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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섭일 칼럼] 4.19혁명의 민주주의 정신과 586전대협세력(1) - 4.19혁명, 21세기 관통하는 자유민주주의 시대정신이 되다 - 주미대사, 경무대앞 시위대에게 ‘대통령 하야성명’ 발표했다 - 1987년 6월항쟁은 민주주의 승리인가, 전대협주사파의 승리인가
  • 기사등록 2022-04-08 22:13:25
  • 수정 2022-04-10 15: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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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4월이 오면 4.19세대는 자유민주주의의 승리 후 정치권이 권유했던 정치참여를 왜 거부했는지 회고한다. 4.19세대는 일제히 “학원으로 돌아갑니다” 합창했었다. 4.19세대는 모두 대국민 약속을 지켰다.


1960년 4월 26일 오전10시경 백만 서울시민의 시위도중에 경무대(현 청와대)에서 시위학생 대표 5명과 송요찬 계엄사령관, 김정렬 국방, 허정국 무위원 및 매카나기 미국대사의 하야권고를 받고 이승만대통령은 하야성명을 구술했다. 송 계엄사령관이 주선한 시위대학생의 발언은 각료들과 미국대사와 똑 같았다. 이대통령은 하야를 재촉받고 있었다.


주저하는 이대통령에게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마저 귀에 대고 하야설득에 가담했다. 노(老)대통령은 학생들을 직시했다.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각하가 하야하시는 길만이 나라를 구합니다. 모든 국민이 원합니다!” 매카나기 대사를 보고 대통령은 다시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물었다. 미국대사의 답을 확인하려고 했다. 대사는 “사퇴성명을 지지합니다”고 말했다. 이대통령이 곧장 하야성명 발표했다.


“1)국민이 원하면 사임하겠다 2) 많은 부정이 있었다고 하니 다시 선거하도록 하겠다 3) 이기붕 의장은 물러나도록 했다 4)국민이 원하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주한 미대사 경무대앞 시위대에게 이승만대통령 하야 발표하다]


4월 19일부터 전국을 휩쓴 학생-시민데모에 老대통령이 굴복하는 순간이었다. 오전 10시 40분 미국대사가 먼저 자리를 떴다.


그 때, 나는 경무대앞 계엄군의 탱크 위에서 시위대와 같이 미국대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카나기 대사는 탱크앞에 멈추고 “여러분! 곧 끝납니다. 곧 발표합니다” 이어서 대사는 “하야!(Retire!)합니다”라고 말했다. 시위군중은 ”이승만 하야!“라고 부르짖고 만세를 불렀다. 백만여 명의 함성이 물결치며 광화문광장으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군중을 헤치며 동아일보사로 향했다. 정문에 시인 이상로 기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신문사 문앞 계단에 앉아 ”우리는 드디어 이겼다! 이승만 하야“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7일간 시위투쟁을 간략하게 묘사하는 419혁명승리를 기록한 기사를 써서 시인에게 넘겼다. 나는 1960년 초부터 동아일보 나절로 주필 요청으로 ‘대학생논단’에 시국칼럼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원로논객 동아일보 나절로 주필을 모시고 우리는 막걸리 축배를 들었다. 빽빽한 4.19혁명 승리의 환희로 가득 찬 신문 호외에 나의 기사가 박스로 보도되어 있었다.


나절로는 “고생했어요! 무엇보다 민주주의 승리를 위해 한잔 하세!” 하며 막걸리 축배를 들었다. 며칠 후 이상로 시인이 나에게 책 한권을 보내주었다. “피어린 4월의 증언”이라는 4.19혁명 학생투사들과 교수 시위에 가담했던 대학교수들의 글을 담은 증언이었다.


4.19 혁명 대열에서 같이 뛰다가 유명을 달리한 친구 동지들의 명복을 빈 나의 애도문(哀悼文)도 실려 있었다. 그런데 4.19혁명 후 대학생으로서 정계의 정치입문 요청을 받았다. 우리는 모두가 “학원으로 돌아간다”고 답했다.


얼마 후, 나는 저명한 논객인 주요한 시인의 스피치라이터로 일하게 되었다. 1주일에 2번 사직공원 옆 자택에서 아침을 같이 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주말에 원고를 직접 갖다 주었다. 그런데 7월에 서울대학교 국민계몽대가 출범했으니 나와 달라는 요청을 받아 회의에 나갔다. 혁명 후 국회위원 선거감시단에 동참해달라는 요청을 받아 참여했다.


[서울대 게몽대 총선감시단, 경남창령에서 4.19의미 홍보하다]


서울대 국민계몽대는 나를 경남창령 선거구에 배치했다. 사회학과 신용하, 황활원, 정치과 박종열, 국문과 김 모등 5명이 한조였다. 우리는 신영주 자유당 후보의 낙선이 목표라는 요청을 받았다. 7월 초순에 창령초등학교 선거사무실에서 각자 만나기로 했다. 정치과 이수정군의 대구 집에서 하루 묵으며 협의하고 떠나기로 했다.


