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22-08-10 21:10:35
기사수정



안녕하세요.

‘나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 유튜브의 제목이 ‘나로부터의 자유’라는 것은 저 자신부터 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맞아요. 전혀 자유롭지 못하고 매일 매번 나한테 걸려 넘어지고 자빠집니다.

문제는 제가 벌써 환갑을 넘긴 나이라는 것이지요.


매번 걸려 넘어지면 마음이 편치 않고 괴롭습니다. 걸려서 괴로운데 괴로워하는 꼴을 보니 또 괴로워. 엎친 데 덮친 격이지요.


처음에는 남도 탓해보고 환경도 탓해봤지만, 가만히 세월 속에서 들여다보니 결국은 모두 내가 문제더라고요.

제가 남의 꼴도 못보고, 저 자신의 꼴도 못보고, 제게 놓여진 상황도 못 보아준다는 것이지요.


살아갈 날보다 이미 살아온 날이 많아지니, 갈 날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홀연히 듭니다.

그래서 ‘여기 이 순간’에 진정 존재하는 방법이 뭐일까 항상 궁금해합니다.


그러다 혹시 저같은 고민을 공감할 분들도 계시려니, 그럼 그런 분들에게 제가 접한 좋은 글이나 영상, 느낀 점도 공유하고, 그분들로부터 한 소식 귀동냥이라도 할 수 있을까 싶어 이 유튜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두서없이 시작하지만, 앞으로라고 두서가 생길지는 저도 의문이고, 다만 뭔가 큰 기대없이 시작하는 것이라 그냥 주절주절 오래 할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은 듭니다.


‘나로부터의 자유’의 첫 주제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포악한 거인인데 아테네 교외에 살면서 길을 지나는 사람을 상대로 강도질을 일삼았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붙잡아온 사람을 침대에 눕히고는 그 사람의 키가 침대보다 크면 발을 잘라 죽이고, 그 사람의 키가 침대보다 작으면 침대 길이에 맞춰 몸을 잡아 늘여 죽였지요. 어떤 사람도 키가 침대의 길이에 딱 들어맞을 수는 없었기에 잡혀 온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 신화 스토리에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심리학 용어가 생겼다고 하네요.

침대는 프로크루스테스가 갖고 있던 기준이나 생각을 의미하기에 결국 자기 기준이나 생각에 맞춰 남의 생각을 재단하고 바꾸려하거나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아집과 독선, 횡포를 의미하지요.


따라서 프로크루스테스는 자신의 생각이나 기준에 집착하여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의미하겠으나, 오늘은 다른 시각에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자신을 내세워 타인을 괴롭히는 악한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내세우고 고집함으로 인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고통 속에 몰아넣는 불쌍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나요?


우리 모두 자신만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 침대를 자신에게 들이대어, 이 나이가 되도록 뭐 하나 이룬 것이 없다느니, 옹졸하다느니, 초라하다느니, 비겁하다느니 하며 스스로를 한심해하며 괴로워하고, 때로는 그 침대를 남에게 들이대어, 왜 그 정도밖에 하지 못하냐는 둥, 못돼먹었다는 둥, 인정머리 없다는 둥, 불친절하다는 둥, 예의라곤 약에 쓰려도 없다는 둥, 그가 자신의 생각,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고치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벌어야 만족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얼마나 관대해야 할까요, 우리는 얼마나 친절해야 할까요? 남들과 환경은 우리를 위해 얼마나 헌신해야 할까요?

그 기준을 수치화 계량화 할 수 있기는 한 걸까요?


작아서 작은 것이 아니고 큰 것 옆에 있다보니 작아 보이는 것뿐인데, 왜 우리는 그 존재 자체로 보아주지 못하는 것일까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자신만의 기준이고 원칙이겠으나 그렇기에 자신에 대한 제한이고 구속이기도 합니다.


기준이나 원칙은 합당해야 할 텐데, 무엇이 합당한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저 자신의 생각일 뿐이지요.


내가 남편이다, 내가 사장이다, 내가 아버지다, 내가 선배다 라고 이름짓는 순간 남편과 아내, 사장과 직원, 아버지와 자식, 선배와 후배가 분별되어 그 역할이 강요되고 그 역할이 탐탁지 않다고 불만이 나오고 갈등이 생겨 결국 삶은 고달파지지요.


우리는 내 남편을, 내 직원을, 내 자식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아는 만큼 상대를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우리가 과연 내 남편을, 내 직원을, 내 자식을 제대로 알고 있기는 한가요?

시인 정현종은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라고 읊었습니다.


결국 한 사람을 마주한다는 것은 그의 과거 현재 미래, 그의 삶 전체를 마주한다는 것인데, 우리는 과연 그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파편과도 같은 뿌연 이미지만으로 그를 판단하고 단죄하려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 자신만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그를 꿰어맞추려는 무모하고 잔인한 시도가 아닐런지요.


그래서 자신이라도 편해진다면 그나마 좋으련만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다고 스스로도 괴로워하니 참 어리석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신화에서도 프로크루스테스는 자신이 했던 똑같은 방식으로 영웅 테세우스에게 도끼로 다리를 잘려 살해당하지요. 스스로 놓은 덫에 스스로 걸린 격입니다.


만물 만상에서 이름을 떼어낸다면 우리는 좀 더 자유스러워 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름을 떼어내고 그 존재만으로 마주할 때, 그도 편안해지고 나도 편안해질 것입니다.


내 안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치워버릴 때, 우리는 진정 자유로워지겠지요.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로부터의 자유였습니다.


TAG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whytimes.kr/news/view.php?idx=12489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정기구독
교육더보기
    게시물이 없습니다.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