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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8-16 03:50:07
  • 수정 2018-08-16 03:5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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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건국설 주장하면 북한과의 정통성 경쟁 피한다? 1948년 건국설은 친일파 옹호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과 주미 외교위원장을 지내. 부통령 이시영은 신흥무관학교 교장
-북한은 임시정부 부정.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분들 숙청하고 스스로 임시정부 흔적들도 지워


▲ 대한민국임시정부 3년 임시정부의정원 기념촬영


우리나라는 건국시점이 1919년이냐 1948년이냐를 놓고 대립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내년이 건국 100주년이라고 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올해가 건국 70주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상대의 주장을 깎아 내리려고 한다.


1919년을 건국으로 주장하면 북한과의 정통성 경쟁을 피한다고 비난하고, 1948년을 건국이라고 주장하면 친일파들의 친일행위를 덮으려고 한다면서 비난한다. 참으로 개탄스런 일이다. 심지어 대통령마저 한쪽 편에 가세하고 있는 어이없는 상황이다. 이럴 때일수록 필요한 것이 화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1948년을 건국이라고 주장하면 친일세력의 과오를 덮게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친일파들의 건국은 자신들의 과거를 없애기 위한 꼼수라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국가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 경험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일제시대 때 일했던 사람들을 그대로 기용한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모든 직책에 해당되는 현상은 아니다.


분명 독립운동가들이 우리나라 초대 내각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만드신 분도 있었다. 그리고 과거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도 초대 내각에 있었다.


초대 대통령 되시는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 대통령과 주미외교위원장을 지낸 분이다. 부통령 되시는 성재 이시영 선생은 신흥무관학교 교장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청산리, 봉오동 대첩에 참여했던 독립군과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의 인재를 양성했다. 또한 임시정부의 재무총장과 법무총장, 감찰위원장을 지냈다.


국무총리를 지낸 이범석 장군은 청산리 대첩에 참여했고 광복군 참모장이었다. 국회의장의 신익희선생은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이었다. 그리고 정부와 여당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무임소장관에는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이었다.


외무부장관 장택상과 내무부장관 윤치영은 청구구락부 사건과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총독부 일본경찰에게 고문을 당했다. 청구구락부와 흥업구락부는 일제에 타협적인 자치운동에 대항하고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 박사를 돕던 독립운동단체였다.


심지어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전향한 조봉암은 농림부장관이 되었다. 그리고 농지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임시정부 건국강령의 핵심가치인 삼균주의 설계자이면서 외무부장을 지낸 조소앙 선생은 비록 내각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1949년에 사회당을 창당하였다. 사회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은 창당식에 와서 축사를 해주었다.


이렇듯 우리의 정부수립에 친일파들이 정권을 잡고 휘두른 것이 아니다. 임시정부에 참여하셨던 어른들도 정부수립에 참여하였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다. 그리고 비록 전향은 했다지만 공산주의 경력이 있는 사람도 내각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였고 사민주의 정당의 중요성을 대통령부터 강조하였다. 즉 다양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부분만을 보고 난 뒤 1948년 건국설이 친일행위를 덮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침소봉대하는 것이다.


1919년 건국설이 북한과의 정통성 경쟁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북한정권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이를 이용하여 북한과 우리 대한민국이 임시정부라는 같은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위에 있는 정통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북한에게 똑 같은 자격조건을 가지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북한이 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전제 하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있다. 북한의 역사책인 조선전사 15권에는 “실로 상해임시정부 안의 사대매국노들이 한 일이란 이른바 정부를 차려놓고 애국동포들로부터 운동자금이나 걷어들여 탕진하며 강대국들에 대한 청원운동이나 하고 서로 물고 뜯고 하는 파벌싸움이나 일삼아온 데 지나지 않았다.”라고 했다.


또 다른 역사책인 조선력사에서는 “해외에 있던 부르죠아민족운동의 상층부들은 1919년 4월에 중국 상해에서 이른바 《림시정부》라는 것을 꾸며내고 그 안에서 《자치파》니, 《독립파》니 하는 파벌을 이루고 권력싸움을 벌리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임시정부에 참여했다가 북한정권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했다. 의열단 단장이면서 임시정부의 광복군 부사령관을 지낸 약산 김원봉은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북한 내각의 감찰, 감사 업무를 담당하는 국가겸열상을 맡았다.


임시정부의 국회인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낸 백연 김두봉은 북한의 명목상 국가수반인 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김일성의 연안파 숙청 작업 때 두 사람 모두 제거 당했다. 김원봉, 김두봉은 연안파 소속이었다. 숙청한 이유는 김일성에게 비판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58년에 김일성은 김원봉을 국민당의 사주를 받은 종파주의자로 몰아붙여서 옥살이를 시켰다. 그 후 김원봉은 옥중에서 청산가리를 입에 털어놓고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김두봉은 고령이라는 이유로 사형은 모면하였으나, 평안남도 순안군 산골 오지의 한 지방협동농장으로 끌려가 중노동을 강요당하며 농사일을 하다가 1961년 전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듯 북한은 임시정부와 관련된 것을 부정하고 있으며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분들 숙청시키면서 그들 스스로 임시정부의 흔적을 모두 지워버렸다. 그러므로 우리가 1919년을 건국으로 한다고 해서 북한과의 정통성 경쟁을 피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북한에 비해 더욱더 정통성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결과가 된다.


우리나라는 건국 문제를 놓고 많은 갈등이 있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서로에게 비난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럴 때일수록 화합을 이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을 제1의 건국이라고 하고 1948년 정부수립을 제2의 건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1919년을 정신적 건국 1948년을 실질적 건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임시정부 수립과 정부수립을 모두 포괄하여 건국이라고 하는 것도 의미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지금과 같이 어느 한쪽 편을 들어서 다른 한쪽을 소외 시키는 것을 어리석은 짓이다.


맑은 날 흰구름이든 흐린 날 먹구름이든 비 오는 날 천둥번개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넓고 넓은 하늘이 되어야지 고작 구름의 일 부분만 비춰 주는 작은 물웅덩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덧붙이는 글]
[제3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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