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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08-09 23: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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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親舊)라는 뜻은 “친(親)하게 예전부터(舊) 사귄 사람”이다. 전에 어린이들이 늘 사용하던 순수 우리말인 “동무”라는 단어가 본래부터 한국 전 지역에서 친구라는 뜻으로 쓰이던 말이었다. 그러나 북한에서 “혁명을 위해 함께 싸우는 사람”의 뜻으로 사용하게 되자, 대한민국의 사회에서 “동무”라는 단어는 거의 죽은 말이 되었고, “친구”로 바뀌게 되었다.


한자어 “친(親)”자에 대해 예부터 전해져 오는 말이 있다. 어떤 마을에 어머니와 아들이 살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볼일이 있어서 멀리 떠나게 되었다. 당일 저녁 5시까지 돌아온다고 말하고 길을 떠났는데, 5시가 지나고 6시가 돼도 기다리는 아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어머니는 걱정이 태산이다. 불안과 걱정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마을 앞으로 나갔다. 그래도 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멀리 바라보기 위해서는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 했다.


어머니는 큰 나무에 올라가 아들이 오기를 눈이 빠지게 바라보고 있다. 그 정성스런 광경을 글자로 표현한 것이 친(親)이라는 글자다. 높은 나무(木) 위까지 올라 서(立) 돌아오기만을 바라보고(見)있다. 이런 세 낱말을 합쳐서 친(親)자가 되었다고 한다. 높은 나뭇가지 위에 올라가 아들 오기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지극한 마음, 그것이 친(親)의 의미로, “친할 친”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래 뜻은 “어버이 친”자다.


예로부터 한 사람의 미래를 알고 싶으면 사귀고 있는 친구(親舊)들을 보라고 했다. 중국의 남북조 시대의 역사서 남사(南史)에 보면 송계아(宋季雅)라는 고위급 관리가 퇴직한 후에 살게 될 집으로 천백만금(千百萬金)을 주고 여승진(呂僧珍) 이웃집을 샀는데, 백만금밖에 되지 않는 집을 그리 비싸게 샀다는 말을 들은 여승진이 그 이유를 물었다.


이러한 물음에 송계아의 대답은 간단했다. 백만금은 집값으로 지불하였고(百萬買宅), 천만금은 당신과 이웃이 되기 위한 프리미엄으로 지불했다(千萬買隣)는 대답이었다. 옛말에 꽃향기는 백리를 가고(花香百里), 술 향기는 천리를 간다(酒香千里)고 했다. 그리고 사람의 향기는 만 리를 간다(人香萬里)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친구가 그 정도로 중요하다는 의미다. 친구라고 다 친구가 아니다. “세 명의 친구만 있어도 그는 성공한 인생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정말로 살아가다 보면 진실한 친구 한 명도 갖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불행은 누가 친구가 아닌지를 보여준다”고 했고, 인디언은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를 친구라 했다. 질풍지경초(疾风知劲草)라 하는 말과 같이 어렵고 위험한 처지를 겪어보아야만 인생의 진가를 알 수 있다. 급난지붕일개무(急難之朋一個無)라는 말도 있다. 술 먹고 밥 먹을 때는 형님 동생하는 친구가 천 명이나 있지만, 급하거나 어려울 때는 막상 나를 도와주려는 친구는 한 명도 없다는 말이다.


동양에서 친구 관계를 설명하는 유명한 이야기 중에서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우정 이야기가 있다. 기원전 7세기에 중국의 춘추시절에 있었던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의 우정 이야기다. 이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서로 깊게 이해하고 믿으면서 절친한 친구로 지냈었다.


동업을 할 때에도 가정 사정이 다소 부유했던 포숙아(포숙)가 출자금을 더 많이 출자했지만 이익금은 항상 동등하게 분배했고, 관중이 3차례나 관직에 올랐다가 매번 파직 당해도 포숙은 관중의 무능을 탓하기보다는 사람들이 아직 그 능력을 알아주지 못해서 그러니 절대 실망할 필요가 없다고 위안을 했다. 그 당시에 제(齊) 나라의 국정이 혼란한 시기여서 왕자들은 잠시 화를 면하려고 이웃 나라로 피신해 기회를 보고 있었다.


