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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12-02 17:34:04
  • 수정 2018-12-05 21:5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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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김대중, 2018문재인의 남북정상회담. 흑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다.


금년 들어서 세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진 ‘남북정상회담’과 이를 통하여 이루어진 ‘4.27 판문점선언’과 ‘9.19 평양선언’을 축으로 하여 전개되고 있는 남북관계의 향배에 대한 국민적 차원의 고민이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남북관계의 흐름과 이 흐름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내 정세는 2000년 김대중(金大中) 정권 때의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의 상황과 방불하다.


다음의 글은 월간 <군사세계(軍事世界)>가 2000년 8월호에 게재한 필자와의 대담록(對談錄)이다.


이 글에서 남의 ‘김대중’을 ‘문재인(文在寅)’으로, 그리고 북의 ‘김정일(金正日)’을 ‘김정은(金正恩)’으로 바꿔치기만 한다면 그때의 상황이 오늘의 상황이 놀라울 정도로 방불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동병상린(同病相燐)의 차원에서, 오늘의 시국 상황에 관하여 답답함을 느끼는 분들이 그 답답증을 해소시키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충정(衷情)에서 이 글을 재록(再錄)한다.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一讀)을 감히 청하면서 아울러 편달을 바란다.


[북한 전문가의 분석- 최근 상황 바로보기, 이동복과의 一問一答]


月刊「軍事世界」2000.8月號(通卷65호) 收錄:


變化에는 반드시 檢證이 따라야 한다.
- 이동복 전 의원이 보는 ‘變化’에 대한 ‘가치평가 기준’ -


<머릿말>


이동복 전의원, 그는 1970년대와 80년대, 그리고 90년대에 걸쳐 남북대화의 실무 주역 중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70년대에는 남북조절위원회 서울측 대변인으로, 90년대에는 남북고위급 회담 대표와 대변인으로 한 때 그의 이름은 남북대화의 대명사였다.


그는 15대 국회에서는 외무통일위원회와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정부가 앞장서서 주도하는 가운데 우리 사회 안에서 급격하게, 무비판적으로, 그리고 겨레의 사활이 걸려 있는 대북정책의 운영은 정권 차원에서의 정치운용의 테두리를 떠나 초당적, 범국민적으로 다루어 줄 것을 주문했다.


그는 특히 '보수'의 입장에서 지난 번 김대중 대통령의 역사적인 평양방문 이후 우리 사회 내부에서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찬반 여론이 '보수'와 '진보'간의 이념적 갈등으로 분식·희석되고 있는 데 대하여 이의를 제기했다. 이동복 전 의원과의 대담을 일문일답으로 정리해 본다.


<질문> 지난 6월에 있었던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과 이 과정에서 남북간에 6.15 공동선언이 합의되어 발표된 뒤 남쪽에서는 대북정책에 관하여 많은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고 있음이 발견됩니다. 특히 김정일의 이미지가 하루 밤 사이에 극에서 극으로 달라진 가운데 ‘보·혁 갈등’에 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최근 우리의 대북정책과 관련하여 사회에서 부각되고 있는 ‘보수’와 ‘진보’간의 갈등구조는 특히 ‘보수’의 본질에 대한 왜곡된 개념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지금 특히 대북정책 추진과 관련하여 ‘보수’를 ‘수구’나 ‘반동’과 동의어로 밀어붙이는 경향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움직임은 매우 부당한 것입니다. 왜냐 하면 ‘보수’는 ‘수구’나 ‘반동’과는 엄연히 구별되는 다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의 ‘보수’는 우리가 그 동안 대한민국에서 이룩해 놓은 것을 지키면서 그 연장선상에서 개량할 것은 개량하고 개혁할 것은 개혁하자는 입장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맹목적으로 오늘에 집착, 일체의 개혁에 대해 반대하고 저항하는 ‘수구’나 ‘반동’과는 혼동될 수 없는 입장인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전통사회에서의 ‘보수’의 본질은 ‘개인’과 ‘전통’사이에 이루어지는 ‘타협’에 있어 왔습니다. 이같은 ‘타협’은 반세기전 대한민국 건국 이래 부단하게 진행되어 왔고 오늘도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진행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개인’과 ‘전통’ 사이에서 그러한 ‘타협’이 이루어지게 만드는 ‘촉매’가 바로 ‘자유’였습니다. ‘개인’과 ‘전통’과의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관관계와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이질적 사상과 현상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그 같은 상관관계를 ‘개인’과 ‘전통’간의 관계로 보지 않고 ‘집단’과 ‘전통’간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움직임입니다.


