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18-04-08 15:36:27
  • 수정 2018-04-08 15:37:26
기사수정

북한비핵화의 향방이 국제사회의 긴급과제로 등장한 가운데 평창동계올림픽은 지나갔다.

북한의 대규모 예술단과 응원단,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특사의 남북정상회담제의등 한바탕 북한정치바람이 지나간 후 국제사회는 평창이후의 위기증폭문제로 대책강구에 열중했다.


캐나다 뱅쿠버의 625전쟁 참전국 외상회담, 북대서양동맹(NATO)의 국방장관회담, 안보올림픽이라는 뮌헨안보포럼(MSC)이 해법을 토의했다.


이제 트럼프 미대통령이 군사옵션의 불가피성과 세계차원의 북한제재에 강화를 두고 토론이 벌어졌다.


구테흐스 유엔사무총장과 스톨텐베르그 나토사무총장은 똑 같이 북한핵무장 완성주장에 우려를 표명했다.


2월15-16일의 나토국방장관회담에서 스톨텐베르그는 “뮌헨이 미국보다 가깝다”고 주지시키고 “김정은의 ICBM 사정권안에 베를린, 파리, 런던이 모두 들어 있다”고 경고했다.


북핵문제는 이제 미국의 문제가 아니고 세계의 문제임을 강조했다.


MSC는 냉전시대부터 계속된 안보수장들의 포럼으로 구체적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관례였다.


톰 라이트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의 발제가 특히 주목되었다.

그는 “트럼프대통령이 김정은의 핵무기운반시스템을 완성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코피작전이란 없다. 만일 이런 일이 시작된다면 문명사상 재앙적 사건중 하나가 될 것이다”고 발표했다.

북한의 ICBM 완성전에 북한에 군사적 옵션을 실행한다는 예고였다.


▲ 뮌헨안보회의(MSC, Munich Security Conference) [WT DB]


2월16,17,18일 3일간 열린 MSC(
뮌헨안보회의, Munich Security Conference)는 북미, 유럽, 아시아의 거의 모든 안보최고책임자들이 모여 비공개로 안보전략을 설명하고 분석종합하는 세계안보전략회의로 유명하다.


미국의 맥매스터 백악관안보보좌관이 기조연설을 했고, 영국의 메이와 네타냐후 이스라엘총리, 일본 고노와 라브로프 러시아외상등이 모여 주의제로 한반도전쟁위기를 토의를 했다.


강경화 외교장관의 불참이 중대한 시기의 안보 과오로 지적되었다.

김정은의 문재인대통령 평양초청 때문에 안심했다면 국제전략외교 무지의 표출이다.


평창올림픽의 일시휴전은 문재인정부가 광범한 국제정세와 전략의 지식을 갖고서마치 “칼날 위를 걷는 곡예사의 슬기와 재능이 요구됨에도 한미동맹과 국제공조보다 김정은과의 대화제의에 도취된 것이 아닌지 우려를 낳고 있다.


프랑스의 르몽드지는 평창을 아예 “북한의 올림픽”이란 제목의 사설에서 “북한독재체제 고위인사의 이러한 친교는 국제사회의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평양이 획득한 핵강대국의 현실을 보증하게 될 것이다.

이 현실을 우리는 조금도 납득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2월10일자)



▲ 평창올림픽 개막식 [뉴시스]



평창올림픽은 30년전 서울올림픽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앞서 1980 모스크바와 1984 LA올림픽처럼 반쪽자리가 되지 않을까 세계가 우려했다.

서울 올림픽에 세계공산주의 총수 소련의 참가가 발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0 LA는 공산권불참으로, 1984 모스크바도 미국등 자유진영 보이고트로 반쪽짜리 올림픽이었다.

그래서 분단국가인 한국주최 서울올림픽도 공산권불참으로 반쪽이 될 가능성이 컸다.


북한의 KAL기 테러등 방해공작이 극심했고 서울올림픽 공동주최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런데 소련이 참가하면 북한을 제와한 동유럽등 공산권이 올 것임으로 12년만에 100% 올림픽의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올림픽위원회 박세직위원장은 모스크바의 묵묵부답에 잠을 못 이룬다고 했다.

공산권과 수교가 없으니 알아볼 길도 없었다.

이 때 도쿄주재 타스통신과 당기관지 지사장이 한국민심 현지조사를 위해 입국했다.


