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18-03-20 16:08:37
  • 수정 2018-03-21 13:13:11
기사수정
-어려운 말과 복잡한 문장이라곤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따분하기 그지 없는 330페이지의 책
-‘개념 없는 직관은 공허하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전통의 부정이 아니라 창조적 계승에서 나온다
-현장 전문성도 없고 사실관계도 빈약한 얼치기 진보의 주장에 이해 관계자들이 끌려다니는 모순


▲ 330페이지의 책이 이렇게까지 쓸만한 내용이 없을 줄이야.


이성대 교수의 ‘배움이 없는 학교, 프레임을 바꿔라’는 어려운 말과 복잡한 문장이라곤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따분하기 그지 없다.

330페이지의 책이 이렇게까지 쓸만한 내용이 없을 줄이야.

왜 비슷한 얘기를 써도 일본인이나 미국인들보다 내용이 빈곤한지 모르겠다.


이따위 의미도 없이 지겹기만 한 쓰레기를 읽을 시간엔 경인교대 총장을 지내기도 하셨던 허숙 교수님의 [교육과정과 수업]을 3번 재정독하여 교육 철학의 큰 줄기를 바로잡는 게 훨씬 유익하겠다.


그 책은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처럼 학교 교육과정을 계획, 수행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딜레마들을 질문을 통해 고민하고 그에 대한 답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교육 철학의 입장들을 돌아볼 수 있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섹스스캔들에 빠져있는 안희정 충남지사의 서평은 건너 뛰더라도, 김석중 부산 교육감은 ‘바람직한 교육의 방향을 이상이 아닌 현실의 토대 위에서 치밀하게 천착’했다고 하는데 책을 읽어보기나 했는지 의심스럽다.


이렇게 사실 관계가 하나도 안 맞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이상이 아닌 현실의 토대 위에서 썼다고 하니 어이가 없다.


본래 추천 서평은 으레 한 페이지 안 들춰보고 좋은 말만 써주는 게 관례라지만 너무 형편 없다.


무언가를 비판할 때는 제발 부탁이니, 좀 알아보고 제대로 썼으면 좋겠다.


논어의 학즉불고學則不固를 운운하며 4차 산업혁명이니 알파고니 미래 사회의 융합과 불확실성이니 운운하며 지식 교육의 무용성을 이야기하지만, 본인이 창의성과 새로운 발상의 예시로 든 벤저민 프랭클린이나 과학혁명, 다윈의 진화론 등은 철저히 서구의 축적된 지적 전통의 계승 과정에서 출현했다.


창의지성교육이 ‘명저 교육’을 통해 내세우는 것처럼, 패러다임의 전환은 전통의 부정이 아니라 전통의 창조적 계승에서 나오는 것이다.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은 지적 유산과 만나지 못했을 때, 경험의 확장과 지적 심화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저 일회적인 호기심으로 끝나고 만다. 칸트의 말처럼 ‘개념 없는 직관은 공허하다.’


본인은 이 사례들이 당대에 절대적 진리라 여겨졌던 지식들이 얼마나 상대적이고 가변적인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나 본데, 이 사례들은 ‘지식들은 가변적이니 배울 필요가 없다’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지식과 명제는 언제나 잠정적이고 시대적 현실과 당대 인류의 인식능력에 제한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식의 잠정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검증하고 수정하는 것이지 지식 교육의 무용성을 주장하며 구체적 교수 학습 방법조차 말해주지 않는 추상적인 말들로 때울 수는 없는 것이다.

지식의 위대함은 스스로 오류를 검증하고 수정할 수 있는 이성의 작동 방식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애초에 기존 지식을 검증하고 수정하는 것은 배경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지식의 잠정성을 교육하는 것과 지식 교육의 부정은 다른 층위의 문제다.

듀이의 진보주의 교육론에 경도되었던 학교 교육이 학력의 저하로 이어져 스푸트니크 쇼크로 브루너의 학문 중심 교육이론이라는 반동으로 귀착되었다는 교육사를 돌아볼 필요를 느낀다.


기업이 자본의 논리를 강요하기 때문에 기업에서 써먹을 수 있는 교육을 해야한다는 건 교육을 대상화할 뿐이라는 부분과, 교육이 사회 모순과 문제를 인식하고 사회를 바꾸어가는 사람을 길러내 위계질서를 해체하고 진정한 평등과 자유를 실현해야 한다는 부분에선 그냥 웃음이 나왔다.


교육의 목표엔 사회 질서의 안정과 자아의 완전한 실현, 교과의 본질을 실현하는 것 등 다양한 게 있어 이 목표만 중요하고 다른 목표는 안 중요하다고 잘라 말하는 것은 위험한 주장임을 넘어 매우 유치하다.


그것은 사회의 정치적 현실에 따라 그 강조점이 달라질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다.

