일성을 ‘내세신’으로 부활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소위 ‘유훈(遺訓)’ 통치입니다. 김일성은, “죽은 제갈량(諸葛亮)이 산 사마의(司馬懿)를 물리쳤다”는 옛날 중국 3국 시절 고사(故事)를 차용(借用)하여, 그가 생전에 거처했던 ‘금수산 의사당’(지금은 ‘금수산 혁명기념궁전’으로 개명되었습니다만)에 안치된 그의 관속에서 결코 현실화되지 않을 ‘낙원’을 약속하면서 북한주민을 통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북한을 둘러싸고 있는 미스테리 중의 하나는 김일성의 사망이후 2년 이상이 경과하도록 그의 후계자가 공식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스스로 선택하여 길러 놓은 그의 장남 김정일(金正日)은 지금도 여전히 ‘위대한 수령’에는 미치지 못하는 ‘친애하는 수령’으로 일컬어지면서 ‘인민군 총사령관’이라는 군사 직책만으로 막전(幕前)이 아니라 막후(幕後)에서 북한을 통치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김일성이 비워놓은 ‘조선로동당 총비서’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라는 두 개의 최고 직위는 아직도 공석중입니다.


이 미스테리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이 의문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권위 있는 해답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같은 미스테리의 주요 원인은 ‘내세신’으로 김일성을 부활시키는 작업과 맞물려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이 같은 김일성의 부활작업이 아직도 완성되지 못하고 있고 더더구나 이같이 부활되는 ‘내세신’과 김정일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느냐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동안 김일성의 몫이었던 “낙원 실현”의 ‘약속’을 과연 김정일이 그의 몫으로 인수할 수 있을 것이냐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해답은 쉽사리 나올 것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두 개의 최고 권좌가 공석인 비정상적 상황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농후한 것 같기도 합니다.


1992년4월9일자로 개정된 북한의 현행 ‘사회주의헌법’은 제3조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람중심의 세계관이며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사상인 주체사상을 자기 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모든 문제가 ‘주체’에 걸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주체사상’이 갖는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절대성과 교조성에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주체사상’에 근거한 북한의 모든 행동 양태에서는 일체의 상대성과 융통성이 배제되게 되어 있습니다. 통일문제와 남북관계에 관한 북한의 태도, 다시 말해 북한의 대남전략도 거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주체사상’이 고수되는 한 북한의 대남전략에는 아무런 융통성이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북한의 통일정책, 즉 대남전략은 소위 ‘주체사상에 기초한 남조선혁명과 조국통일이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에 의한다면 우리나라의 통일문제는 하나의 ‘혁명’의 문제이지 ‘타협’의 문제도, ‘협상’의 문제도, ‘선거’의 문제도 아닙니다.


북한의 통일관은 소위 ‘미완성 해방론’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즉,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의한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로 연합군에 의해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북한지역은 완전히 해방되었으나 남한지역은 “일제로부터는 해방되었지만 미제에 의해 다시 점령된 미해방지역”으로 남겨졌다는 것입니다. 북한측의 주장에 의한다면 오늘날 남한의 ‘주인’은 ‘미제’이며 여기에 존재하는 대한민국은 오직 ‘미제’의 ‘괴뢰’일 뿐입니다.


따라서 북한의 통일전략은 2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단계로는 소위 ‘남조선혁명’의 수행을 통해 ‘미해방지역’인 남한의 ‘해방’을 완성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2단계로 “이미 해방되어 있는 북한”과 “새로이 해방되는 남한”을 ‘합작’시켜 ‘통일’을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북한의 통일전략은 2단계인 남북 ‘합작’에 의한 ‘조국통일’을 실현시키는 방도에는 ‘평화적 방도’와 ‘비평화적 방도’, 즉 무력에 의한 방법의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1단계인 ‘남조선혁명’을 수행하는 데는 오직 ‘폭력적 방법’뿐이라고 단정합니다.