예컨대, 공산주의, 사회주의라던가 과거 나치독일 시절의 ‘국가사회주의’ 같은 것들이지요. ‘집단’적으로 움직이다 보니까 여기서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의 ‘괴물(怪物)’이 등장했습니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집단’을 ‘최면’시키기 위한 ‘주문(呪文)’인 것입니다.


‘전통’과의 상관관계를 ‘집단’과의 관계로 설정하는 데 정치적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요소가 ‘촉매’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종교’입니다. 인류 역사를 통하여 ‘현세’를 관리하는 ‘정치’와 ‘내세’를 지배하는 ‘종교’ 사이에는 끊임없는 갈등이 빚어져 왔습니다. ‘종교’가 정치적으로 밀고 나와 ‘현세’의 영역을 침범할 때는 정교(政敎)간에 분규가 빚어져 예컨대 ‘십자군'(Crusade)나 ’지하드‘(Jihad)와 같은 엄청난 인류 차원의 참극을 강요했고 그와는 반대로 ‘종교’와 ‘정치’가 ‘내세’와 ‘현세’라는 각자 영토를 지켜서 서로 침범하지 않을 때는 오히려 상호 보완성을 살려서 정교간 평화가 유지되어서 건전한 사회적 안정과 문화 융성의 토양을 제공해 왔습니다.


나는 ‘보수’라는 것이 ‘개인’과 ‘전통’간의 상관관계이기 때문에 이를 ‘이데올로기’화 하여 설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보수’는 ‘개인’과 ‘전통’ 사이에 자연스럽게 ‘타협’이 이루어지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이데올로기’화 하여 설명하려 한다면 그 것은 이미 그 자체로써 ‘보수’의 의미를 일탈하는 것입니다.


‘혁신’이나 ‘진보’는 ‘전통’과의 관계를 ‘집단’과의 관계로 보는 데서 출발하는 용어들입니다. 따라서 ‘혁신주의’나 ‘진보주의’는 이미 개념적으로 ‘개인’을 무시하는 ‘집단주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의미를 함축한 표현들이기도 합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문제도 바로 그러한 문제들입니다. 1919년 모스크바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세계무대에 등장했던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이름의 ‘공산주의’는 이미 하나의 실패한 ‘이데올로기’로써 역사적으로 엄청난 찬반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고, 심지어는 북한에서도 벌써 잊혀진 이름이 되어 있는 만큼 이것을 가지고 우리 사회 안에서 ‘보수’ ‘진보’ 타령을 벌인다면 이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일일 것입니다.


더구나 북에서 이야기하는 소위 ‘주체사상’의 경우는 더욱 그러합니다. ‘주체사상’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종교’ 가운데서도 사이비 종교에서나 볼 수 있는 사이비 ‘이데올로기’에 불과합니다.


