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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9-18 22:48:48
  • 수정 2018-09-18 22:5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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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명예회복? 주사파들이 역사를 민중사관으로만 단편적으로 이해해서 무리하게 추진
-동학잔당이 만든 일진회 활동이 오히려 ‘시민혁명’ 성격 강해. 개인과 민권 추구한 개화론자들
-의병들, 조선왕조 부활 등 성리학적 세계의 복원 원하는 복벽주의자 유생들. 민중의 외면받아


▲ 유일하게 남은 전봉준의 사진. 법무아문으로 압송되는 모습 [촬영 무라카미 텐신]


문재인 정부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후손의 명예 회복을 위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 활동을 중단 9년 만에 재개한다고 밝혔습니다.


1894년 일어난 동학혁명 참여자와 그 후손을 등재하는 사업인데 노무현 정부 시절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을 만들어 증손자까지 유족으로 등록하는 사업을 했다가 이번에는 법을 개정해 고손자까지 유족으로 등록할 수 있게 한다고 합니다.


[관련기사: ‘혁명군 후예’로 명예회복 한다며… 동학운동 후손 찾는 정부]


124년 전 사건 관련자들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사건 관련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이 사업을 재개한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듭니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해서는 이미 역사적 재평가가 일어나 말 그대로 명예 회복이 되었는데 이런 작업이 왜 필요합니까? 반란군의 자손이라고 알려져 불명예를 입었다고 한다면 그 당사자들은 다시 명예가 회복되었을 것이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이면 반란군의 후손이라고 불이익을 받았을 리 없으니 지금에 와서 굳이 정부로부터 후손임을 확인 받을 필요 없이 자기 가문이나 가족 내에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정부가 후손들에게 보상금이나 세제 혜택 등의 지원은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후손들의 등재 사업에 대해 일반 국민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쉽게 거두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사업들이 무리하게 추진되는 것은 청와대 안방을 차지한 386 주사파 그룹들이 역사를 운동사 중심의 민중사관으로만 단편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오늘의 대한민국이 민중들에 의한 변혁운동의 결과라고 우깁니다. 아프리카 이디오피아보다 못한 최빈국에서 세계 10대 무역국, GDP 12위의 나라, 2차 대전 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거의 유일한 나라가 된 것을 우리 스스로의 힘만으로, 민중들의 변혁 열망과 의지만으로 성취했다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들은 식민지근대화론을 정면으로 부정하지만, 과연 구한말의 위정자들과 성리학적 세계관에 매몰된 지도층, 당시 민중들의 의식 수준, 농경사회를 벗어나지 못한 경제 상황에서 우리 힘으로 근대화가 가능했을 것이라고 보는지 궁금합니다. 일본의 자본과 기술, 미국의 안보와 경제 지원 없이 우리의 오늘이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역사가 민중들의 변혁운동에 영향을 받고 발전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것이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넌센스이지요. 이런 운동사적 세계관이 왜 문제인지는 북한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청와대 386 주사파들의 역사관의 결과가 바로 북한입니다.


솔직히 동학농민운동은 명예 회복 정도를 넘어서 역사적 실체를 규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정도로 성역화되는 지경입니다. 지금은 오히려 객관적인 접근이 필요한 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청와대는 동학농민운동을 ‘시민혁명’이라며 후손 등록 사업을 추진한다는데, 한마디로 실소를 금할 수 없습니다. 구한말 1894년 조선은 ‘민족’이라는 개념도, 아니 ‘민족’이라는 단어조차도 소개되지 않았던 시절인데 무슨 ‘시민의식’이 형성되어 혁명을 했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청와대의 천박한 역사의식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죠.


동학 부적 그려서 가슴팍에 붙이고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라고 주문을 외우면 총알도 피해간다는 동학농민군 지도부의 말을 믿고 농기구 들고 참전했던 농민군들이 일본군 기관총에 3만6,000명 학살당한 것이 우금치 전투입니다. 그 때 죽은 일본군은 단 1명이었다고 합니다. 이게 당시 동학농민군을 이끈 전봉준과 김개남 등 농민군 지도부의 수준입니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와 2대 교주 최시형은 봉기를 만류했는데 전봉준과 김개남 세력이 무리하게 봉기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 결과는 수 만 명 민중들의 죽음, 그리고 일본이 조선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을 터 준 것입니다.


