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日 국채' 신화가 흔들린다, “초유의 사태”]
미 국채와 함께 세계 최고의 안전 자산으로 꼽혔던 일본 국채 인기가 한없이 추락하면서 일본 경제에 비상이 걸렸다. 이는 한마디로 일본의 국채를 사려는 투자자들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생긴 일인데 ‘잃어버린 30년’으로 불리는 장기 불황 속에서도 일본 정부의 든든한 자금줄 역할을 해왔던 일본 국채 신화가 깨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이와 함께 미국의 30년물 국채 금리도 '심리적 저항선'인 5%를 넘어섰다는 점에서 요동치는 국채 시장의 흐름에 눈길이 쏠린다.
일본의 니혼게이자이신문(日本經濟新聞)은 21일, “일본 국채 가격 하락세가 이어지면서 한때 일본의 30년물 국채 금리는 3.185%를 기록했으며, 40년물 금리도 3.635%를 찍으면서 나란히 장기 국채 금리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면서 “하루 전 실시된 20년물 국채 입찰이 부진하자 수급 악화 우려가 부각되면서 채권 매도 압력으로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고 보도했다.
니혼게이자이는 이어 “이번 입찰에서 국채 수요를 보여주는 평균 낙찰가와 최저 낙찰가 차이는 1.14엔을 기록해, 1987년 이후 38년 만에 최대로 벌어졌다”면서 “재정 불안 등을 배경으로 투자자들은 적극적인 매입을 꺼리는 모습이 뚜렷했다”고 짚었다.
문제는 일본 국채의 약세는 엔화 가치도 끌어내릴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글로벌 금융시장에서는 “엔화를 팔고 안전한 스위스 프랑으로 갈아타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상횡이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번진 것은 지난 20일 진행된 20년물 국채 입찰에서 경쟁률이 2.5배로 2012년 8월 이후 13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면서 부터다. 그때부터 일본 안팎에서는 ‘38년 만에 최악의 국채 파동’이라는 분석이 곧바로 터져 나왔다.
[정치권의 선심성 포퓰리즘 공약이 국가부채 폭증 불러]
이에 대해 경제 전문가들은 일본의 막대한 국가 부채 비율과 선거를 앞두고 나오는 선심성 감세 공약 등이 직접적 원인이 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일본이 세계 최악의 부채국임에도 불구하고 채권을 찍어 감세 재원을 충당한다면 채권 가격은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국채 금리를 밀어올렸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6월 도쿄도 의회 선거와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다. 선거를 앞두고 소비세 인하를 둘러싼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재정 팽창이 더 심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퍼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블룸버그는 UBS의 제임스 말컴 전략가의 말을 인용해 “장기 국채에서 매수자 파업이 벌어지고 있다”면서, “불안한 정치 상황 속에 재정 지출 확대 압력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국가 재정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포퓰리즘 공약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 지금의 사태를 불렀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7월20일께 치러질 것으로 예상되는 참의원(상원)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에서 소비세 감세 논의가 이뤄지는 데다 미국으로부터 방위비 증액 요구도 받고 있어 재정 상황이 악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이렇게 정치권에서의 포풀리즘 열풍은 현재 일본의 국가채무 비율을 더욱 늘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 국채, 일본은행마저 손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
문제는 이런 상황이라면 과거같으면 일본은행(BOJ)이 국채를 매입하면서 시장을 안정시켰을텐데 일본은행도 지난해부터 ‘테이퍼링(자산 매입 축소)’에 들어간 상태라 여력이 없다. 실제로 일본은행은 지난해 8월부터 국채 매입 규모를 매 분기 4000억엔씩 줄이기 시작했고, 오는 6월 열리는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내년 이후에도 축소 기조를 이어갈지 결정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노린추킨자산운용의 나가토모 류마 펀드매니저는 “초장기 국채를 건드리고 싶지 않다”면서 “재정 확장 리스크가 여전한 상황에서 시장 분위기가 개선되려면 당국(일본은행)의 개입밖에 방법이 없다”고 말했지만 이러한 주장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이에 대해 오카산증권의 하세가와 나오야 채권 전략가는 보고서에서 “시장 기능이 저하되는 상황에서 일본은행이 테이퍼링(국채 매입 감액) 계획을 수정하지 않으면 일본은행이 시장 상황에 관계없이 감액을 지속할 것이란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고 일본은행의 공백을 민간에서 메꿔줄 상황도 안된다. 실제적으로 일본내에서 가장 큰 손으로 꼽히는 대형 생명보험사들이 이렇다 할 매수 의지를 전혀 보이고 있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발 관세 전쟁 등으로 금융시장이 심한 변동성을 보이고 있어서다.