‘주체사상’이 왜 사이비인가?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북한이 말하는 ‘주체사상’에는 동전처럼 양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동전과는 달리 ‘주체사상’의 양면은 상호 극단적으로 모순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주체사상’의 한 면에는 “모든 사람은 각기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가 담겨져 있습니다. 즉, ‘주체사상’의 ‘주인’은 ‘개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당연한 명제가 많은 사람들을 ‘주체사상’으로 끌어 드리는 끈끈이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주체사상’이라는 동전의 다른 면에는 이와는 전혀 다른, 상극적인 명제가 담겨져 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고 해서 각자가 자기 운명을 직접 결정하려고 하면 세상은 ‘오가잡탕(五家雜湯)’의 혼란에 빠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각자의 운명을 대신 결정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주체사상’의 진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즉 ‘수령론’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어느 순간에 ‘개인’은 ‘인민’이라는 이름의 ‘집단’에 의하여 치환되어 버립니다. ‘개인’은 ‘오가잡탕’이기 때문에 각자가 자기 운명을 직접 결정할 수 없고 그 대신 ‘인민대중’이라는 이름의 ‘집단’이 운명 결정의 주체가 되어야 하며, 그 ‘집단’의 의사 결정은 ‘수령’과 ‘당’이 대신 해 주어야 한다는 것으로 둔갑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 가운데 사교(邪敎)집단에서나 볼 수 있는 한 편의 ‘사기극(詐欺劇)’임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상대하고 있는 북한의 실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같이 이미 ‘진보’나 ‘혁신’과는 상관없는 하나의 ‘사기극’인 북한을 상대로 이른바 대북정책을 추진하는 우리 사회가 내부에서 ‘보수’와 ‘진보’의 갈등으로 진통을 겪고 있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이유는 있습니다.


이 같은 현상은 과거 이 나라의 경제개발을 주도했던 권위주의체제 시대의 한 부산물이기도 합니다. 과거 권위주의체제 시대에 이 나라에는 제도권 밖에서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던 반체제세력이 있었습니다.


이 시대 이들 반체제세력의 ‘적’은 제도권 안의 권위주의체제였습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또한 마키아벨리의 권력이론의 신봉자들이었습니다. 즉, “적의 적은 친구”이고 “적의 친구는 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적’인 권위주의체제의 ‘적’인 북한은 오히려 ‘친구’이고 ‘적’인 권위주의체제의 ‘친구’인 미국은 오히려 ‘적’이 되는 전도된 관념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지금은 제도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1987년 노태우(盧泰愚) 당시 민정당 대통령후보의 6.29 선언에 따라 대통령직선제가 부활된 뒤 과거에는 제도권 밖에 위치했던 소위 ‘반체제’ 세력의 일부가 1989년의 소위 ‘3당 통합’ 때 김영삼(金泳三)씨를 따라 ‘민주자유당’에 참여함으로써 제도권 안으로 진입했을 뿐 아니라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과 더불어 정부·여당의 핵심부에 포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6.29 선언 이후 제도권 안으로 자리를 옮겼으면서도 김영삼씨와 함께 ‘3당 통합’에 동참하는 것을 거부했던 일부 구‘반체제’ 세력은 1997넌 제15대 대통령선거 때 김대중(金大中) ‘야권 단일후보’의 기치 아래 모여 “50년만의 수평적 여야 정권교체”를 이룩하는 데 동참함으로써 1998년에 출범한 지금의 ‘국민의 정부’ 안으로 진입했습니다.


이들은 2000년에 실시된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통해 대거 정치권 안으로 진입한 소위 ‘386 세대’와 함께, ‘보수’를 매도하고 ‘진보’를 표방하면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급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대북관, 대북인식의 전환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대다수의 경우 이들 구‘반체제’ 세력의 인사들이 북한의 동조세력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 이들이 보여주는 특징의 하나는 지난 날 이 나라에 군림했던 권위주의체제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가 깊은 나머지 상대적으로 이 나라 권위주의체제의 ‘적’인 북에 대해서는 보다 ‘관대’하면서 반세기에 걸친 오랜 기간 동안 축적된 경험을 통해 정립된 종래의 북한관, 대북인식이 우리 쪽 권위주의체제에 의하여 정치적 목적으로 왜곡·조작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그 결과 이들이 스스로의 북한관과 대북인식을 형성하는 과정은 코끼리와 장님들에 관한 인도의 우화를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즉, 북한이라는 코끼리의 실체에 관한 기존의 인식은 이를 수용할 것을 거부하고 그 대신 자신들의 직접적 접촉을 통하여 독자적인 북한관과 대북인식을 새로이 형성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 하면, 인도 우화에 나오는 장님들은 눈으로 보지 못하는 탓에 각자가 손으로 만져볼 수 있었던 코끼리의 부위를 코끼리의 실체로 인식하는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부분을 전체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북한이라는 코끼리는 영리한 코끼리입니다. 코를 향하여 오는 장님에게는 코를, 귀를 향하여 오는 장님에게는 귀를, 다리를 향하여 오는 장님에게는 다리를, 상아를 향하여 오는 장님에는 상아를 만지게 해 주고 그 결과로 북한이라는 코끼리의 실체를 놓고 이들 장님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즐길 뿐 아니라 남쪽 사회를 분열·이간시키는 데 이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 우리 사회에는 이 같은 북한의 장난, 그리고 우리 사회 안에서 일부 세력이 이 같은 북한의 장난에 놀아나는 것을 견제할 수 있는 진정한 ‘보수’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엄격하게 말한다면 지금 이 사회에 ‘보수’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지요. 지금도 여전히 이 나라 인구의 압도적 다수는 ‘보수’ 성향의 의식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이들의 에너지를 조직하고 집결시킬 수 있는 지도세력이 없습니다.


