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22-04-23 23:46:06
  • 수정 2022-04-24 15:09:29
기사수정



4.19 62주년을 맞아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각각 4.19혁명을 기념하는 말을 남겼다. 문대통령은 별도의 성명을 통해 “국민이 나라의 주인임을 증명했다”고 전제, “부마민주항쟁과 5.18 민주화운동, 6월항쟁과 촛불혁명에 이르는 민주발전의 도화선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4.19는 부마항쟁과 촛불혁명의 도화선이었다”고 밝혀 4.19혁명의 위대한 역사적 의미를 폄하했다.


한편 윤석열 당선자는 기념식에 참석해 “목숨으로 지켜낸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국민의 삶과 일상에서 느낄 수 있도록 소중하게 지켜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중요한 것은 문대통령이 촛불혁명의 불쏘시개로 4.19혁명의 큰 뜻을 모욕했다는 점이다. 어떻게 4.19혁명이 부마항쟁, 6월항쟁, 촛불혁명의 불쏘시개인가? 4.19혁명은 프랑스대혁명과 비견되는 민주대의의 큰 울림으로 세계를 감동시켰다.


프랑스혁명은 매년 파리의 샹제리제 대로에서 프랑스군과 세계의 군대들이 함께 행진하면서 민주혁명을 사수하는 국제적 의미를 상기하고 있다. 특히 민노당과 전교조 주도 주사파의 촛불혁명의 도화선’이라니 4.19영령과 살아있는 영웅들이 통탄할 지경의 모독이다.


아마도 자유민주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자이니 특히 촛불의 불쏘시개로 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대통령이 이렇게 편향적인 사람이니 어떻게 대통령으로 대우할 수 있겠는가.


[홉스봄, “20세기 후반의 세계는 여전히 부르주아의 세계”]


현존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에 대해 세계사의 주류 정치경제사는 정치원조는 프랑스, 경제원조는 영국으로 규정되고 있다. 프랑스의 혁명사가 소불과 마티에 등과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정치는 프랑스, 경제는 영국이 근현대사회를 창설 발전시킨 국가라고 강조했다.


반면 미국은 봉건사회가 없는 문명적 황무지에서 유럽이민자들이 창설한 대국으로서 영국 이민자들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만든 창설자로 지목된다.


결국 미-영-불 3국이 오늘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법치라는 현대 정치경제체제를 창설 발전시킨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프랑스혁명은 시민의 총봉기로 루이왕조의 봉건적 절대왕정체제를 붕괴시키고 선거제도로 민주 정통성을 확보한 국가경영 정부를 규정한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창출했으며, 이것이 2차세계 대전 전후에 미-영-불 중심의 서방진영 세계의 일반적 정치경제체제로 확립되었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 기간에 러시아에서 레닌의 공산주의혁명이 성공함으로서 미-영-불 중심의 자유민주체제와 대립 경쟁하는 공산주의체제가 2차대전 후 세계를 양분했다. 1948년 독일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선언’을 발표함으로서 구미의 자유민주-자본주의체제와 대립하는 공산주의 체제를 확립해 양진영이 대립했던 것이다.


2차 대전에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나치즘-파시즘-군국주의와 세계대전을 한 결과 미영불과 소련의 연합군이 승리함으로서 20세기 후반 냉전체제가 성립되었다. 즉,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세계의 대립이었다. 자유민주-공산세계의 냉전은 소련공산당수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방)정책으로 백기를 들어 공산주의를 폐지함으로서 세계는 자유민주체제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21세기 공산당이 없는 세계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엘릭 홉스봄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 이후 한 세기만에 그것이 예언했던 자본주의의 경제적 사회적 영향이 현실화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후계자들, 제3의 인간들에 의한 지배라는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자본주의의 전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세기 후반의 세계는 여전히 부르주아의 세계이며 제국의 시대에 의해 형성된 시대이다. 그것이 문자 그대로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2차 세계대전 후 얄타체제의 동서냉전의 시발점으로서 1945년 8.15 해방을 지내며 동서진영으로 분단된 이후, 스탈린의 장교 김일성의 남침으로 이념적 분단비극이 시작되었다. 남한은 자유민주세계로 귀속되었고, 북한은 공산체제의 꼬리가 되었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탱크와 미그전투기를 앞세워 미영불의 자유민주주의 남한을 점령하기 위한 한국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21세기에도 앞길이 망연한 한반도의 자유민주체제의 통합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한반도는 분단에서 탈출기회를 잡을 수 있는가?