동학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서만 토벌된 것이 아닙니다. 안중근과 아버지(안태훈)도 동학당 토벌에 나섰고 한일합방 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며 자결한 황현은 매천야록에 동학농민군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안중근은 여순 감옥에서 집필한 <안응칠의 역사>라는 자서전에서도 동학당 토벌을 자랑스러워 했으며, <동양평화론>에서는 동학농민군을 서절배(鼠竊輩: 좀도둑)라고 표현할 정도로 동학농민군을 비하했습니다.


아래는 안중근이 쓴 <안응칠의 역사> 중 ‘동학당 토벌’과 관련한 글의 일부입니다(안중근은 아명이고 안응칠이 본명입니다).


1894년, 내 나이 16세에 아내 김아려에게 장가들었다. 현재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그 무렵 한국 각 지방에서는 이른바 동학당이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들은 외국인을 배척한다는 핑계로 군현을 가로질러 다니면서 관리들을 죽이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했다. 이것이 이후 우리나라를 위태롭게 한 바탕이 됐으며, 일본·청국·러시아가 우리나라에서 전쟁하게 된 원인이 됐다.


관군은 그들을 진압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청국 군인들이 들어오고 또 일본 군인들도 건너와 일본과 청국 두 나라가 서로 충돌해 마침내 큰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당시 나의 아버지는 동학당의 폭행을 견디기 어려워 동지들을 모으고, 격문을 뿌려 의병을 일으켰다. 나아가 포수들을 불러 모으고, 처자들까지 대열에 편입시켰다. 이렇게 모인 정예 병력은 70여 명이 됐으며, 이들은 청계산 속에 진을 치고 동학당에 항거했다.


[관련자료: 안응칠 역사]


동학농민운동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평가들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안중근의 글이나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실제 벌어졌던 상황이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보다는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의 합동으로 압살당한 후 남은 세력들이 만든 일진회의 활동이 오히려 ‘시민혁명’의 성격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친일=악惡이라는 잠재의식 속에서 한일관계를 바라보고 역사를 해석하는 도그마에 빠져 있습니다. 시대적 상황에 따른 평가는 사라지고 친일=惡이라는 강요된 도식화에 빠져 역사를 평가하는 잘못을 저지르지요. 독도, 위안부, 강제징용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지만, 일진회에 대해서도 우리는 반일감정에 매몰되어 실제 그들의 활동이나 추구했던 이념을 잘 살피지 못하고 있습니다.


친일의 오명만을 덮어씌우고 그들이 개인과 민권을 추구한 문명개화론자들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역사 교과서에는 말하지 않는 일진회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에 인하대 김종준 교수가 쓴 <국권상실에 대한 일진회의 인식-문명화론과 합방론의 관계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에 나온 내용의 일부를 그대로 인용하오니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일진회’와 ‘역사적 일진회’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일진회는 국권 추락의 원인을 고위 관직자들의 매관 병폐에서 찾았고, 일진회의 성립으로 이미 잃은 민권을 만회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렇게 만회한 민권을 통해서 국권을 높이는 것이 바로 문명이었다.


매관매직하는 고위 관직자들은 사욕에 빠져 보통공익을 돌아보지 않는 자들이었다. 우리 동포에게 애국성이 없는 이유는, 문벌을 숭상하고 귀천을 구별하여 민의 자유권을 박탈해 왔기 때문이다. 민권이란 수동적으로는 관리들의 탐학으로부터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동학의 후예인 진보회와 결합하는 시점에서 일진회는 지방관들의 탄압과 중앙 정부의 방조를 집중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본래 독립협회 이래 민권은 자산가층의 재산 보호를 의미하는 것이지 개화되지 못한 인민들의 정치 참여는 배제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초창기 일진회의 경우 중하층민들의 정치·경제적 권리 보호를 자처하고 이들의 욕구를 무제한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회세를 확장시켜 갔다. 이후로도 이러한 인민주의적 특징이 일진회의 성격을 규정하게 되나 한편으로 기득권층의 이해관계에 더 충실해지는 변화도 나타난다.