그동안 반세기에 걸쳐 빈곤과 분단, 그리고 북으로부터의 끊임없는 안보위협이라는 3중고(三重苦)의 악조건 속에서 ‘보수’ 성향의 국민대중을 이끌고 이 나라의 개발시대를 주도했던 기성세대가 그 과정에서 많은 무리수를 둔 결과로 집단적으로 ‘도덕적 해이’의 깊은 늪 속에 함몰되어 도덕적 정당성을 상실하고 설득력 있는 체제옹호 논리를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나라가 경제개발에 성공하여 오늘날의 경제적 풍요를 맛볼 수 있게 된 것은 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업적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업적에 대한 평가와는 별도로 그 분의 정치운용 내용에 대해서는 많은 부정적 시각이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개발주도형 경제일변도의 정치운용 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도덕적으로 멍이 들었습니다. 획일주의와 권위주의의 그늘에서 향락주의와 편의주의가 기승을 떨고 국민들의 주인의식이 마비된 가운데 “내가 하면 연애, 남이 하면 스캔들” “남의 거짓말은 불가, 나의 거짓말은 무관”이라는 풍조가 보편화되었습니다. 결국 기성세대는 더 이상 신진세대에게 ‘모범’이 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1997년 12월 17일의 제16대 대통령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승리하여 수평적 여야 정권교체를 이룩한 것도 이 같은 상황인식의 테두리 안에서 그 의미를 읽어보아야 합니다.


사실은 객관적으로 볼 때 이번 대통령선거에서도 김대중 후보가 처음부터 이기게 되어 있는 것을 이긴 것이 아닙니다. 김 후보는 이번에 3전4기(三顚四起)에 성공했습니다. 세 번의 실패를 딛고 일어선 것입니다. 김 대통령이 과거 세 번의 실패를 반복했던 것은 그가 극복할 수 없었던 삼중(三重)의 장벽이 그를 가로막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첫 번째의 장벽은 ‘지역’의 장벽이었습니다. 두 번째의 장벽은 ‘사상’의 장벽이었습니다. 세 번째의 장벽은 ‘신뢰성’의 장벽이었습니다.


대통령선거의 득표내용을 분석해 보면, 이번에도 김 대통령은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의 구단주(球團主)인 김종필(金鍾泌)씨의 지원이 없었으면 당선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김종필씨는 스스로의 대권 도전을 포기하고 김대중 후보를 ‘야권 단일후보’로 추대함으로써 김 후보의 세 가지 치명적 약점 가운데 두 가지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즉, 김종필씨의 선택에 따라 그를 추종하던 충청권 유권자들의 상당수가 전통적인 반김대중 성향에도 불구하고 김 후보에게 표를 던져 ‘지역의 장벽’을 허물 수 있게 해 주었고, 역시 전통적으로 반김대중 성향인 ‘보수’ 성향의 유권자들 가운데 상당수도 김종필씨의 ‘견제’에 기대를 걸면서 김 후보에게 표를 던짐으로써 ‘사상의 장벽’을 허물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김종필 씨의 행보는 이 나라 ‘보수’ 세력의 입지를 더욱 어렵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에 이어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의 과도정권과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5공’ 및 노태우 대통령의 ‘6공’을 거친 시점에서 자민련을 이끄는 김종필씨는 이 나라 ‘보수’ 세력에 남겨진 마지막 ‘보루’이자 ‘등댓불’이었습니다. 그의 대권 도전 포기는 사실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영남’과 ‘호남’의 패권 싸움 구도에서 ‘충청권’의 힘만으로 ‘홀로 서기’는 불가항력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김대중 후보가 당선될 경우 그의 주도하에 2000년에 끝나는 제15대 국회 임기 중 ‘내각책임제 개헌’을 단행한다”는 ‘약속’을 대가로 하여 대권 도전의 날개를 접었던 것입니다.