이들이 88년4월 중앙일보편집위원실장인 나를 찾아 왔다.

유럽에서 장기 신문특파원을 한 나에게 서울민심이 소련선수들을 공정하게 대해줄지 우려했다.

그들은 공산주의 때문에 “붉은 뿔이 달린 괴물로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은 한국의 전 도쿄특파원들과 상의한 후 다시 나를 찾았다.

이들은 나에게 소련을 방문해 본대로 들은대로 르포를 써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유럽특파원을 최장기간 지낸 필자를 추천했다며 가주기를 요망 했다.

취재자유의 보장조건으로 승낙했다.


때마침 신현학 전총리가 모스크바에서 5월16일부터 3일간 개최되는 인터액션국제회의(전직수상회의) 한국대표로 간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수행기자로 등록해 소련의 언론취재비자를 받았다.


한국언론인 최초의 소련입국사증이었다.

도쿄에서 아에로플로트(소련항공)기 편으로 모스크바공항에 착륙하자 신총리 일행을 영접하는 소련관료들의 안내로 프리패스했고, 나는 혼자 떨어져 인투리스트 호텔에 체크인 했다.


그런데 역에서부터 모스크바는 유럽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나치시대 독일처럼 군대와 비밀경찰의 눈이 번득일 것으로 생각했으나 전혀 아니었다.

모스크바 시민의 자유분방한 모습은 런던, 파리와 다름이 없었다.

소련시민들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 때문에 크게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소비에트스까야호텔을 찾아 일행과 아침을 같이하고 인터액션회의를 일차로 취재하기로 했다.


회의주제는 동서화해와 상호협력이었다.

독일 슈미트전총리는 소련이 진정한 동서화해를 위해 문을 크게 열어야 한다고 했다.

신총리는 특히 한국기업의 소련진출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로미코 소연방최고회의의장의 크렘린 대연회에 신총리 수행기자로 초대되었다.

미소정상회담의 주무대인 크렘린궁은 장엄한 광장같은 인상으로 주석단 밑에 수많은 동서의 거물인사들이 대화와 보드카 잔을 나누었다.

나는 알바토프 미국연구소장을 만나 대화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뜻밖에도 “우리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경제정책을 깊이 연구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놀랐다. 그는 박정희의 경제정책이 군사독재를 하면서도 성공한 비결을 찾아 연구하면서 소련경제와의 접목을 구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결국 정치적 자유와 시장경제를 지향한 개방의 의미가 큰 것 같다”는 나의 인상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독재가 아니면 단시간에 경제발전은 불가능하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경제보다 민주화의 비중이 크다고 했더니, 페레스트로이카는 경제문제가 최우선과제다고 잘라 말했다.

공산주의독재를 장기간 했음에도 국민의 생필품생산이 부족한 현실을 개탄하기도 했다.

여기서 소련이 한국의 압축성장을 도입하려고 하는구나..라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88년 소련의 세계공산당제국의 수명이 다하고 있음을 직감하며 취재했던 것이다.

그로미코는 보드카잔으로 동서화합을 위한 축배를 선창했다.

그는 짤막한 연설 후 퇴장했으며, 리셉션은 동서대화의 장으로 열기로 크렘린이 활기를 품고 있었다.

모스크바시민들은 서울올림픽에 관심이 많지 않았다.

간혹 관심을 표명하면 반갑기만하여 “개최지를 아시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남조선”이 아니냐고 북한식 물음이 왔다.

“남한이 어떤 나라로 보이는가?” 물으면 “경제발전이 대단하다는 신문을 읽었다. 우리도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답했다.


“소련선수들이 서울올림픽에 참가하는가?” “잘 모른다. 미국과 친한 나라가 아니냐. 우리가 개최할 때 미국이 불참했다” 불참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소련의 참가여부를 시급히 취재할 필요가 있는데, 묘안이 없다.

그래서 외무성의 가이드에게 올림픽준비를 하고 있는가?라고 물어 봤다.


“열심히 하고 있다”는 답이였다.

우리나라는 러시아어가 귀하다.

통역문제는 어떻게 하는가?라고 물었더니, “고려인들로 한족위워회를 만들어 준비하고 있어 문제없다”는 답이다.


나는 선수단이나 한족인위원회 사람들을 취재주선해달라고 요청했다.

