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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07-25 12: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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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Why Times]


인간은 오랜 동안의 진화 과정을 통해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회화 방식을 학습했다. 부족을 이뤄 함께 살다가 점차 작은 국가로 발전하고 지금은 세계화 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지금도 자기 자신이나 기껏해야 자기 식구하고만 소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한 관계로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이런 관계가 끊어져 고립된 생활을 하게 되면 외로움을 겪다가 우울증 같은 마음의 병으로 고생을 하기도 하고 끝내는 고독사로 사망할 수도 있다. 젊은 사람들이 맨발로 등산을 하거나 노인들이 공원에 나와서 큰 나무에 등과 배를 열심히 두드리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다. 두드림이나 접촉, 넓은 의미의 관계라는 접촉을 통해 많은 것을 얻는다는 생각이다. 


젊은이들이 사랑을 하면 예뻐 보이고 건강미가 넘쳐 보인다거나, 도 닦는 스님이 진심으로 만물을 사랑한다면 정말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건강하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옳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동물들이 어째서 그토록 자기의 새끼를 핥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 쉽게 이해가 간다. 어미는 수시로 새끼들의 머리, 복부와 항문 부위는 물론 신체 각 부위를 열심히 핥아준다.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서 염소가 새끼를 낳을 때 새끼의 반은 어미가 키우고, 나머지 반은 사람이 좋은 시설에서 풍부하게 영양분을 공급하며 키웠다. 이렇게 새끼를 두 집단으로 나누어 몇 주간 키운 다음 두 집단의 새끼들 간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머리에서 혈액을 채취하여 성분들을 분석하여 보았다. 분석 결과 새끼의 혈액에서 몇 가지 큰 차이를 발견하였다.


첫째는 “혈액 양(量)”에서 차이가 있었다. 핥아준 새끼의 머리에서는 많은 혈액이 흘렀다. 혈액이 그만큼 많이 흐른다는 것은 영양분을 많이 공급하고 있다는 의미이므로 두뇌의 성장에 긍정적 영향을 준다. 사람도 출산을 할 때 산도(產道)를 통해서 출산하는 신생아에 비해 제왕절개로 출산하는 신생아의 경우 잔병이 더 많이 발생하며 간혹 소두아(小頭兒)가 나타나기도 한다고 한다. 산모가 정상적으로 출산하는 아이는 산도를 통과하므로 출산 과정에서 핥아주는 효과와 같은 접촉 효과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산모들이 제왕절개 수술을 받으면 출산에서 오는 고통을 줄일 수는 있지만 아이는 접촉의 효과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 좋은 출산 방법이라고 할 수 없다.


둘째는 “성장 호르몬”을 분비하는 양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새끼들이 출산한 후에 가장 빨리 성장해야 할 곳은 머리 부분이다. 특히 신생아는 출산 직후에 머리를 가누지 못하기 때문에 빨리 머리와 목이 발달해야 하며, 두뇌도 빨리 성장해야 하므로 많은 성장 호르몬을 공급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어미가 새끼에게 젖을 먹인 후에도 항문을 열심히 핥아서 배변을 도와주기도 한다. 어린 시절 소화가 잘 되지 않아서 배가 아프면 “할머니 손은 약손이다”하면서 배를 문질러 원활한 소화를 돕던 할머니 손도 접촉 효과를 활용하는 일종의 보조적인 행위라 볼 수 있다.


셋째로는 혈액의 “면역 성분”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핥아주는 곳에는 면역 성분이 집중적으로 공급되므로 여러 병원균들에 안정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노인들이 움직이지 못하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으면 욕창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피부를 마사지 하면 접촉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마사지한 부위에는 면역력이 강화될 수 있어서 욕창이 발생하지 않는다. 여자가 화장할 때 얼굴에 마사지를 해주면 잔주름이 없어지고 탄력도 생긴다고 말하거나 노인들이 신체의 구석구석을 두드리는 운동도 모두가 피부 접촉으로 면역력을 강화시키는 목적이 있다.