서울을 박 군과 같이 떠나 이 군집에서 하룻밤 지냈다. 열차에서 4.19선전과 양담배 계몽운동을 하기로 했다. 열차에서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 말보로 켄트 등을 피우는 부르주아들이 많았다. 내가 국산애용을 설명하며 양담배를 압수해 박 군의 자루에 넣으며 돌던 중 정치과 박봉식 교수님을 만났다. 박 교수는 방학을 부산에서 지내기 위해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박교수와 향후 한국정치발전과 개혁에 관해 의견을 경청했다.


대구에 하차하니 압수한 양담배가 한 자루였다. 우리는 대구매일신문 사회부에 가서 압수 양담배처분을 부탁했더니, 사회부장이 양담배 화형식을 하면 기사로 다루겠다고 제안했다. 우리는 신문사 뒷문 마당에서 화형식을 한 후 바로 이수정군 집에 도착했다. 자유당후보 신후보가 이승만의 자유당소속으로 당선이 유력함으로 낙선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 박기정 후보 당선이 우리의 과제였다.


그러나 선거운동은 선거법상 금지였고 투표독려와 4.19혁명의 의미를 설명하고 모두가 투표하도록 독려하는 것만 허용되었다. 우리는 “꼭 투표합시다”는 구호를 외치며 유권자들에게 선거법 해설과 4.19혁명의 의미 등을 설명하면서 동네마다 유세 비슷한 선거홍보를 하며 다녔다.


우리가 창령초등학교에서 개표를 참관하는데, 느닷없이 참관인 수 명이 투표함 등에 불을 지르는 사고가 터졌다. 참관좌석을 둘러보니 개표종사원들과 참관인이 우리를 힐끔거리며 보고 있었다. 신용하, 박종열, 주섭일 황활원 4명은 운동장에 나와 박은 서울로, 신용하와 황군은 부산으로 떠났다.


이튿날 신문에 창령선거구 유권자들이 민주당 박후보가 자유당을 이길 수 없게 되자 운동원들이 불을 지른 것으로 보도되어 있었다. 창령선거구는 그후 재투표한 결과 민주당 박기정후보가 당선되었다. 4.19혁명의 바람이 세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체험한 셈이었다.


[서울대 민족통일연맹 남북학생회담 시도로 운동권 수배되다]


1960년 7월 총선에서 윤보선 선생과 장면 박사의 민주당이 대승하여 집권했으며 민주화가 순풍을 달 것으로 모두가 믿었다. 그러나 윤보선 대통령의 구파와 장면 총리의 신파가 분열하더니 사사건건 싸움을 시작하는 바람에 4.19혁명의 의미가 퇴색하고, 우리는 다시 국회에 쳐들어가 “제발 싸우지 말고 민생정치를 해달라!”고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신구파 싸움은 계속되었다. 서울대의 4.19혁명 주체들은 곧 민족통일연맹(민통련)을 창설하여 통일운동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남북학생회담을 판문점에서 하기로 합의했으나 장면총리의 만류와 여론의 반대로 경찰기동대가 길을 막아 북으로 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민통련은 “가자 판문점으로”라는 구호를 부르짖다가 친북적 학생세력으로 낙인찍혀 모두 피신하는 신세로 전략했다.


정치과 윤식, 이수정, 유세희, 이영일, 박종렬 불문과 조동일, 주섭일, 사회학과 황활언 염길정 철학과 최동전 한상렬과 서울법대 황건, 심재택 등이 보안법위반 혐의로 수배당해 도망 다니는 신세가되어 지하에 숨었다. 나는 불문과 후배들이 경찰과 특무대가 서울대운동권 주동자라는 수배삐라를 주워 주었다. 운동권으로 수배라니? 억울했으나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남북학생회담 추진으로 인해 용공세력으로 몰려 수배당한 것이다.


나는 회담에 참석하려고 북으로 가다가 경찰기동대에 막혀 도망다니기 일쑤였다. 결국 경북 포항의 구룡포 병원에서 2개월을 피해 있었다. 구룡포 병원 장남이 서울외대 노서아어 학과 이병주였는데, 서울대 국사학과 정창렬, 서울공대 화공과 이정선과 대구출신 한 클럽으로 토론모임을 했었다. 나는 구룡포에서 동해바다를 벗삼아 4개월 도피 후 교정에 나타났다. 윤식, 이수정, 이영일 등이 모두 체포되어 재판이 끝난 후였다.