집단주의 광기에 빠진 사회에선 자아를 실현하여 개인으로 깨어나는 교육을 하는 게 필요할 수 있는 것이고, 식민지 시기엔 민족적 주체를 자각하는 게 과제일 수 있는 것이고, 전쟁 후엔 교육을 통한 재건이 필요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더군다나 기업은 재벌과 같은 인적 주체와는 달리 정부와 가계와 같은 경제주체의 하나일 뿐인데 너무 경제학적으로 무지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키우란 말은 재벌의 이익에 영합하라는게 아니라,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노동자로서 또는 자영업자로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경제인으로서의 실질적인 지식과 기능을 갖춘 사람을 원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고 사회가 움직이는 데는 재화와 비용이 필요하고, 이를 생산하고 분배하는 건 인간이 먹고 숨쉬고 움직이는 데 필연적인 것인데 도대체가 인간의 경제 문제에 완연히 떨어진 인간 본연의 순수한 성장과 발달이 무엇인지 그로써 만들어지는 인간상이 무엇인지 책에는 설명도 안 되어있고 그냥 기업이 싫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기업은 그저 자기 이익을 위해 사람을 필요로 할 뿐이라 나쁘다는 것인데, 이 사람이 생각하는 교육에는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과 자유 계약의 개념이 갈 곳이 없다.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에서 ‘참새는 해로운 새’ 부분을 전문가들이 권력에 아첨한 사례로 인용하며 기성 전문가 집단의 권위를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부분에선 정말 뜨악했다.

그것은 단장취의를 넘어 하나의 왜곡이었다.

오히려 그것은 마오쩌둥이 전문가 집단의 비판과 의견을 억압한 채 정치논리만을 강요해 일어난 참사였다.


교육은 해당 분야의 전문성을 가지고 잠정적인 진리의 진보를 추구하는 진리 공동체를 존중하고, 진리가 형성되는 과정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불변의 객관적 지식이 없다고 하더라도 학계의 엄정한 검증 절차에 의해 형성되고 합의된 정통과학과 근거 없는 풍설을 한데 묶은 유사과학을 동격에 놓는건 크나큰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문명의 계승 기능을 해야할 교육은 이러한 분별을 가르칠 의무가 있다.

평화의 댐과 4대강 이야기는 꼭 여기에 들어가야 하는 필수적인 것인지도 불만이다.


수능을 비판하면서, 과전법의 제도적 배경이나 내용이 중요하지, 과전법이 제정된 연도를 암기하는 게 뭐가 중요하냐고 하는데 수능은 단순 암기를 요구하는 시험이 아니다.


애초에 단순 암기를 묻는 문제도 나오지 않고 <도표>와 <보기>를 통해서 다양한 단원과 영역의 내용을 하나의 관점으로 분석해서 내용적으로 타당한 것을 선별할 수 있는지 독해력과 이해 정도를 측정한다.


저자가 말하는 바를 정말로 직접적으로 콕 짚어 물어보는 시험은 다른 어떤 시험도 아닌 수능이다.


애초에 수능 따위는 한 번도 안 치렀을 학력고사 아재들이 주입식 암기 운운하며 수능을 향해 엉뚱한 비난을 던져대는 추태는 이제 그만 좀 봤으면 하는 희망이 있다.


학력고사와 수능은 엄연히 다른 원리의 출제 원리를 지닌 별개의 평가 방법이며 이를 구분하지 않고 주입식이니 암기니 운운하는 인사들은 애초에 교육제도니 입시니를 비판할 깜냥이 안되는 것이다.


문제풀이식 교육 때문에 고교 교육이 황폐화된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이해한다 해도 그것이 수능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비난을 당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알파고의 시대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해서 경계를 파괴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전통 학교의 구조나 운영도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 사례로 칸 아카데미와 각종 오픈 교육, 알트 스쿨 등을 현재 제도권 교육보다 우수한 미래 교육의 대안이라도 되는듯 찬양하는 것을 보니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IT기기가 전통적 교과서와 필기구를 대체하고 물리적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완전하게 개인화된 학습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것은 최근 알트스쿨에 관련된 외신들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현실은 언제나 편향된 이미지와는 다른 결을 가지고 움직이는 법이다.

학교가 빠른 사회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반드시 대안적 형태를 띠어야 한다는 듯한 뉘앙스야말로 경박한 접근이라 생각된다.


이성대 교수는 혁신교육지구 사업과 화성시 창의지성교육도시 사업을 주도하여 김상곤 교육감의 혁신학교 사업을 이끌었다.


만약 이 책이 경기도와 화성시의 혁신학교 및 창의지성교육의 철학과 비전을 응축해 요약한 텍스트라면, 그 잘못된 현실인식과 철학의 빈곤 때문에라도 혁신학교와 창의지성교육을 막아야 할 판이다.


선생님들 중에는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충실한 전문성과 높은 식견, 사회에서 수행해야 할 교육의 역할과 제도들의 운용을 포괄하는 거시적인 교육 철학을 갖춘 분들이 계시다.


왜 이런 분들을 뒤에다 두고 사이비 진보학자들이 아는 체하며 앞장 서는 것에 박수쳐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현장 전문성도 없고 명확한 사실 관계에 바탕을 두지도 않은 얼치기 얘기에 왜 모든 이해 관계자들이 끌려다녀야 하는 것인가.


시간이 아까운 독서였다.

욕하려고 읽은 셈 치겠다.

애초에 이렇게 별 다른 내용도 없이 똑같은 내용만 반복하는 글을 뭐하러 300페이지도 넘게 썼는지가 궁금하다.


혁신교육과 배움 중심 수업에 가졌던 기존의 애정도 날라가는 듯한 독서였다.

그냥 사토마나부나 반복하는 게 속이 편할 듯 하다.

무슨 생각으로 경기도인지 화성시인지 교육청에선 이 책을 나눠줬는지 모르겠다.

TAG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whytimes.kr/news/view.php?idx=1013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정기구독
교육더보기
    게시물이 없습니다.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