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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후반 구미정상회담에서 6.12 미북회담 교훈을 얻어야 - 구미정상회담, 냉전종식-통독-EU 새 국제질서 수립 성공의 교훈 - 북핵 CVID와 개혁개방으로 한반도의 새 질서구축에 성공해야
  • 기사등록 2018-06-03 20: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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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이목이 싱가포르 미북정상회담에 집중되고 있다.
세계평화를 위한 최후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회담본질은 북한 핵미사일을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 비핵화(CVID)의 실현”이다.
북의 공산세습왕조에 대한 ‘체제의 정상화’도 기대를 모은다.

김정은이 핵무장을 체제유지용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20세기 후반 자유-공산진영의 정상회담들이 무수히 열려 자유민주진영의 승리를 거둔 중대한 교훈을 남겼다.



▲ 1990년 10월 파리에서 열린 CSCE 정상회담 [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 France]


1975년8월 헬싱키의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정상회담을 필두로 구미정상회담은 1990년10월 파리의 CSCE정상회담에서 마무리되었다.
소련의 세계공산주의와 구미의 자유민주주의간 이념대결이 원인이었다.


1989년11월 9일 베를린장벽붕괴를 계기로,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수의 공산당해산으로 이념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한반도는 예외였다.
북한의 핵미사일도발이 원인이다.


미북싱가포르 정상회담은 북핵문제에 대한 국제사회 최후의 외교안보적 대응이다.
1994년 우크라이나 핵문제까지 많은 정상회담들을 필자의 취재와 연구를 통해 재조명한다.


[동서독 평화공존 전주곡과 동서독 6차 정상회담 끝에 통일성공]


유럽에서 긴장완화를 위한 정상회담은 1975년 헬싱키의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정상회담에서 시작되었다.
다만 1970년대 초반 동서독정상회담이 해빙의 전주곡을 울렸다.


서독의 빌리 브란트총리가 1970년3월19일 동방외교를 선언하고 동서독정상회담을 했다.
브란트의 폭탄선언‘은 동서독의 데탕트가 목적이었다.


서독이 유일합법정부 주장인 할슈타인정책을 폐기하고 동독을 동등한 정상국가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서독은 바이마르공화국 옛 법통을 적용해 동독의 지위를 1개주로 보고, 소련군의 점령지역으로 취급했었다.


브란트는 슈토프총리와 정상회담에 성공했다.
그는 “양독 관계수립문제를 토의하고 민족의 분단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마련을 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동독땅 에어푸르트 중앙역에 도착해 슈토프의 간소한 영접을 받고 회담에 들어갔다.
역 앞에는 많은 동독시민들이 ”빌리!“를 연호하며 서독총리를 환영했다.


동독의 제안은 다음과 같다.
1. 동서독간 동둥한 관계설정,
2. 동독의 대외관계에 대한 서독의 할슈타인원칙의 포기,
3. 양측 주권의 상호승인, 국경의 불가침보장, 무력사용포기,
4. 양독의 동시 유엔가입,
5. 핵무기와 생화학무기의 생산 사용 보유의 포기 등이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 전까지 양독정상회담은 4차례 열렸다.
베를린 장벽 붕괴 후 서독 콜총리가 1989년 12월 9일 동독 드레스덴과 1990년 1월 15일 서독 본에서 모드로프 총리와 회담을 가졌다.


서독의 동방정책은 거대한 대변동의 전주곡이었다.
동서독은 6차회담 후 통일에 성공했다.


[1975년 8월 CSCE 정상회담, 헬싱키 헌장으로 동서 평화공존 시대 낳다]


동서독의 데탕트는 동서유럽의 평화공존을 촉진했다.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수는 동구의 자유주의운동에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탱크부대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1946년 동베를린 노동자폭동, 1956년 헝가리의 자유운동,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은 모두 좌절되었다.


런던 파리 로마등 서구여론이 “NATO가 군사개입으로 ‘프라하의 봄’을 살려내라”는 요구해 긴장이 고조되었다.


1975년 3월 소련이 유럽안보협력기구(CSCE) 정상회담을 제의했다.
동서진영의 경계선이 2차대전 종전시 얄타회담이 그은 임시분단선을 공식국경선으로 만들기 위한 소련의 회담제의였다.


자유진영에서 포드 미대통령, 지스카르 프랑스대통령, 영국 대처총리, 서독 슈미트총리, 공산진영에서 소련공산당서기장 브레즈네프, 동독 호네커 공산당수,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대통령, 폴란드의 야루젤스키 대통령등 동서정상 27명의 대규모 정상회담이었다.


CSCE는 첫째 공산진영의 동서유럽의 국경선문제, 둘째 서방진영의 공산권 인권문제 셋째 상호 경제와 인적교류 문제등 바구니 3개를 토의했다.


▲ ▲ 헬싱키헌장 1975 [WT DB]


1975년 8월 15일 3개의 바구니를 모두 채택해 역사적 헬싱키헌장이 태어났던 것이다.