 [4.19혁명, 51일간 전시민 총궐기한 20세기 자유주의 최대혁명]


1960년 4.19혁명은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영원히 살기 위한 전시민적 투쟁이요, 몸부림이었다. 6.25전쟁으로 유엔안보리의 구미선진국 16개국의 참전으로 북한과 중공군을 남에서 격퇴하고 휴전협정시대를 연지 6년 후 4.19혁명은 폭발했다.


프랑스는 1789년 7월 14일 루이 16세가 시민혁명에 투항한지 80여년 후, 파리코뮌에서 베르샤이유의 티에르의 부르주아군대가 최종승리하기까지 좌우파간 유혈적 내전을 겪었다.


4 19혁명은 대구 2월 28일 경북고 학생시위 후 마산의 고교생 김주열 군이 마산항에서 최루탄을 눈에 꽂고 떠올랐고, 결국 4월 19일 서울 문리대생 3백여명이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는 구호를 외치며 데모에 나서면서 본격화됐다. 서울의 시위는 4월 26일 대학 교수단 데모 하루 후인 4월 26일까지 매일 100여만 이상의 서울시민들과 전국민이 연쇄 데모를 한 다음에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던 것이다.


4.19혁명은 대구 학생시위 후 51일만에 승리의 만세를 부를 수 있었다. 4.19혁명은 전국민이 날마다 시위함으로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쟁취한 20세기 최장기간 최대의 시민운동이었다. 186명 사망, 1500여명의 부상자를 낸 대혁명이기도 했다. 프랑스혁명과 같은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는 구호로 전국민이 날마다 정국을 뒤덮은 인파가 이승만 하야를 위한 시위를 했던 것이다. 아시아에서 이러한 대규모 최장기 시위는 지구를 진동시킨 대사변이었다.


1987년 6월항쟁은 4.19 정신을 무시한 신군부가 가혹한 독재를 하다가 2차 시민혁명을 맞아 항복한 두 번 째 승리였다.


필자는 6월항쟁 전 파리13대학에서 “프랑스혁명과 한말변혁운동연구”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졸업하고 소르본대학교 프랑스혁명연구소에서 대석학 미셀 보벨소장의 세미나에 참석하는 등 프랑스혁명을 계속 공부하고 있었다. 그 때 프랑스혁명연구소가 개최한 “왜 러시아혁명보다 프랑스혁명이 인류에 끼친 영향이 더 큰가?”라는 세미나에도 참석했었다.


한마디로 요약하기 힘들지만, 대체로 프랑스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와 삼권분립, 사적소유권, 진실을 종합적으로 갖춘 부르주아 혁명임을 입증했다. 특히 데카르트가 인간의 이성(理性)을 발견한 이후 발생한 프랑스혁명은 러시아혁명과 차이가 컸다. 러시아혁명은 공산당 유일체제를 지향하며 자유가 없는 집단주의로 국유화한 국가주도정치로 인간의 행복과 번영을 박탈하는 반인륜적 사회주의적 전체주의 체제라는 점에서 프랑스혁명이 보다 인간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혁명 200주년 대회의 의미]


프랑스혁명연구소는 혁명 200주년을 맞으면서 세계차원의 토론회를 준비중이었다. 보벨교수는 나의 박사논문을 읽었다고 하면서 한국에서 한말변혁운동과 동학농민전쟁과 같은 혁명운동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특히 4.19혁명은 프랑스대혁명과 궤도를 같이하는 시민혁명이 범주에 있다고 말했다.


“한말변혁운동과 프랑스혁명”이라는 제목의 나의 논문은 한국근대화운동을 처음으로 프랑스와 세계 학계에 알렸다고 볼 수 있다.


1989년 7월 14일 프랑스혁명 200주년, 프랑스대혁명 기념 세계대회에 필자는 한국팀을 편성해 한국대표들의 논문 발표를 주선했다. 그래서 민석홍 서울대교수의 “로베스피에르 연구”와 정창렬 한양대교수의 “1984 갑오농민전쟁연구”를 발제자로 선정해 발표했다.


한국 교수 최초로 프랑스 학계에 알린 두 교수의 논문은 당시 봉건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마르크스의 “동아시아의 봉건제부재“론에 중요 참조논문으로 봉건제의 존재를 알리는 역할을 했었다. 이는 또 한국에서 최초로 프랑스혁명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75년 서울의 지성인을 위한 월간잡지 ‘사상계’의 부완혁 사장이 전화를 했다. 파리특파원 3년차였던 나에게 각별한 장거리 전화를 했다. “내 딸이 파리유학을 가는데, 잘 도와주기 바란다”는 부탁이었다. 4.19혁명 후, 곧 이은 6.3 데모에서 많은 운동권 후배들이 나왔던 시기였다. 사상계는 진보적 논평들과 구미의 국제평론들을 소개해 지식인 독자가 많았다. 그래서 학생때 사상계에 친구들과 부완혁 사장을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막걸리 파티의 추억도 있었다.