사람의 접촉 관계에 대한 최초의 심리학적 실험은 할로우(Harlow)가 1962년에 원숭이 새끼를 이용하여 실행했던 “애착실험”이다. 실험에서 어미와 새끼들과의 물리적인 관계를 분리하여 “철사”로 조잡스럽게 만든 대리모 인형과 “부드러운 옷감”으로 만든 대리모 인형이 있는 실험실에 넣었더니 새끼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천 대리모”와 놀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동안 “수유”가 새끼와 어미와의 애착관계를 맺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종래의 가설에서 피부 접촉이라는 “관계”가 애착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실험이었다. 실험의 결과가 온 세상에 알려진 다음부터 육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의 “영양” 공급이 아니라 “관계”를 통한 접촉이라는 사랑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프리카 내전으로 부모를 잃게 된 아이들에 보육원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영양분이 많은 음식을 제공했는데도 계속해서 아픈 환자가 발생하고, 죽기도 하는 사건이 자주 발생해서,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해 주는 문제와 달리 별도로 안아주고 접촉해 주려고 노력했다. 그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 아파하거나 사망하는 아이들이 줄었고, 신체적 조건 뿐 아니라 정신적인 조건들도 상당히 개선되었다. 어린 아이에게 접촉해 주고 따뜻한 관계를 맺으면 건강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신체적인 접촉이나 심리적인 접촉 모두 뼈가 되고 살이 되고 건강과 행복도 보장되는 삶의 중요한 보약의 효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관계를 맺을 때 양자 간에 지켜야 할 몇가지 원칙이 있다. 자발적 진심, 형식적인 의무와 책임, 손익문제에 관한 원칙이 있다. 여러 원칙 중에서 모(부)성애 관계에서만 “자발적 진심” 원칙만이 본능적으로 작동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보이는 헌신적인 관계만이 자발적인 진심의 관계에 있다. 이 관계에서는 손익의 문제는 중요치 않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에 대해 가지는 관계의 원칙은 본능보다는 형식적인 책임과 의무만 있는 혈연관계일 뿐이다. 인간들을 포함한 동물들은 자기 DNA를 남길 수 있는 후손을 보호하려는 본능적 욕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식이 가지는 부모에 대한 관계는 끊임없는 교육훈련과 실천을 통해서 습득된 습관적인 행동에 불과하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며 끈끈한 혈연관계를 강조하지만 재산상 이득이나 자녀양육 등의 이해관계에서 이득을 얻게 될 경우에만 부모와의 관계가 긍정적으로 유지되겠지만, 부모들의 생활비나 건강관리 유지에 소요되는 물질적 정신적 손해를 끼치게 되면 부담스럽고 성가신 관계로 변질될 수 있다. 자식들이 부모에 대해 갖는 부모 관계, 형제 관계, 친척 관계는 모두 혈연으로 연결된 핏줄 관계에 있고, 부부 관계와 기타 사회적 친구 관계 등 대부분의 모든 관계는 손익 원칙에 따라 결정되는 사회적 계약 관계에 있다. 그러기 때문에 관계의 강도는 본능적 관계가 가장 강하고, 다음으로 의무와 책임에 의한 혈연관계이고, 손익에 따른 부부관계와 대부분의 모든 사회적 관계가 가장 약하다.