헌장서명식에 기자들도 참관했는데, 공산진영 정상들이 희색이 만면한 반면 서방 정상들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동서유럽 분계선이 정식 국경선으로 인정됨으로서, 제2의 ‘프라하의 봄’이 폭발해도 나토의 군사개입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공산진영의 승리로 평가되었다.


서방정상들은 기자회견에서 비판을 받았다.

유럽국경선은 ‘소련군 점령지역’이라는 ‘철의 장막’을 공인했다는 것이다.


헬싱키선언은 “무력에 의해 국경선을 절대로 변경할 수 없다”고 규정해 공산진영의 영토주권을 보장했다.
이 때문에 서방정상들은 “자유진영의 패배”라는 비판을 감수했다.


그러나 헬싱키선언은 그후 ‘철의 장막’안에 인권과 시장경제 바람을 불어넣었다.
서방 NGO가 인적교류를 이용해 ‘철의 장막’속에 반체제운동을 확산시켰다.


1977년 체코의 극작가 하벨등 지식인들이 ‘77 선언’을 했고, 1980년대 그단스크 조선소에서 바웬사의 자유노조운동이 터져 동구를 진동시켰고, 소련원자폭탄의 아버지 사하로프가 인권운동의 선봉에 서자 소련마저 흔들렸던 것이다.


그래서 1985년 고르바초프 공산당총수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과 글라스노스트(개방)가 등장했다.
헬싱키헌장이 공산진영을 허물고 있었다.


고르바초프 자신이 페레스트로이카의 기수가 되어 공산진영에 자유바람을 일으켰다.
1989년 여름 “여행의 자유”를 부르짖으면서 동독에서 탈출을 시작한 동독시민이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선을 ‘게르만 엑서더스’로 확산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헬싱키선언은 공산진영의 인권문제, 시장경제, ‘여행의 자유’를 위한 시민봉기, 베를린장벽붕괴의 시한폭탄으로 작용했다.


[동구체제 이행 준비한 1989 파리 G7 정상회담, 통독 비준한 유럽정상회담]


1989년7월초 고르바초프-미테랑 정상회담이 파리에서 열렸다.
미테랑은 7월 14일 프랑스혁명 200주년기념식과 15일 G7 정상회담을 주최했다.


고르바초프는 소르본 대학에서 유럽지성들과 토론회를 열고 개혁개방을 역설했다.
그는 “의회민주주의를 수용하는가?”라는 질문에 “바람직한 길”이라고 찬성했다.


고르비는 미테랑에게 G7회담의 ‘티타임’ 참여와 G7에게 1천억 달러 차관을 요청했다.
이는 소련주민의 민생문제 해결을 위한 필수자금이라 강조하면서 “소련제국이 소리없이 붕괴하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미테랑은 G7회의에서 “소련이 시장개방 용의”를 표명한 고르비의 G7에 보낸 메시지’를 낭독했다.
타스통신 기자가 전문공개를 요청하자 ‘이번 G7회담에서 이 메시지에 관한 토의를 했으며, 결과를 종합해 회신하기로 했다“고 미테랑이 답했다.


G7이 고르비의 1천억 차관문제를 협의했으나 ”긍정적 답을 얻지 못했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미테랑은 G7정상회담에서 1000억 달러를 모금해 공산권경제지원을 위한 동구개발은행(EBRD)창설에 합의했던 것이다.


미테랑은 외교경제특보 자크 아탈리를 런던의 EBRD 초대총리로 임명, 공산권 시장경제이행에 큰 기여를 했다.


1989년 파리의 G7정상회담은 사실상 수개월 후 베를린장벽붕괴를 사전 준비했으며, 1천억달러는 EBRD를 통해 소련등 동구의 시장경제이행에 효과적으로 사용되어 공산주의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어서 폭발한 1989년11월9일 베를린장벽붕괴는 20세기의 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장벽붕괴 후 곧 바로 독일통일로 직행한 것은 아니었다.
12월 9일 미테랑주도 스트라스부르의 유럽정상회담에서 통독비준여부를 협의했다.


독일은 2차 대전패전국으로 미영불소 4강대국의 점령상태였고, 수도 베를린은 4강대국 공동관리구역이었다.
동독에는 소련군 38만명이 주둔했고, 서독은 미영불 3국의 28만명 군사점령상태였다.


또 유럽은 나치독일의 점령피해국들이었다.
그래서 유럽정상회담의 통독의 비준은 근본문제가 되었다.


콜이 미테랑을 찾아와 통독문제비준을 간청하자, 미테랑이 전제조건을 제시했다.
1) 통독지위는 유럽연합(EU)와 북대서양동맹(NATO)의 영원한 회원국이어야 하며,
2) 통독의 동부국경선은 오데르-나이세선,
3) 통독은 핵개발, 핵보유 핵보관 모두 할 수 없다는 3개 조항이었다.
콜은 수락했고, 미테랑은 대처등 비준반대정상들을 설득했다.


유럽정상회담은 만장일치로 통독을 비준했다.
유럽의 비준 후, 12월말, 미국 아버지 부시 대통령과 고르비 소련 대통령이 지중해의 몰타 해상정상회담에서 “이제 미소는 적이 아니며 냉전은 끝났다”고 냉전종식을 선언했다.