한말 회원수에서 최대 규모의 정치·사회 단체였던 일진회는 초창기부터 독립협회 문명화론의 계승을 주장하면서 개혁 활동을 펼쳤다. 일진회문명화론의 주된 내용은 ‘관권 저항형 민권론’이었고, 그 수단으로 동양주의를 내세웠으며, 국민의 대표인 사회를 표방하였다. 일진회는 관리들의 탐학으로부터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하는 것을 민권의 만회로 여겼고, 이를 통해 국권을 높이는 것이 문명화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점차기득권 세력화되고 정치경제적 이권 추구에 함몰되며 통감부 정책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일진회 민권론의 의미도 점차 약화되었다. 특히 합방론을 둘러싼 정국은 모든 논란을 국권의 문제로 몰아갔고 일진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일진회 합방론 찬성의 글들에서 전통적 국가론과 국수론적 언설들이 발견되며 이는 대륙낭인의 영향이기도 하다.


1909년 12월 4일 일진회의 ‘합방’ 주창은 이후 100여 년 동안 한일병합문제와 관련하여 항상 민감한 주제였다. 대체로 당대인들과 후대 연구자들은 ‘사회세력이 스스로 나서서 나라를 바치려 했다’는 자괴감 속에서 ‘매국 행위’라는 민족·국가적 관점, ‘不義한 일’이라는 도덕적 관점, ‘실효가 없을 것’이라는 정치적 관점 등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았다.


국권상실의 원인 또는 책임과 관련지어 흥미로운 것은 다음과 같은 당대인들의 반응이다. 당시 언론은 그동안 외교권, 軍警, 삼림광산, 교육권, 사법권, 정부관리 자리를 모두 일진회가 매도하였다고 주장하였고, 교육받지 못한 지방 회원이 무슨 죄가 있겠냐며 회개시키자고도 하였다. 단순화시키자면 망국의 책임은 송병준, 이용구 두 사람에게만 있을 뿐이기 때문에, 이완용 내각과 대한협회를 포함해 다른 친일 세력들에게는 면죄부가 주어진 셈이다. 적어도 1909년 12월 시점에서는 일본조차 비난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처럼 일진회 합방론을 둘러싸고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일진회 지도부에게 망국의 책임이 전가되었고, 일진회가 그러한 정치적 결말로 치닫게 된 과정이 묻히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창립 초기 일진회에 대한 상반된 像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한매일신보사장 베델은 일진회를 ‘일본의 지원을 받는 무뢰배들의 조직’으로 묘사하였으나 제국신문 등은 일진회가 내세운 민권, 개혁, 동양주의 등 문명화론의 취지를 부정하지 못했다.


‘비기득권 세력’이 주축이 된 일진회에서 주창한 민권과 개혁은 곧 인민의 생명재산 보호를 의미하였으며 그 수단으로 동양주의에 의탁하였다. 일진회의 민권론은 중하층민의 정치·경제적 권력 참여를 보장하였다는 점에서 독립협회 당시의 그것보다 진전된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일진회는 기득권 세력화되었고, 지방에서 ‘작폐자’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또한 민족 정체성을 강조하는 대한매일신보는 친일과 매국을 계속해서 연결시키고 있었으나 일진회는 끝까지 친일과 애국, 다시 말해 동양과 민족이 같이 갈 수 있다고 반박하였다. 합방론에서는 대륙낭인의 영향 아래 국수론적 어휘들을 사용하기도 했다. 일진회 정체성의 변화는 일부 유생층이 합방론에 찬성한 점에서도 확인된다. 일진회가 주창해온 내부적 평등, 개혁의 문제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일진회 말기의 합방론을 초기 문명화론과 무리하게 연결시켜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된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초기 일진회의 문명화론과 그에 기반한 실천들 속에 들어 있는 의미들이 ‘친일매국론’에 의해 계속해서 비난, 부정당했다는 점이다.