내가 대학캠퍼스에 나타났더니, 서울대 담당 동대문서 정보과 차형사가 나를 잡아서 연행했다. 차 형사는 4.19혁명 자술서를 쓰게 하고 방면해주었다. 이후 나는 운동권과 단절하고 공부하려고 했다. 그러나 문리대 정치과 김중태, 김정남, 현승일, 김도현, 박범진, 김경재 미학과 김지하등 후배들이 4.19 데모의 노우하우를 말해달라고 요구해 한동안 운동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1963년 9월 서울신문사 견습시험을 보고 수석으로 합격하면서 운동권과 단절하기로 맹세했다. 특히 서울신문에서 동대문경찰서-서울대 출입을 명받아 완전 발을 빼지 못했다. 그리고 1965년 7월 중앙일보 창간사원으로 옮김으로서 운동권과 절연할 수 있었다.


[동대문서 출입기자, 6.3사태 시위조종혐의 중정에서 고문 받다]


1964년 3월초 나는 서울신문 동대문경찰서-서울대학교(당시 종로구대학로에 서울대문리대, 법대, 미술대, 의과대에 있었다. 일제때 경성제국대학터) 출입기자로 한일협정 반대데모를 취재했다. 서울문리대를 중심으로 운동권 후배들을 만나 대화로 토론도 하며 취재했다. 당시 동아일보 이인철, 경향신문 지용우, 한국일보 갈우철, 조선일보 홍현우 등이 같이 출입했다.


서울대 최문환 총장실에서 이수성 비서실장(김영삼대통령시절 국무총리)을 만나 브리핑을 듣고 학생시위를 취재했고, 운동권학생 집합실인 문리대신문 편집실을 찾아 김중태, 현승일 김지하, 김도현, 김정남 송철원 등을 만나 취재했다. 기자실에 돌아와 학생시위 동향등을 브리핑했다.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등 3인방이 주도하는 서울대 시위는 5.16군사정권의 한일협정 비준반대시위를 주도하는 운동권의 총사령부였다. 급기야 6월3일 전국차원으로 격렬시위가 확산된 후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서울대 중심으로 데모주도 운동권 체포작전이 벌어졌다.


4일 새벽 5시30분 동대문서 수사과에 취재도중 나는 중앙정보부요원 2명에게 체포되어 ‘남산’(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다. 입구부터 “배후조종자 주기자 체포”라고 요원이 외쳤다. 5일간 ‘남산’의 고문을 당했다.


취조내용은 주로 ‘인민혁명당’의 시위배후임을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운동권을 취재해 정보를 수집 보도했지만, 포섭을 전혀 당하지 않았다. 문리대 정치과 송복 선배가 원고청탁을 하여 시국칼럼을 수 차 써주었을 뿐이다. 아무튼 “자백하라”는 고함소리와 함께 몽둥이로 얻어맞는데 공포를 느꼈다. 3일후 심문관이 심문했다.


첫 질문이 “인혁당 간부로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을 배후조종한 사실을 자백하라는 호통이었다. 나는 안심했다. 인혁당의 소문을 들었지만 관계가 없었고, 전혀 접촉도 없었기 때문이다. 심문관은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김정남의 조서를 읽으라고 보여주었다. 나는 안심했다. 자백조서가 가짜임을 대번에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 선배로부터 인혁당 입당을 권유받았고, 그의 지시로 데모를 했다”는 것이 자백 내용이었다. 나는 “취재를 위한 접촉은 했으나 이따위 엉터리수작을 한 적이 없다”고 고함쳤다. 그리고 “인혁당이 무엇인가? 기자생활동안 이름조차 듣지 못했다. 자백조서들은 조작된 것이 아닌가!” 심문관 2명은 움칫하더니 조서들을 주워 갖고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신사가 중정 과장이라고 소개하면서 “미안하다, 우리가 잘못 짚었다. 여기서 한 일은 밖에서 절대로 누설하지 말라”고 말했다. 설렁탕 두 그릇이 와 같이 먹었다. “여기서 한 일을 절대 말하지 않는다”고 서약서를 쓴 후, 석방되었다. 신문사에 돌아왔더니 이목우 사회부장이 “고생했어, 갑자기 안보이기에 그들의 짓임을 알았다. 우리 사장이 서약서 쓰고 자네를 석방시켰네”라고 말했다. 나는 사장이 아니었다면 억울하게 죽을 수도 있었다는 위기감을 비로소 깨달았다.


[5공 해직기자 족쇄를 벗기 위해 6월항쟁 시위에 참여하다]


나의 운동권 시절은 여기서 끝났다. 그러나 운동권 후유증은 오래 남았다. 첫 번째는 1972년 중앙일보 파리특파원 발령을 받았을 때였다. 여권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2개월이 지나니 모두가 “언제 파리에 가느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총무과에서 신원조회를 기다린다는 답이었다. 중앙정보부에서 여권허가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두열 치안국장을 찾아가 항의했더니 중앙청 국장급 신원보증서 2통을 받아오라는 것이다.