그러나 부부 관계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이성 교제를 시작할 때는 생물학적 본능에 의한 관계로 출발한 다음 사회적 계약에 의한 부부 관계로 발전한다. 그리고 자식이 생기면 사회적 계약관계에서 유사 본능적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남자가 가족 부양의 의무에 충실하지 못한다거나 부부가 본능적 이성 관계를 상실하게 된다면 부부 관계도 해체될 수 있다. 흔히 말해서 “님”의 관계에서 “남”이라는 관계로 사회적인 계약이 끊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식을 낳으며 “진심”이라는 원칙이 추가되면 평생을 함께하려는 진정한 부부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형제 관계와 친인척 관계를 포함한 혈연관계와 사회적 관계는 손익의 문제가 중요하게 작용하므로 손익 관계가 깨지면 그 간 유지되던 계약 관계는 해체될 수 있다. 그래서 부모가 양육 의무를 하지 않았거나, 자식이 부양의 의무를 다 하지 않을 경우 재산 상속을 금지하는 “불효자 상속법”이 입법 예고되고 있는 슬픈 현실이다. 가정과 학교와 사회 어느 곳에서도 관계를 맺을 때에 “자발적 진심”이라는 중요한 원칙에 대해서 교육하고 훈련시키려는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손익 문제를 계약의 기본적 원칙으로 사회의 발전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정반합(正反合) 원리 이다. 독일의 철학자인 헤겔(Georg wilhelm Hegel)의 사상을 반영했던 것이지만 그가 직접 사용한 용어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는 막스(Karl Marx)와 엥겔( Friedrich Engels) 등이 그들의 역사 이론을 설명하는 중요 토대가 되었다. “정(正)”이란 어떠한 것이 기존부터 유지돼 오던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이런 “정(正)”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제시하는 것이 “반(反)”의 개념이다. 그렇지만 “반”이라 하는 상태 또한 그 동안의 모순을 극복했다고 하지만 그것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수 있는 것은 취하는 상태의 “합(合)”이 나타난다. 그렇지만 “합”도 시간이 지나면 또 모순적 한계성을 갖게 되기 때문에 “합”은 다시 “정”이 되고 다시 “반”이 나타나서 새로운 “합”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식으로 계속 반복하다 보면 진리에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이 정반합(正反合)의 논리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관계에 대한 개념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대부분 분야에서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관계를 개선하려는 노력보다는 우선 기존의 모든 관계(정)를 해체하려는 모습만 보일 뿐 새로운 관계(합)에 대한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기존의 모든 관계가 혼잡하게 변하고 있을 뿐이다. 극단적 개인주의 가치관을 중심으로 상대방의 모순과 단점만을 찾기 위해 서로 대립과 갈등의 길을 갈 뿐이다. 


안타깝게 새로운 “합”을 창출하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정치의 세계는 물론 민족의 역사성, 전통 정신문화, 도덕과 윤리의식, 가치관 등 모두가 분열과 투쟁만이 난립하고 통합 의지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부(모)자 관계와 혈연관계는 물론 부부관계와 이웃관계와 사회적 관계가 모두 끊긴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서 사는 느낌이다. 접촉이라는 관계를 통해 무상으로 얻을 수 있는 삶의 영양분도 건강에 필요한 면역 기능도 기대하기가 어려운 환경으로 변질되어서 사회적 심리적인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사회 심리적인 중병에 걸려 신음하는 중환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우리에게는 천지인 합일사상(天地人合一)이라는 귀한 전통사상을 가지고 있다. 대립 갈등 모순을 전제로 하여 새로운 방법을 찾겠다는 서양식의 가치관과는 달리 전체를 위해서 사랑과 포용과 이해 중심으로 새로운 해결 방법을 찾는 우리 전통적 가치관이 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로 진화를 거듭해 왔기 때문에 홀로 살 수 없고 함께 살아야 한다. 인간은 관계를 먹으며 살아야 배가 부르고 건강할 수 있는 사회적 동물이다. 


그래서 뭉쳐서 같이 살게 되면 건강과 행복을 약속할 수 있는 생활을 하게 되고, 헤어져서 외롭게 살게 되면 육체도 병이 들고 마음의 고독도 밀려온다. 우리들은 만남을 통해서 건강과 행복을 찾아야 한다. 아프리카 남부지역 한 호수 주변에 코사족(Xhosa) 800만 정도가 살고 있는데, 그들의 속담에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처럼 사회적 관계를 통한 공유와 협치 정신인 “우분트(Ubuntu)”라는 의미를 실천하면서 통합된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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