‘충청권’에서는 이 내각제 개헌 약속을 믿고 김대중 후보에게 많은 표를 몰아주었습니다. ‘보수’ 세력은 그들대로 김종필 씨가 김대중 대통령이 이끄는 ‘공동정부’에 참가할 경우 정부안에서 특히 대북·안보정책 분야에서는 김 대통령을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해 주리라는 ‘기대’를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김종필 씨는 비단 제15대 국회 임기 중 ‘내각책임제 개헌’ 공약의 이행을 그 자신이 스스로 포기했을 뿐 아니라 정부안에서 김 대통령의 대북·안보정책을 ‘견제’하는 기능을 수행하지도 않았습니다.


지난 2000년 4월에 있었던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결과는 이 같은 김종필 씨의 납득하기 어려운 정치행보에 대한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반영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김종필 씨는 아마도 재기불능의 정치적 상처를 입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보수’ 세력의 구심점이 아닙니다.


<질문>혹시 이번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나들이도 조금 전에 말씀하신 코끼리와 장님들에 관한 인도 우화와 같은 경우는 아니었을까요?


<답변>

글쎄, 그 질문에 대하여 그렇다 아니다라고 단정적으로 답변할 수야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2000년 6월 김 대통령의 평양방문으로 인하여 발생한 변화 가운데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남쪽 국민들 사이에서의 북한의 독재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이미지가 하룻밤 사이에 ‘악마’로부터 ‘천사’로 둔갑한 것이 아닐까요?


이 문제에 대한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과거 동서 냉전시대의 남북관계가 가지고 있었던 특성 때문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권위주의체제 아래서 사는 동안 비단 우리의 북한관, 대북인식이 냉전적 사고에 의하여 변질·왜곡되었을 뿐 아니라 그 보다도 북한의 통치자들인 김일성과 김정일의 이미지가 사실과는 다르게 많이 왜곡·조작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여북하면 초등학교 저학년 아동들에게 북한사람들의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빨간 얼굴에 뿔을 단 모습을 그리던 시절이 있었겠습니까? 이 같은 왜곡된 이미지 때문에 남북관계의 원만한 개선·해결이 불가능해진 점이 없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 아니었습니까? 그러한 뜻에서 왜곡된 북한관, 대북인식, 특히 북한의 지도자들의 왜곡된 이미지가 바로 잡혀지는 것은 건전한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도 남북간에는 냉전구조가 해소되지 않고 있는 한반도의 현실상황 속에서는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의 김 대통령의 평양방문이나 남북 정상회담 같은 것이 기회가 되어 그 같은 왜곡된 이미지가 바로잡혀지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은 그 자체로 충격적인 점이 없지는 않더라도 바람직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기대로 또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도의 문제입니다. 그 같은 이미지의 개선은 가능한 한 객관적 토대 위에서 합리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김정일의 이미지 변화가 이 같은 객관성과 합리성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내용으로 이루어지고 있느냐는 문제를 짚어보지 아니 할 수 없습니다.