일진회 스스로도 방어적 항변과 권력 획득에만 연연했을 뿐, 당대 계몽지식인들의 그것과 구별되는 문명화론과 애국론을 창출해 사회적 공공성을 얻어나가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결국 합방론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끝이 나버렸고, 그 결과 일진회는 더욱더 치욕과 망각의 대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초기 대규모 대중 동원에서 나타난 일진회의 돌풍이 문명화론이라는 지식인들의 이론으로 무장했었다는 점, 내부적 불만을 외세와의 결탁으로 해결하려 했었다는 점 등은 분명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후 역사에서도 일정하게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관련자료: 국권상실에 대한 일진회의 인식-문명화론과 합방론의 관계를 중심으로/by 김종준 인하대 교수]


김종준의 논문에서 보듯이 초창기의 일진회는 개인에 대한 자각, 민권 운동, 이의 실현을 위해 농상공업의 발달과 문명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각종 폐단 개선을 정부에 건의하였으며, 전국 곳곳에서 연설회를 개최하고,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죠. 또한 농업의 발달을 위하여 국민농업회사를 만들었으며, 부원 개발을 위해 부원연구회를 설치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권력 획득에 연연하고 지방에서 일진회원들이 문제를 일으켰던 점, 그리고 말기에는 합방론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비판이 따라야 하겠지만, 이들이 하고자 했던 바나 초창기의 활동에 대해서는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우리 교과서나 역사학계가 일진회에 대해 친일파라는 도식적 이미지만 덧씌우고 매국의 원흉처럼 묘사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진회는 적어도 초창기(1909년까지)에는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고자 한 것이 아니라 조선을 문명화, 근대화시키기 위해 일본이라는 외세를 이용하려 했을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갑신정변의 주도세력과 비슷하지만 이들보다 더 선진적 사고를 했고 체계적인 활동을 했습니다.


저는 동학농민운동의 재평가나 명예회복은 이미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지금은 오히려 일진회에 대한 재평가가 우리 사회에서 빨리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학농민운동은 혁명으로 부르기에는 부적절한 측면이 많지만, 일진회에는 혁명적 사고와 근대적 인식이 뚜렷이 보입니다.


우리는 항상 당대의 시대상황, 당대 민중들의 요구, 당대의 사회 수준은 무시하고 그 결과만을 현재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그리고 결과에 대해 공동체(민족, 국가, 일반 대중) 전체가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집단이나 특정 인물에게 그 책임을 전부 전가함으로써 자신들의 시대적 책임을 희석시켜버리는 비겁함도 저지르지요. 이런 무책임한 역사의식의 희생자 중 하나가 일진회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역사를 단편적으로 보거나 선악 이분법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실제 역사 현장은 복잡다단하여 하나의 측면만으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많은 것이 대다수입니다.


동학농민운동이나 일진회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동학농민운동과 일진회와 관련된 사건과 인물들에 대해 대표적인 것들만 아래에 열거해 보겠습니다.


1)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안중근은 동학농민군을 서절배(쥐새끼 같은 좀도둑)라고 표현하며 아버지와 함께 토벌에 나섰지만, 동양평화론에서는 일진회와 유사한 스탠스를 취합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동학농민군의 폐해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2) 안중근 부자는 동학군을 토벌했지만, 동학에 참여해 황해도 일대에서 봉기를 일으켰던 김구를 안중근 집안에 기거시키며 목숨을 살려주기도 했죠. 김구는 상해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한 안중근의 동생인 안공근을 살해했다는 의심도 받고, 해방 후에는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의 친일 행적에 통분하며 “민족 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해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3) 안중근의 아들 안중생은 1939년 이토 히로부미의 차남 이토 분키치와 박문사(장충단 내)에서 만나 사죄하고 둘이 화해함으로써 민족 반역자로 낙인 찍혔지요.


4) 일진회는 독립협회, 대한자강회와 함께 문명개화론을 설파하며 교육사업에 힘썼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으로 일하며 전국에 5천 개의 학교를 짓고 조선의 교육에 공을 들였습니다. 이토가 학교를 세우는데 지역 유지들의 협조를 받고자 했지만, 양반들은 자신의 자식이 상놈과 같이 앉아 공부할 수 없다며 거부했습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지요.