먼저 감사원 염길정 공보관을 찾아가 부탁했더니 바로 해주었다. 다음에 과학부장관 장성태 비서관의 보증서도 받아 제출했다. 염군은 나와 4.19 동지이고 장군은 문리대 동창으로 고향친구이다. 3일 후 치안국장실(오늘의 경찰청장)에 제출했다. 외무부가 여권이 나왔다는 전화를 했다.


나는 1972년 7월 2일 대한항공편으로 도쿄로 갔고 이어 도쿄-파리는 일본항공 편으로 파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9년간 특파원 생활을 성공적으로 뛰고 있을 때인 1980년 7월, 나는 느닷없이 본사에서 해직통보를 받았다. 전두환의 5공 정부가 언론인 강제해직을 통보했다는 것이다. 나는 하루아침에 파리에서 낭인이 되었다.


너무 억울한 사회정치적 차별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파리 13대학교 앙드레 카스탈도 주임교수의 정치과 박사과정에 등록하여 6년간 동안 박사논문을 썼다. 정치학 강의를 듣고 국제정치 정세를 공부했다. “프랑스혁명과 한말변혁운동의 비교연구”라는 논문으로 최우수성적(Mention honorable)으로 1986년 5월 정치학박사를 수여받았다.


나는 서울에서 6월 항쟁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1987년 4월 귀국했다. 박사논문을 직접 불역하여 “한말변혁운동과 프랑스혁명”제목으로 서울 일월서각에서 출판했고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나는 곧장 1987년 6월항쟁의 시위에 적극 참여했다. 언론계에 복직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1987년 6월 항쟁 시위에 참여는 마지막 해직기자멍에를 벗기 위한 최후의 투쟁임을 다짐했다.


대선과정에서 박찬종, 홍사덕, 이철, 장기욱 등 서명파 의원들 초청으로 재야 정치인 예춘호 선생, 제정구 청년연합대표 등과 후보단일화운동에도 참여했다. 김영삼-김대중 두 후보중 한명을 추대해야 군정후보 노태우를 제쳐야 한다는 것이 후보단일화 운동이었다. 그러나 “3후보 필승론”의 오만에 빠진 DJ-YS의 양보 거부로 노태우가 승리하는 역결과를 낳았다.


[4.19 민주주의 정신과 대립되는 586 전대협 정치인 전향하라]


1987년 6월 항쟁은 4.19 민주화운동을 계승한 시민항쟁의 승리로 나는 이해했다. 실은 386세대라는 운동권의 승리임이 은폐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아무도 모른 ‘종북주사파 386학생세력’의 승리임을 전혀 알지 못했다. 오늘 ‘586 전대협 정치인’으로 호칭되는 전대협 학생세력이 6월항쟁의 민주주의 승리를 날치기했다는 것이다.


586전대협세력은 북한 주체사상으로 세뇌당했다고 해서 주사파로 호칭된 학생운동세력이다. 처음부터 한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체재 이행한다는 전체주의 이념의 소유자들이라는 것이다. 한국정치사에서 4.19 대학생 세대는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이념을 정체성으로 삼은 순수 민주주의 세력이었다. 그러나 586전대협 세력은 4.19세대와는 정체성이 전혀 다른 종북주사파 학생집단이었다.


4.19정신은 1950년 6월 25일 북한 김일성의 선전포고 없는 남침으로 적화위기 앞에서 유엔안보리가 16개국 유엔회원국의 파병을 단행함으로서 북한군 남침의 목표, ‘남한적화’를 좌절시킨 것이다.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파괴하고 북한식 사회주의화를 시도한 6.25전쟁은 유엔군 파병으로 좌절되었던 것이다.


4.19혁명은 유엔군파병의 목표 한국 민주주의-시장경제의 공고화를 위한 한국대학생과 시민의 민주혁명이었다. 그러나 586전대협 세력은 위대한 4.19혁명의 승리를 무산시키기 위한 민주주의 파괴의 음모세력으로 규정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즉, 586 정치세력은 그래서 4.19 민주혁명을 ‘적’으로도 규정되는 반역세력이라 말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필자: 주섭일(Why Times 고문 칼럼니스트, 전 중앙일보 국제문제 대기자,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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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학 박사
    전 중앙일보 파리특파원-국제문제대기자

    저서: 사회민주주의의 길(사회와 연대, 2008) 등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사회와 연대, 2017)
    특파원이 추적힌 북한 핵(사회와 연대, 2016)
    한반도 통일대박과 1990 독일통일 (사회와 연대, 2014)
    북의 3대 세습과 평양의 봄(사회와 연대, 2011)
    정치변화와 사회민주주의 (사회와 연대, 2002)
    김정일과 부시의 대타협(두리미디어, 2008)
    새정치와 이원적 민주주의 (사회와 연대, 2012)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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