2000년 6월에 김정일은 세 가지의 ‘무기’로 남쪽 국민들 사이에서 그의 이미지를 하룻밤 사이에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첫째로는 그의 순안공항 출영이었습니다. 둘째로는 평양시민의 대규모 동원이었습니다. 셋째로는 분방하기 그지없었던 그의 화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김 대통령 일행이 평양방문 기간 중 접했던 김정일의 ‘얼굴’은 그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개의 ‘얼굴’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기본적으로 김정일이라고 하는 인물은 미지의 인물, 미궁의 인물입니다. 그 자신도 김 대통령에게 “이번에 김 대통령의 방문으로 나는 은둔자로서의 이미지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미지의 인물’로써 김정일에 관해서는 여러 개의 상이한 ‘얼굴’들이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오랜 세월동안 가까운 거리에서 그와 생활공간을 공유했던 측근인물로 지난 1997년 북을 탈출, 남으로 망명한 황장엽(黃長燁) 전 노동당비서가 그려준 그의 ‘얼굴’이 있고, 1984년 북으로 납치되었다가 1989년 기적의 탈출에 성공한 영화인 신상옥(申相玉)·최은희(崔恩姬) 내외가 그려준 그의 ‘얼굴’이 있으며, 1987년 미얀마 근처 인도양 상공에서 대한항공 858편 여객기를 폭파한 2인조 북한 폭파범중의 하나인 김현희(金賢姬)가 그려준 그의 ‘얼굴’이 있습니다.


또한 그에게는 북한지역을 사실상 하나의 거대한 ‘수용소군도’로 유지하면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통제와 세뇌를 통해 대다수 북한동포들을 인성(人性)을 박탈당한 기계적 도구로 변모시켰을 뿐 아니라 경제정책의 실패로 수백만의 아사자를 발생시킨 실정(失政)의 책임자로서의 그의 ‘얼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김 대통령의 평양방문 2박3일 동안에 김정일이 보여준 그의 ‘얼굴’은 이 ‘얼굴’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별개의 ‘얼굴’이었습니다.

1964년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노동당 지도원으로 지도자 수업을 시작한 김정일은 평생 동안 ‘조직’과 ‘선전’ 및 ‘선동’ 분야에서 경력을 키워온 사람입니다. 이번 김 대통령의 평양방문 기간 중 김정일은 ‘조직’과 ‘선전’ 및 ‘선동’의 대가로서의 그의 진면모를 십이분 발휘하여 그 자신의 기획·제작·감독·연출·주연으로 남쪽의 대다수 국민들은 물론 세계의 이목을 놀라게 한 거대한 ‘깜짝쇼’를 꾸며냈습니다.


▲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8일 무개차를 타고 평양시내를 퍼레이드 하며 시민들에 환영에 답하고 있다.【평양=뉴시스】평양사진공동취재단 박진희 기자


사실은 순안공항에, 그리고 평양시내에 모아놓은 수십만의 인파가 엄밀한 의미에서 김 대통령 일행을 환영하기 위한 군중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엄청난 결속력으로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동원된 인파였고 결과적으로는 남쪽으로부터의 방문객 일행에 대한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군중시위였습니다.


실제로 이날 평양군중 속에서 어느 누구도 당일 날 흥분했던 남쪽의 어느 TV 해설가와 수행했던 어느 교수가 분명히 ‘실언’한 것처럼 김대중 대통령의 이름을 거명하여 연호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들이 연호한 것은 오직 김정일의 이름 뿐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김 대통령 일행은 실제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김 대통령을 수행했던 일행은 이 ‘시위군중’을 ‘환영인파’로 착각하여 감동했으며 감동의 정도가 지나쳐 김정일의 여러 다른 ‘얼굴’들은 외면한 채 이번에 보여준 ‘얼굴’만을 가지고 그를 ‘악마’로부터 ‘천사’로 둔갑을 시켜놓은 것입니다.

물론, 이번에 김정일이 평양에서 보여준 그의 ‘얼굴’이 꾸며지지 않은, 분식되지 않은 그의 실제 ‘얼굴’중의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보여준 언행이 철두철미 꾸며진 ‘연기’가 아니라 진실을 보여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냉엄한 현실은 이에 대한 ‘검증’의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이 문제는 냉전시대 다른 나라에서도 제기되었던 문제입니다. 1980년대 미·소간 전략무기제한협상(SALT)이 진행되고 있을 때 등장한 ‘경구(警句)’가 있습니다.