5) 박정희의 아버지 박성빈은 혼탁한 세상에 환멸을 느껴 관직을 포기하고 성주에서 동학운동에 뛰어 들었으나 동학운동 탄압이 거세지면서 관군에 체포됐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 칠곡과 구미 등에서 세상을 등지고 지냈습니다.


6) 독립협회 회원이며 독립문 현판을 쓴 이완용과 일진회는 대립했습니다. 한일합방의 원흉인 이완용과 일진회가 이런 관계였습니다. 일진회의 수장인 이용구는 한일합방 이후 이를 후회하고 괴로워 했지요.


7) 일본에 항거해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에 대해 우리 교과서는 칭송이 자자하지만, 대부분 조선 왕조의 부활이나 성리학적 세계의 복원을 원하는 복벽주의자 유생들 중심이라 당시에 민중들의 호응을 크게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일진회는 의병투쟁이 문명개화를 달성하는데 장애가 되고 동양평화를 해친다고 인식하고 의병의 무력토벌에 가담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대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를까요? 역사는 당시를 살고 있던 사람들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관점에서 그 결과만을 비평하는 것을 경계해야 하지요. 일면만을 강조하거나 일방을 무조건 매도하는 것도 조심해야 하구요. 역사의 현장은, 우리의 실생활에는, 절대적 선도 절대적 악도 없으며, 복잡다기하고 상호 뒤엉켜 있어 쾌도난마식의 평가는 삼가야 합니다.


아래에 소설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에서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의 항변을 옮겨 봅니다.


과연 우리가 안준생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생각해 보시기 바라며, 역사와 우리의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호부견자라더군요. 호랑이 아비에 개 같은 자식. 하하..
그럼 나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그 자리에서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고 잡혀 죽었어야 했나요?
영웅 아버지처럼 위대하고 영광스럽게?
사실 아버지는 재판도 받고 가시는 날까지 시끌벅적 하기라도 했지만, 나는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그야말로 개죽음 아니었을까요?
내 형은 7살 나이에 자기가 왜 당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독을 먹고 죽어버렸죠.
나도 그렇게 죽으란 말입니까?
아무도 기억 못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런 죽음을, 왜?
내가 안중근의 아들이어서?
왜 나는 안준생으로 살 수 없었죠?
왜 나는 내 삶을 선택할 기회도 없이 이런 운명에 던져져야 했죠?
아버지는… 아버지는 자신이 선택한 거잖아요.
그래서 죽은 거잖아요.
그런데 왜 나는 내 선택이 아닌 아버지의 선택 때문에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까?
왜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아버지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통째로 망가져야 합니까?
나라를 팔고 아비를 판 더러운 자식…
친일파…
변절자…
뭐라 욕해도 상관없어요.
내가 괴로워 할 때 아무도 내게 손 내밀지 않았잖아요.
나를 욕할 자격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구요.
그렇게 버려둘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무슨 권리로…
내 아들은 의사입니다.
미국에서 제법 성공했고, 주위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잘 살고 있죠.
내가 사람들의 경멸을 받으며 모은 돈으로 가족들을 부양한 덕분에 내 자식들은 사람답게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습지 않나요?
영웅의 아들은 개 같은 삶을 살고, 그 변절자의 자식은 다시 성공하고..
아버지는 나라의 영웅이었지만 가족에겐 재앙이었죠.
나는 나라의 재앙이지만 내 가족에겐 영웅입니다.“



[참고자료: 정부의 동학농민혁명 후손 등록 사업에 대한 박성현의 일갈]


[참고자료: 정부의 동학농민혁명 후손 등록 사업을 비판하는 김용삼 칼럼]


[참고자료: 박정희 아버지, 박성빈의 생애]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의 일부>
“지난날(甲午年 :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을 보더라도 그때 조선국의 서절배(鼠竊輩: 좀도둑) 동학당(東學黨)이 소요를 일으킴으로 인해서 청 · 일 양국이 함께 병력을 동원해 건너와서 무단히 전쟁을 일으켜 서로 충돌한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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