이에 대해 블룸버그통신은 “투자자들이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불확실성과 마주하고 있다”며 “일본의 초장기 국채는 국내 투자자들의 사실상 ‘매수 거부’ 사태를 겪고 있다”고 분석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도 21일 “국채금리 급등 배경에 재정 팽창에 대한 우려가 있다”면서 “일본도 이제 금리가 존재하는 세계가 되어 채권시장이 일본은행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일본에서 정치권을 중심으로 재원 대책 없는 감세 등의 포퓰리즘 공약이 나오자 채권시장이 강력한 경고음을 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향후 적자 국채 발행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한 채권 투자자들이 대표적 안전자산인 일본 국채를 외면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결국 지금의 흐름은 반시장 정책에 채권 투매로 대응하는, 일본판 ‘채권자경단’의 경고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에 당혹감을 느낀 정치권도 국채를 발행해 감세 재원을 마련한다면 지금의 사태를 어느 정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지만, 이에 대해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지난 19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일본의 재정 상황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극도로 열악하다”면서 “실제로 그리스보다 더 심각하다. “금리가 있는 세계의 무서움을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한마디로 국채를 발행해 감세 재원을 마련하자는 주장에 대해 분명한 반대 의지를 밝힌 것이다.
실제로 일본 여야는 선거를 두 달 앞두고 앞다퉈 소비세 감세를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 일본은 한국의 부가가치세 같은 소비세(10%)를 거두는데, 식료품에 한해 8%의 ‘경감 세율’을 적용하고 있다. 식료품 가격 급등으로 서민 부담이 커진 만큼 이를 최대 0%로 낮추자는 게 정치권 주장이다. 재무성은 식료품 소비세율을 0%로 낮추면 중앙·지방 합계 연간 5조엔가량 세수가 줄어들 것으로 추산했다.
일본 정부 세수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소비세는 사회보장제도를 지탱하는 핵심 재원이다. 대체 재원을 짜내지 못하면 적자 국채를 더 찍어 메울 수밖에 없다. 문제는 소비세를 내리면 다시 올리기 어렵다는 점이다. 당연히 정부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세율을 원래대로 되돌리면 증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올해만 해도 20조엔가량의 적자 국채를 발행해야 한다. 올해 국채 상환과 이자 지급에 충당하는 국채 비용으로만 28조엔가량을 써야 하는 처지다. 앞서 오랜 기간 정치권이 돈을 푼 대가를 지금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집계에 따르면, 일본은 2023년 말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부채 규모가 249.7%로 세계 1위를 달린다. 2위인 그리스(부채 비율 168.9%)와 격차도 크다.
[엔화도 위험? 안전자산인 스위스 프랑에 몰리는 선물시장]
이렇게 일본의 초장기 국채 쇼크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이러한 상황이 외환시장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게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로 니혼게이자이신문은 “20년물 국채 입찰의 충격은 해외의 외환 선물 시장에도 미쳤다”며 “투기 자본들이 엔화 매수 포지션을 재검토하고 스위스 프랑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마디로 일본 국채가 불안해진 만큼, 헤지펀드와 같은 투기 자본들이 엔화의 안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탈출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JP모건은 최근 “기존에 추천했던 ‘스위스 프랑 매도, 엔화 매수 포지션’의 해소를 권고한다”며 “엔화에도 상당한 리스크가 존재하니, 이젠 스위스 프랑의 안정성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냈다. 이렇게 글로벌 투자자들이 한꺼번에 엔화를 팔고 스위스 프랑으로 넘어가게 된다면 당연히 일본 엔화의 위험성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요동치는 미국·일본 국채 시장…국가부채 '공포']
일본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미국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의 30년물 국채 금리는 '심리적 저항선'인 5%를 넘어섰고, 일각에서는 글로벌 국채 시장의 벤치마크인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도 5%에 이를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보고 있다. 영국·독일 등의 장기물 국채 금리도 상승세다.
미국의 국채 시장 문제는 미국의 관세 정책에 따른 불확실성 속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밀어붙이고 있는 대규모 감세 법안이 시장 불안을 키웠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에 대해 미 의회 합동조세위원회(KCT)는 “감세 법안 통과 시 10년간 재정적자가 2조5천억달러(약 3천440조원) 이상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신용평가사 무디스도 지난 16일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을 최고 등급에서 한 단계 내리면서 재정적자가 확대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국채발행이 불가피하고, 국채 공급 증가는 국채 가격 하락(=국채 금리 상승)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시장 불확실성 속에 투자자들은 장기채 투자에 더 많은 수익률을 요구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에 대해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재무장관을 지낸 스티븐 므누신은 이날 “무역적자보다 재정적자가 더 우려된다”면서 “지출 삭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골드만삭스·JP모건 등도 장기물 국채 금리 전망치를 올렸다.
결국은 재정건전성이다. 이를 무시하는 국가라면 당연히 시장에 불안감을 키우게 될 것이고 그러한 상황이 시장에 공포를 몰고온다는 것이다. 선거를 앞둔 대한민국도 바로 이 점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중국 푸단대학교 한국연구원 객좌교수
-전 EDUIN News 대표
-전 OUR NEWS 대표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기획팀장
-전 대통령실 홍보기획비서관
-사단법인 한국가정상담연구소 이사장
-저서: 북한급변사태와 한반도통일, 2012 다시우파다, 선거마케팅, 한국의 정치광고, 국회의원 선거매뉴얼 등 50여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