즉, “믿어라, 그러나 그 전에 검증하라”(Trust, But Verify First)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김정일의 이미지 변화도 반드시 ‘검증’을 거쳐서 이를 수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번에 보여준 ‘얼굴’이 진짜 실제 ‘얼굴’인가도 ‘검증’해야 하고 이와 아울러 앞에서 일부 지적된 것처럼 그가 가지고 있는 그 밖의 여러 ‘얼굴’들에 대해서도 ‘검증’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이번 평양나들이에 참가했던 남쪽 인사들이 코끼리와 장님들에 관한 인디안 우화에 나오는 장님들처럼 행동한다면 이번 김 대통령의 평양방문과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6.15 남북공동선언의 의미는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관해서는 작금 우리 사회의 흐름이 걱정스럽습니다. 왜냐 하면, 지금 우리 사회에는 김정일에 관하여 김 대통령이 전하고 그려내는 이미지만이 우리들에게 전달되고 있고 이 같이 변화된 김정일의 이미지에 관하여 동조하지 않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수구’ ‘반동’ ‘보수’로 매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정일의 이미지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 또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이번에 평양에서의 2박 3일간의 한 편의 드라마를 통하여 그가 그의 뛰어난 연출력과 연기력으로 이룩해낸 이미지 변화가 그밖에 그가 책임져야 할 어두운 과거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있을 것이냐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사회는 최근 이른바 ‘역사 바로 잡기’ 운동의 열병을 앓고 있는 중입니다. ‘역사 바로 잡기’라는 미명 아래 과거의 많은 사건들이 재조명되고 이들 사건에 연루되었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훼예포폄(毁譽褒貶)이 진행 중입니다. 여기에는 심지어 여수·순천사건, 제주도 4.3사건까지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북의 경우, 물론 김일성의 후계자로써 역사적 사실들에 관하여 연령상 직접 책임을 질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일들도 적지 않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오늘날 북한에서 전개되고 있는 어느 상황으로부터도, 또 남북관계에서 일어났던 어떠한 사건으로부터도 김정일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내부에서 ‘역사 바로 잡기’라는 이름으로 과거에 대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진행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북에 대해서만은 분단은 물론, 6.25 전란과 그 이후 헤아릴 수 없었던 대남도발, 그리고 북의 동포들에게 가해진 엄청난 비인도적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은 비단 형평성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정의의 차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6.15 남북공동선언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이 공동선언을 보면 우리가 김정일을 비단 분단상태 하의 남북관계를 관리하는 ‘분단관리’의 상대방으로 그 존재를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실상 분단조국 ‘통일논의’의 상대방으로 그 존재를 수용하는 것을 그 취지로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점입니다.


분단상태 하에서 김정일은 북한지역과 이 지역에 거주하는 동포들에 대한 절대적 통치자로써 부동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 때문에, 분단상태 하에서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해결하는 일은 북한지역의 유일무이한 실권자인 김정일을 상대로 해서 추진하지 아니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따라서 분단상태 하에서 남북간에 평화공존을 제도화하고,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정착시키고, 이산가족을 만나게 하고, 분단으로 인한 그 밖의 고통과 불편을 경감 내지 해소시키는 등 남북관계를 개선·해결하는 일에 관해서는 우리는 김정일을 우리의 대화 상대방으로 수용하지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통일은 이와는 다른 문제입니다. 통일은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때에는 우리는 김정일을 상대로 따져야 할 일이 있고 그에게 책임을 지워야 할 일이 있습니다. 통일은 북의 동포들을 상대로 추진해야 하지 김정일을 포함하여 오늘까지 북한을 지배해온 통치세력을 상대로 추진해서는 아니 되는 일입니다.


한편에서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만드는 과정에서 저질러진 여러 가지 불미한 일들에 대하여 그 때의 관점이 아닌 현재의 관점에서 흑백을 가리고 이를 근거로 특정 사안들에 대한 때늦은 ‘정의의 심판’이 설왕설래되고 있는 상황인 데 다른 한편에서는 남북분단을 초래했고, 수백만명의 동포들로 하여금 월남실향민이 되게 하는가 하면 6.25 전쟁을 도발하고, 북의 2천 7백만 동포들로 하여금 오늘의 고통을 안겨준 장본인을 과연 용서할 뿐 아니라 그를 상대로 ‘통일’을 논의할 수가 있는 것인가?