다음날 “시간이 없어 불가하다”는 답을 주었다. 멀지 않아 발표할 것이나 숙소문제 등이 해결될 때까지 발표가 늦어질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서울에 소련공관이 없어 어려움이 많다는 말도 했다.

서울올림픽이 세계의 동서화해축전이 될 것을 확신하면서 공산권나라들의 참가로 대성공이 기약을 확인했다.


붉은 광장, 굼 백화점,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현장, 레닌 묘, 모스크바의 명동격인 알바트거리를 산보했다.

KGB 비밀경찰의 감시가 분위기를 흐릴 것으로 생각했으나, 허탕이었다.

마치 파리나 런던거리를 산보하는 듯 활당하고 자유스런 분위기였다.

타스통신등 도쿄주재 소련특파원들이 서울시민들이 소련사람을 “붉은 뿔 달린 빨갱이”로 본다는 우려는 기우였다.


스탈린독재를 벗어난 모스크바는 자유의 향기가 풍기는 서구와 다름이 없는 유럽대도시로 간주하게 되었다.

나는 점심이나 저녁 식사 때 시민들의 대화에 끼어들어 서울올림픽을 소개하며, 서울에 꼭 오시라고 권하기도 했다.

“서울에 가서 응원도 하고 구경도 하고싶다”고 말했다.

이미 소련은 30년전인 1988년에 페레스트로이카정책으로 공산주의탈출을 예행연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닌그라드(오늘의 생페테르부르크) 여행은 삼성, 대우, 금성등이 참가한 “일렉트로니카 88전자전시회”의 취재가 주목적이었다.

한국전자전시장은 태극기대신 서독기가 걸렸는데, 서독법인명의로 전시허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전시장에 러시아인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 놀랐다.


한국제 TV, VTR, 컴퓨터, 오디오, 세탁기등 가전제품들을 보면서 감탄하는 소련사람들의 모습이 장관이었다.

스텐드에 국적표시가 없었으나 모두가 한국제품임을 선전니로 알고 감탄하는 모습이었다.

그때 한국전자 3사를 소련신문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는데, 상품들을 비록 한국을 명기하지 않았으나, 크게 부각시켜 보도해 인상적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바람이 멀지 않아 한반도에 불어닥칠 것이 확실했다.


러시아신문의 대대적 보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고려인과 북한 유학생들이었다.

북한학생들은 모두 장발과 블루진, 점퍼차림으로 구미의 한국유학생들과 같은 옷차림이었다.

저녁에 호텔을 찾아온 4명의 유학생들은 저녁을 함께하면서 대화를 했다.

그들은 공산권 최대강대국 소련사람들이 감탄하는 한국전자제품생산국인 한국이 자랑스럽다고 털어놓았다.


이들은 서울올림픽에 큰 관심을 표명하면서 왜 서울올림픽이 공동개최가 안되는지를 질문했다.

올림픽은 IOC가 한 도시를 개최지로 지정하기 때문에 북한과 공동개최가 불가능이라고 설명하고, 김일성주석에게 축구등 일부 경기의 예선을 북한에 나누어 주었는데 거절했다고 말했다.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동독이 서독과 다른나라로 참가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IOC규정을 잘 몰랐다고 하면서 “그래도 우리는 불참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북한공산주의체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우리는 수령님을 존경한다. 그 나머지를 존경하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학생들의 말을 들으니 북에도 변화가 있는 것 같은데?
“아마도 우리 세대가 주체가 될 때는 많이 변할 것이다”


1988년5월22일 소련취재여행 마지막 날이다.

네바강 상류 이바노프스카야 14번지 아파트에는 30대 초반 고려인부부가 “어서 오십시요”라며 반갑게 맞았다.

소련에서 처음 보는 한식이 한상 차려져 있었다.

숙주나물무침, 풋고추와 상추 된장과 쌀밥, 통닭구이 등이였다.


남편 김 알리크가 소련최고의 술이라는 아르메니아산 브랜디를 권했다.

이들은 “우리는 조선인(북한인)이 아니라 고려인이다. 한국인을 만나 너무 반갑다”고 인사했다.

이들 내외는 공산당원으로 대학교교수들이다.

이들은 우리를 만난 소회를 거침없이 말했다.