이 때에 관중은 노(鲁)에 거주하던 둘째 왕자 규(纠)를 보좌하게 됐고, 포숙아는 셋째 왕자인 소백(小白)을 보좌하게 됐다. 그런 후 규의 군대와 소백의 군대가 전투를 하게 됐는데, 관중이 소백을 향해 활을 쏘았는데 다행스럽게 소백의 혁대 연결고리에 화살이 맞아 화를 면하게 되었다.


후에 소백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고, 소백에게 잡힌 규는 자결하게 된다. 다른 적장들은 모두 소백에게 충성심을 맹세했지만 관중은 기꺼이 옥살이를 택하였고, 마침내 사형을 당하는 처지가 오게 되었다.


이 때에 포숙이 앞으로 나와 소백에게 아뢰기 시작한다. “전하, 전하께서 제 나라만 통치하시겠다면 신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천하의 패자가 되려 하신다면 관중 외에는 인물이 없을 것입니다. 부디 그를 등용하십시오. 관중은 오직 규 왕자만을 위해서 자신의 충성을 다 했을 뿐입니다. 관중은 단 한 사람의 주인을 위하여 결사적으로 일할 수 있어서 군왕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줄 알고 있습니다.”라면서 그를 등용하기를 권하였다.


결국 포숙의 설득으로 관중은 감옥에서 풀리고 재상에 오르게 된다. 그런 후 포숙이 죽자, 관중은 그의 묘 앞에서 ”나를 알아 준 이는 부모지만, 나를 이해한 사람은 포숙이다”라며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서양에서도 관포지교에 버금가는 생사를 같이 하는 막역한 전설적인 두 인물이 있다. 기원전 4세기경에 그리스에 사는 데이몬(Damon)과 피티아스(Pythias)라는 두 친구들이 디오니소스가 지배하는 시라쿠스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여행 중 피티아스는 디오니시스를 살해하려 했다는 누명으로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다. 피티아스는 죽기 전에 하나 뿐인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서 왕에게 사정을 말하고 3일 동안 석방을 간청한다. 왕이 고심을 하자 데이몬(다몬)이 보증을 한다며 나섰다. 제가 귀환을 보증하니 그를 보내주십시오. 피티아스가 돌아오지 않으면 제가 친구를 잘못 사귄 죄로 제가 그 대신 교수형을 받겠습니다. 왕은 이에 어이가 없어 하는 표정을 하며 웃었다.


피티아스가 돌아오면 죽는 운명인데, 그가 돌아오려 해도 그의 부모가 보내주지 않겠지. 너는 지금 만용을 부리고 있다고 왕이 말했다. 저는 피티아스의 친구가 되길 원하고 있습니다. 저의 목숨을 걸고 부탁드리니 허락해 주십시오. 왕은 어쩔 수 없이 허락했고, 데이몬은 기쁜 마음으로 대신 감옥에 갇혔다.