북한의 통일전략의 1단계인 ‘남조선혁명’은 그 목표를 주한미군의 철수를 포함하여 남한의 ‘주인’인 ‘미제’와 ‘미제’의 ‘괴뢰’인 대한민국간의 안보유대를 이간‧파괴하고 대한민국의 ‘반공’ 체제를 이완‧약화시켜 대한민국의 자기방어 능력을 마비시킨 후 ‘폭력혁명’을 통하여 대한민국을 전복‧타도하고 그 대신 하나의 ‘과도체제’로 ‘용공’ 내지 ‘연공’ 정권을 창출하는데 두고 있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이른바 ‘3대 혁명력량론’입니다. 즉, 북한을 ‘혁명기지’로 꾸리고, 남한의 ‘혁명력량’을 강화하며 국제적 ‘혁명력량’과 연대한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남조선혁명’의 단계에서는 북한은 미국만을 상대할 뿐 ‘미제’의 ‘괴뢰’인 대한민국은 상대하지 않습니다. 남북대화는 결코 대한민국을 상대로 해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단계에서의 남북대화는 오직 ‘정치협상회의’나 ‘정당‧사회단체회의’의 테두리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동안 남북한 ‘당국’간에 있었던 남북대화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북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라는 민간단체와 ‘대한민국’이라는 일종의 ‘정당‧사회단체’간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북한은 남북간에 거론되는 ‘정상회담’도 결코 ‘정상회담’이라고 일컫지 않습니다. 그 호칭은 ‘남북 최고당국자회담’입니다. ‘총리회담’의 명칭도 북한쪽에서는 ‘고위급회담’이었습니다. 또 바로 이 때문에 북한은 남북경협을 논하는 데도 대한민국 정부의 참가는 완강히 거부하고 북한이 선택한 한국의 기업들을 직접 상대하겠다는 태도인가 하면 이른바 ‘나진‧선봉 투자설명회’에도 대한민국 정부대표의 참가는 굳이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러면서 대한민국은 제켜 놓고 오직 미국만 상대하겠다는 것이 북한의 태도입니다. 심지어는 이번에 발생한 ‘잠수함’ 침투사건에 관해서도 “한국에 사과할 수는 없고 한다면 미국에 하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잠수함’ 문제에 관해서는 적반하장으로 한국측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있고 그러면서 미국이 북한의 말을 듣지 않으면 1995년 제네바에서 이루어진 미국과 북한간의 합의에 따라 시행중에 있는 북한의 핵물질과 시설에 대한 동결조치를 해지하겠다고 역으로 협박하고 있습니다. 철두철미 “한국은 미국의 식민지”라는 억지 입장을 고수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하여 ‘남조선혁명’이 수행되어 한국이 ‘용공’ 내지 ‘연공’화 되면 남과 북을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이라는 이름의 ‘연방제’로 ‘합작’시켜서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룩하겠다는 것이 북한이 추구하는 ‘조국통일의 평화적 방도’입니다. 만약 그러한 ‘남조선혁명’이 수행되지 않으면 ‘무력’ 사용에 의한 ‘비평화적 방도에 의한 조국통일’이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북한이 1950년 일으켰던 6.25 전쟁은 바로 이 같은 ‘비평화적 방도’에 의하여 통일을 추구한 경우였습니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이 북한의 ‘주체사상’의 허실과 이 같은 ‘주체사상’에 기초한 북한의 ‘선 남조선혁명‧후 조국통일’의 대강입니다. 이 같은 북한의 통일전략이 지속되는 한 세계적 차원이나 한반도 주변 환경의 차원에서는 ‘탈냉전’의 시대가 개막되더라도 한반도 남북관계는 ‘냉전시대’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대책도 당분간 불가피하게 과거 ‘냉전 시대’의 대책을 유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주변에서는 이 같은 한반도의 현실을 간과하고 때 이르게 ‘탈냉전’을 구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경종을 울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한 시점에 경원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가 오늘 ‘북한의 주체사상과 대남전략에 대한 이해’라는 테마를 가지고 학술 세미나를 갖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 하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 뜻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박욱성 소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이 귀중한 행사가 성공을 거두시기를 빌어 마지않으면서 저의 기조연설을 이만 끝낼까 합니다. 장시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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