“소련매스컴이 한국소식을 자주 잘 전해주어 궁금한 것은 별로 없으나 한소간 교류가 없어 유감이다. TV를 통해 서울올림픽 소식과 민주화과정을 열심히 보고 듣고 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조국을 보는 것이다. 북조선의 불참은 민족의 불행이다. 한국이 잘 설득해서 조선인들이 참가하면 이곳 고려인들 모두가 춤출 것이다”


고려인의 민족혼이 끓는 감동의 이별이었다.

이들은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한핏줄로 맺어진 민족애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일깨워주는 영화장면보다 더 값진 것이었다.

나는 귀국즉시 박세직 KOC위원장에게 소련선수단의 서울올림픽참가를 알렸다.

12년만에 동서대화합을 합창하는 화해와 평화의 스포츠한마당에 성공했다.

이듬해인 1989년, 서울올림픽 1년여 후 베를린장벽이 붕괴되었고, 냉전종식, 동구-소련공산제국의 해체, 독일통일과 동서유럽의 통합으로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의 세계화시대를 열었다.


내가 프랑스 파리에서 유럽대변동을 취재할 때 수많은 유럽인들이 나를 보고 “88 서울올림픽의 성공이다. 이것이 세계화시대를 열었다”고 말했다.

세계는 그렇게 21세기를 맞아 모두가 번영과 평화시대를 노래했다.

한반도도 세계회의 물결을 선도적으로 타고 자유와 번영의 길을 달릴 것으로 보였다.

그후 30년, 2018년 2월 한반도의 현주소는 무엇인가?


한반도는 평창올림픽 후 핵전쟁이냐, 북한 비핵화냐의 갈림길에 섰다.

어느 길을 갈지 알 수 없는 절망의 시대다.

30년전 서울올림픽은 동서화합의 대전환을 예고했다.

그리고 1989년 유럽대변동으로 현실화되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15개국 소련위성국에 자유와 주권, 독립을 부여하면서 1992년 소련세계공산주의 진영이 해체됐던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한국 박정희의 자본주의 압축성장을 도입하고 서구의회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접목시켜 공산주의체제에서 탈출했다.

오늘 유럽연합과 공존의 정치경제시스템을 구축에 성공했다.


그런데 한반도만이 구체제의 낡은 시대에 빠저있다.

북한 김씨세습 공산왕정체제가 핵미사일완성을 외치면서 남한과 일본, 미국을 핵공격으로 불바다를 만든다고 위협하고 있다.

이미 유엔이 6차의 핵실험과 수많은 미사일 도발에 대한 16번이나 제재압박을 가함에도 북한은 국제사회의 비핵화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유엔재제에 북한의 동맹 중국과 러시아마저 가담하고 있다.

문재인대통령이 팬스 미부통령-북 김여정대화를 중재했지만 북이 취소했다.

비핵화불가의 신호였다.


국제사회는 1월말 밴쿠버의 6.25전쟁참전국 20개국 외상회담, 2월 하순 나토 국방장관회의와 안보올림픽으로 불리는 뮌헨안보포럼(MSC)에서 전세계 안보수장들이 평창이후 대책의 준비를 완료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세계차원의 국제압박공조로 김정은이 비핵화에 나설 때다.

평창 후 전쟁불가피론이 구미와 국제사회에 우세를 보이고 있다.

문재인 운전석에 불똥이 떨어지고 있다.

미국과 국제사회전체가 굳게 결속했음으로 북의 미련을 버리고 국제공조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관련기사
TAG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whytimes.kr/news/view.php?idx=1188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주섭일 논설위원 주섭일 논설위원의 다른 기사 보기
  • 언론인/ 사회와 연대 회장
    정치학 박사
    전 중앙일보 파리특파원-국제문제대기자

    저서: 사회민주주의의 길(사회와 연대, 2008) 등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사회와 연대, 2017)
    특파원이 추적힌 북한 핵(사회와 연대, 2016)
    한반도 통일대박과 1990 독일통일 (사회와 연대, 2014)
    북의 3대 세습과 평양의 봄(사회와 연대, 2011)
    정치변화와 사회민주주의 (사회와 연대, 2002)
    김정일과 부시의 대타협(두리미디어, 2008)
    새정치와 이원적 민주주의 (사회와 연대, 2012) 등 다수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정기구독
교육더보기
    게시물이 없습니다.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