[고르비의 통독청신호 동독-소련정상회담, 동독총선 확정한 동서독 정상회담]


1990년 1월 모드로프 동독총리는 모스크바에서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을 했다.
고르비는 “유럽에서 이념에 대한 분단을 근본적으로 종식시켜야 한다”고 밝혀 통독에 찬성했다.


모드로프는 콜과 정상회담에서 100억 마르크 긴급원조를 요구했으며, 콜은 3월 동독 총선실시 조건을 제시했다.
양독정상은 1990년3월18일 동독 최초의 총선거실시를 결정했다.


서독의 상호주의정책이 동독총선거를 앞당겨 실시하게 한 것이다.
동독총선은 통일방식이 쟁점이었다.


우파 기민당은 기본법 23조, 사민당은 146조에 의한 통일공약을 정했다.
23조는 지방정부의 요청으로 서독이 즉각 흡수통일 할 수 있으며, 146조는 동서독합동의회가 소집되어 통일을 규정할 신헌법을 제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동독총선에서 기민당의 콜총리와 사민당이 통일방식으로 격돌했다.
선거결과는 콜의 대승이었다.
23조에 의한 흡수통일에 동독유권자가 몰표를 던진 것이다.


1990년7월1일 양독은 경제통화통합을 단행, 경제통일에 성공했다.
그리하여 유럽대륙에 하나의 대독일이 등장했다.


“하늘이 천재일우(千載一遇)의 통독기회를 주셨다. 이를 잡지 않으면 통일은 없다”는 콜의 말대로 “하늘이 준 기적”을 받아 장벽붕괴 329일만에 통일독일에 성공했다.


12월3일 대독일이 등장했고, ‘통일의 아버지’ 콜이 첫 통독 총리가 되었다.


[1990.11.21. CSCE 정상회담의 ‘파리헌장. ’모든 가맹국 유일한 정치체제는 민주주의‘]


1990년11월21일 파리에서 CSCE정상회담이 열려 통독과 유럽대변동을 마무리했다.
미국의 부시, 고르바초프, 미테랑, 콜, 메이저 영국총리와 하벨등 34명의 좌우의 모든 구미정상이 ‘파리헌장’에 서명했다.


CSCE정상회담은 동서공존을 규정한 헬싱키헌장 후 16년만에 냉전종식, 통독, 공산주의 멸망, 자유민주주-시장경제를 새로운 세계질서로 규정한 파리헌장을 채택했다.


“유럽에서 대결과 분열의 시대는 끝났다. 우리는 인류의 희망과 기대, 즉 인권, 기본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를 통한 번영과 사회정의를 실현한다. 우리는 모든 가맹국의 유일한 정치체제로 민주주의를 확고히 강화할 것이다“고 파리헌장은 밝혔다.


국제사회는 냉전시대의 헬싱키헌장을 자유민주주의에 유일한 정치적 정통성을 부여한 파리헌장으로 대체하여 21세기 국제질서의 법제화-제도화의 길을 열었다.


파리헌장이 자유민주-시장경제를 세계유일의 보편적 진리로 규정함으로서 오늘 유엔과 나토, 유럽연합(EU)등의 민주주의-시장경제의 세계화가 이루어졌다.
마지막 남은 문제가 우크라이나의 핵미사일 폐기 문제였다.


소련의 공화국이었던 우크라이나에 대규모 핵미사일을 배치되었고, 소련해체로 세계 3위의 핵강대국이었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독립했을 때 구소련 전술핵무기 2650-4200기가 배치된 상태였다.


핵탄두를 장착한 SS-24 ICBM 46기, 각각 6개의 핵탄두를 장착한 130개의 SS-19 ICBM과 핵잠수함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미국과 나토, 유럽연합의 폐기압력을 받은 우크라이나는 클린턴 미대통령과 보리스 엘친 러시아대통령과 핵폐기 문제를 협상해 1994년 1월 24일, 모스크바에서 우크라이나 핵을 러시아에 이전 또는 완전 폐기하는 선언문에 서명했다.


우크라이나 핵문제는 CVID로 완전 폐기된 선례이다.


6.12 미북 싱가포르 정상회담은 북한이라는 냉전의 마지막 꼬리를 잘라버림으로서 한반도가 국제질서 진입에 성공한다면 지구촌 대경사로 칭송될 것이다.


그래서 세계가 싱가포르 회담 성공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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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섭일 논설위원 주섭일 논설위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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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학 박사
    전 중앙일보 파리특파원-국제문제대기자

    저서: 사회민주주의의 길(사회와 연대, 2008) 등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사회와 연대, 2017)
    특파원이 추적힌 북한 핵(사회와 연대, 2016)
    한반도 통일대박과 1990 독일통일 (사회와 연대, 2014)
    북의 3대 세습과 평양의 봄(사회와 연대, 2011)
    정치변화와 사회민주주의 (사회와 연대, 2002)
    김정일과 부시의 대타협(두리미디어, 2008)
    새정치와 이원적 민주주의 (사회와 연대, 2012)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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