[소르본대, 4.19혁명 주제 박사논문 처음 나와]


사회학과 출신인 부 양은 전공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수년 후 찾아와서 졸업논문을 써야 하는데, 주제를 정하기 어렵다고 말하기에 “대한민국에서 자랑할 테마는 4.19혁명이 있는데,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프랑스대혁명의 나라에서 20세기 아시아 최대의 자유민주주의 혁명인 4.19혁명를 쓰면 보람이 있을 것”이라고 추천했다. 대체로 한국의 유럽유학생들은 4.19혁명에 관해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프랑스혁명에 견주어 규모나 이념, 국제정치와 문명면에서 영향이 빈약하다는 편견 때문이었다.


나는 후에 부 양으로부터 “아시아 유일 민주주의혁명, 4.19혁명의 역사적 의미”란 제목의 두꺼운 불어논문 책을 받았다. 그 후 이 사실을 잊고 지냈다. 그 사이 부정남교수는 작고했고, 4.19혁명 60주년을 맞았다. 그해에 나는 보훈처에서 4.19유공자로 선정돼 수유리 4.19공원에서 60주년기념식장에서 이낙연 총리로부터 유공자의 상패와 훈장을 받았다.


이런 과정 가운데 필자는 부정남 교수의 소르본대학교의 박사논문 ‘419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찾아냈다. 그는 논문을 1부 준 후 귀국했던 것이다. 4.19공로자 사무실을 방문, 옛 동지들과 만나 부교수의 4.19논문을 ‘번역출판하자’고 제의했다. 모두가 찬성하면서 4.19공로자회에서 주관해 번역출판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자금이 없어 출판할 수 없었다. 대학후배 박한수 동지와 같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나는 파리 소르본대학교 프랑스혁명연구소에서 연구작업을 했음으로 출판사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았다. 200주년 기념식때 수많은 새로운 논문들이 쏟아져 나와 발표하는 현장을 지켜보았다. 여기서 내가 구성한 한국대표단이 2개의 논문을 발표했던 것이다.


그 때의 연구논문 작업이 바로 200년간 프랑스혁명사의 역사와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발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도 있는 ‘프랑스혁명 200주년기념총서’였다. 연구를 통한 논문작업은 200여년 세계사의 집약이며 발전의 역사였다. 프랑스와 유럽은 이렇게 논문과 저술을 통해 혁명의 역사와 이념, 문명, 철학, 문학 등을 발전시켜 왔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4.19혁명에 대한 논문은 지난 60여년간 단 1편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교수의 소르본대학 졸업논문이 유일무이한 연구업적이라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석사논문조차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적어도 4.19혁명의 역사는 사상사, 경제사, 문화사, 문명사, 풍속사 그리고 사회경제 발전사 등을 총괄 하는 하나의 한국 특유의 거대한 시민의 역사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박사는 커녕 석사논문 한 편도 나오지 않았다니? 그러니 한국 대통령이라는 자가 4.19혁명은 ‘촛불혁명의 도화선’이라고 말도 되지 않는 말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4.19혁명연구소, 4.19세대가 세우자]


4.19혁명은 프랑스혁명의 “아시아판 대혁명”이라고 말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묻고 싶다. 지난 60여년 보훈처와 4.19공로자회는 무엇을 했는가?


특히 1987년 6월항쟁은 4.19혁명의 계승발전이 되어야 함에도, 586정치세력이라는 불청객이 자유민주선진국을 사회주의적 전체주의로 빈곤화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4.19세대라도 늦었지만 4.19연구소를 세워 후세의 연구업적을 만들어 내야 한다.


*필자: 주섭일(Why Times 칼럼니스트 고문, 전 중앙일보 파리특파원 국제문제대기자, 정치학박사)

TAG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whytimes.kr/news/view.php?idx=11396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주섭일 Why Times 고문 주섭일 Why Times 고문의 다른 기사 보기
  • 언론인/ 사회와 연대 회장
    정치학 박사
    전 중앙일보 파리특파원-국제문제대기자

    저서: 사회민주주의의 길(사회와 연대, 2008) 등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사회와 연대, 2017)
    특파원이 추적힌 북한 핵(사회와 연대, 2016)
    한반도 통일대박과 1990 독일통일 (사회와 연대, 2014)
    북의 3대 세습과 평양의 봄(사회와 연대, 2011)
    정치변화와 사회민주주의 (사회와 연대, 2002)
    김정일과 부시의 대타협(두리미디어, 2008)
    새정치와 이원적 민주주의 (사회와 연대, 2012) 등 다수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정치더보기
북한더보기
국제/외교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