만약 과거의 과오와 관련하여 우리가 남쪽 사회 내부에서 역사적으로 있었던 일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면 당연히 북쪽에서 저질러졌던 역사적인 일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관대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적어도 이미 과거의 일이 된 역사 속의 일에 대해서는 남북에 대해 같은 잣대를 적용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번 6.15 남북공동선언은 김정일의 위상에 관하여 ‘분단관리 방안’ 논의의 상대역보다는 ‘통일실현 방안’ 논의의 상대역으로써의 위상을 부여하는 데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6.15 남북공동선언이 역설적으로 ‘국론통합’에 기여하기보다 ‘국론분열’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없지 않은 것입니다.

<질문>이번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북한이 노리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답변>

지금까지 나타나고 있는 현상을 가지고 보면 북한이 노리는 것은 크게 두 갈래로 드러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첫 번째로는 김정일의 이미지 개선, 그리고 이를 통한 북한의 이미지 개선을 들 수 있겠지요. 북한은 이 노림수에서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물론 우스개소리이기는 하지만 남쪽에서는 김정일의 이미지가 얼마나 좋아졌는지 2002년의 남쪽 제16대 대통령선거 때 만약 김정일이 출마하면 당선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거론되기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김정일이 직접 출마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또 그가 출마할 경우 당선될 것이라는 말도 공연한 희담이겠지요. 그러나 김정일이 낯을 찡그리는, 다시 말하여 거부권을 행사하는 후보는 당선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설왕설래가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지 않습니까?


김정일의 이미지가 좋아지니까 북한의 이미지가 덩달아 개선되고 있지요. 북한은 지금 이 개선된 이미지에 편승하여 북한의 국제적 고립을 탈피할 뿐 아니라 위상을 향상시키기 위한 대대적 외교공세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서방국가들과의 수교협상이 더욱 강화되고 있고 또 국제정치 무대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북한의 배후세력으로 다시 확보하는 성과를 얻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의 보너스로 북한은 ‘아시아지역 안보포럼’(ARF)에 일거에 가입이 되었고 최근 태국수도 방콕에서 열린 ARF 외상회의에서 북한의 백남순(白南淳) 외무상은 단연 인기 스타가 되어 한국의 이정빈(李廷彬) 외교통상부장관, 일본의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외무대신, 중국의 탕자쉬안(唐家璇) 외교부장, 미국의 마들레인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등과 연쇄회담을 갖는 바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경제적 혜택일 것입니다. 이번 정상회담의 결과로 과연 어떠한 내용과 규모의 경제적 혜택이 북한의 몫이 될 것인지에 대하여 아직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이번 정상회담이 도합 6억여 달러의 현금지원을 포함하여 막대한 경제적 혜택을 북한에게 제공하게 되어 있는 금강산관광을 필두로 하는 현대그룹의 대북 경제협력 드라이브를 통해 그 정지작업이 이루어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정상회담 이후 이루어지고 있는 가시적 현상으로는 또한 우리 정부가 정상회담 이전에 지원했던 20만 톤에 이어 10만 톤의 비료를 추가로 지원하기로 결정한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이미 항간에서는 정상회담이 실현되었다는 것은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상당한 경제적 지원이 북에 제공되었거나 되기로 약속이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추측이 그럴 듯하게 인구에 회자되고 있 습니다.


그런데 이번 정상회담을 전후하여 북한이 보여주고 있는 특징은 북한의 태도에서 전례 없는 여유가 과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궁금한 것은 이 같은 여유의 출처가 어디냐는 것입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북한의 경제는 사실상 파탄상태였습니다. 1994년 김일성의 돌연한 사망도 사실은 북한의 경제난국의 실상을 뒤늦게 파악한 데서 온 충격 때문이었다는 주장이 유력하게 제시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한 북한의 경제난국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런데 어디서 생긴 여유냐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서는 저 나름의 일가견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것입니다. 북한이라고 하는 체제는 배급에 의존하는 체제입니다. 공산주의 체제의 체제논리는 “모두로부터 능력에 따라, 모두에게 필요한 만큼”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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