드디어 교수형을 집행하는 날이 밝았다. 피티아스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바보같이 데이몬이 죽게 됐다고 비웃었다. 정오가 되고 데이몬이 교수대로 끌려 나왔다. 그의 목에 밧줄이 걸리자 주변 친척들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정을 저버린 피티아스를 욕하며 저주도 했다. 그러자 목에 밧줄을 건 데이이 눈을 부릅뜨고 화를 내며 외쳤다. 내 친구 피티아스를 욕되게 하지 말라. 당신들이 내 친구를 어찌 알겠느냐! 죽음을 앞둔 데이이 결연히 말하자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집행관이 왕에게 눈을 돌리자 왕이 교수형을 집행하라고 엄지 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이 때 멀리서 누군가가 말을 재촉해 달려오며 고함을 쳤다. 그는 피티아스였다. 숨을 헐떡이며 제가 돌아왔습니다. 사형수인 제가 왔으니 이제는 데이을 풀어 주십시오. 둘은 서로를 끌어안았고, 작별을 고했다. 피티아스가 데이에게 말했다. 나의 소중한 친구여! 저 세상으로 가서도 자네를 잊지 않겠네! 그러자 데이도 피티아스에게 응대한다. 피티아스! 자네가 먼저 가는 것뿐일세! 다음의 세상에서 또 만나도 우리는 반드시 좋은 친구가 될 거야!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던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큰 소리로 외친다. 피티아스의 죄를 사면해 주노라!!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이 있어도 주위에 마음을 기댈 친구가 없다면 그 사람은 분명 불행한 인생이 틀림없다. 친구는 보통 네 가지 종류로 나눈다. 첫째 화우(花友)로 자기가 좋을 때만 찾는 꿀과 같은 친구라는 뜻이다. 둘째 추우(錘友)로 이익에 따라 저울과 같이 움직이는 친구다. 셋째로 산우(山友)로 안식처와 다름없는 마치 산처럼 편안하고 든든한 친구다. 넷째 지우(地友)로 언제나 한결같이 땅과 같은 친구를 말한다. 익자삼우(益者三友), 유익한 친구 세 종류가 있다. 첫 번째로는 정직한 사람이고, 두 번째로는 신의가 있는 사람이며, 세 번째로는 견문이 많은 사람을 의미한다. 반면에 손자삼우(损者三友)로 남의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 착하기는 하지만 줏대가 없는 사람, 겉으로 친한 척하고 속으로는 성실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


사회 경제적으로 최상급에 속한 세계 최고 엘리트 청년 하버드 대학 2학년 학생과 비교 집단으로 냉온수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빈민가의 문제 가정에서 자란 청년들이 향후 어떤 삶을 살아갈지 추적해 보았다. 하버드 대학에서 1938년부터 75년 동안 이 집단을 추적하여 2012년에 그 결과를 발표했다. 소위 “성인발달 종단연구”라는 과제로 연구비만 총 2,500만 달러(290억 원)를 투자해 724명을 추적 연구했다. 청년들은 자라면서 다양한 직업인으로 성장했다. 공장 인부, 벽돌공, 변호사, 의사가 되기도 했고, 한 명은 미국의 대통령이 되기도 했고, 몇 명은 알콜 중독자가 되고, 몇 명은 정신분열증 환자가 되기도 했다. 또 어떤 청년은 신분이 상승하여 가장 밑바닥에서 맨 꼭대기까지 올라갔으며, 몇 명은 그 반대의 인생길을 걸었다. 그러면 이들 청년들 중에서 과연 누가 가장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젊었을 시절부터 부와 명성, 높은 성취를 추구하는데 인생을 걸어왔던 사람들에 대한 연구결과를 요약하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의 삶을 정말 행복하고 건강하게 하는 것은 우리들이 예측했던 것처럼 “물질적 부와 명예”가 아니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이 연구의 네 번째의 책임 연구원이었던 윌딩거(Robert waldinger) 교수는 젊었던 시절에는 부와 명성, 그리고 높은 성취를 통해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사회 역시 우리에게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좋은 관계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로 사회적 연결 관계는 우리 삶에 매우 유익하다. 반면에 고독은 삶에 해롭다는 것이었다. 연구 결과 가족, 친구, 공동체와 항상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더 행복하고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다면 그런 사람은 덜 행복했고 중년기가 되면 빠른 속도로 건강이 악화되며, 뇌 기능까지도 더 일찍 저하되었다. 둘째로 관계에서 “친구의 숫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관계의 질”이다. 친구가 많더라도 갈등이나 싸움을 자주한다면 건강에 해롭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친구라도 그와의 관계에 만족한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셋째로 좋은 관계를 갖는 것은 신체뿐만 아니라 뇌에도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애착관계가 긴밀하게 형성된 80대 노인들은 그렇지 않은 노인에 비해 높은 기억력을 유지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가족과 친구, 공동체와 늘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좋은 관계가 더 좋은 삶을 만든다. 인간은 만남으로 자란다고 하는 말이 있다. 만남은 인생을 위한 영양소이자 비료와 같아서 만남으로 인생은 건강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 좋은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지만, 친구가 반드시 많을 필요는 없다하니 관우와 포숙, 또는 데이몬과 피티아스 같은 한 두명의 진실한 산우(山友)나 지우(地友)를 찾아서 좋은 관계를 맺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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