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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분석] 러시아인들 ‘푸틴 못 믿겠다’ 돈부터 뺀다…전쟁이 무너뜨린 국가 신뢰 러시아 국민들이 은행에서 돈을 빼기 시작했다 2026-08-20
추부길 whytimespen1@gmail.com


[러시아 국민들이 은행에서 돈을 빼기 시작했다]


러시아에서 심상치 않은 돈의 이동이 시작됐다. 8월 들어 불과 2주 만에 러시아 은행에서 약 34억달러가 빠져나갔고, 앞선 6~7월에도 약 118억달러가 인출됐다. 여기에 러시아 정부가 재정적자를 메우는 핵심 수단인 국채(OFZ) 경매마저 지난달부터 무기한 중단됐다. 전쟁을 위해 국가의 돈을 소진해 온 푸틴 정권이 이제 러시아 국민의 ‘국가에 대한 신뢰’까지 소진하기 시작한 것 아니냐는 경고음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19일, “러시아에서는 8월 첫 2주 동안 약 34억달러가 은행에서 빠져나갔다”면서 “여기에 6월과 7월 약 118억달러가 추가로 인출된 것으로 전해지면서 불과 석 달도 되지 않아 150억달러가 넘는 자금이 은행 밖으로 이동한 셈”이라고 보도했다. WP는 이어 “러시아 은행권이 전쟁 이후 정부 주도의 군수산업 대출과 기업 부실 증가로 상당한 부담을 떠안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볍게 볼 수 없는 움직임”이라고 짚었다.


더욱 눈여겨볼 대목은 러시아인들이 단순히 은행 A에서 은행 B로 돈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현금 자체를 손에 쥐려는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BBC는 러시아 중앙은행 자료분석을 통해 “올해 러시아의 현금 유통량은 1조5600억루블, 약 200억달러나 증가했다”며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특수한 시기를 제외하면 같은 기간 기준으로 가장 큰 증가폭”이라고 밝혔다.


BBC는 이어 “물론 이를 모두 ‘푸틴에 대한 불신’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면서 “직접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이라 할 수 있는데, 러시아 당국은 드론의 통신을 차단한다는 이유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모바일 인터넷을 반복적으로 끊고 있는데 이것이 주요 요인인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문제는 인터넷이 차단되면 카드와 QR 결제까지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전쟁을 방어하기 위한 푸틴 정부의 조치가 역설적으로 러시아 국민을 다시 현금경제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최근 나타나는 현금 선호 현상을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다. BBC 취재에 응한 한 모스크바 시민은 현금을 가지고 있으면 통제감과 안전감을 느낀다는 취지로 말했다. BBC는 “세금 부담이 높아진 기업들이 현금거래를 선호하면서 비공식 경제가 확대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면서 “결국 전쟁 장기화가 러시아 국민의 일상적인 금융행동까지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국가가 내 돈에 손댈 수 있다’는 공포]


더 위험한 것은 이러한 현금 선호 위에 국가의 민간자산 동원 가능성에 대한 불안까지 겹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러시아에서는 전쟁비용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러시아 경제전문가 알렉산드라 프로코펜코는 “이미 지난달 러시아 정부가 전쟁비용을 마련할 뚜렷한 방법을 찾지 못하면서 기존 예산의 틀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하려 하고 있으며, 결국 그 부담이 민간기업과 러시아 국민에게 돌아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은행 인출 급증을 다룬 보도에서도 정부가 전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개인자산에 손을 댈 수 있다는 우려가 러시아 사회에 존재한다고 전했다. 실제로 전쟁이 길어질수록 정부가 국민의 자산을 어떤 방식으로든 동원할 수 있다는 불안이 확산된다면, 국민 입장에서는 은행계좌의 숫자보다 자신이 직접 보관하는 현금을 더 안전하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커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번 현상의 정치적 의미가 생긴다. BBC는 “러시아 국민들이 거리로 나와 푸틴 퇴진을 외치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 국민의 불안이 자신의 돈을 은행에서 찾아 직접 보관하는 경제적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라고 짚었다.


[국민은 예금 빼고 투자자는 러시아 국채 외면]


더욱 심각한 것은 러시아 국민들이 현금을 찾는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러시아 정부의 또 다른 자금줄인 국채시장까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 통신사인 인테르팍스(Interfax))는 “러시아 재무부는 6월 24일과 7월 8일 OFZ((러시아 연방정부가 발행하는 러시아 국채) 경매를 취소한 데 이어 7월 20일에는 아예 국채 경매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면서 “명분은 ‘시장상황 안정’이었는데, 그러나 재개 날짜는 밝히지 않았다”고 밝혔다. 러시아 정부가 장기간 국채 발행을 멈춘 것은 2022년 우크라이나 전면침공 직후의 금융시장 충격 이후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발행 실적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인테르팍스는 “러시아 재무부는 3분기에 OFZ를 통해 약 1조5000억루블을 조달할 계획이었다”며 “그런데 7월 세 차례 예정된 발행일 가운데 실제 국채가 팔린 것은 7월 1일 한 번뿐이었고 규모도 91억루블에 불과했는데, 변동금리 채권까지 내놓았지만 정부가 받아들일 만한 가격의 응찰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짚었다.


이것은 푸틴 정부에 상당히 심각한 문제다. 인테르팍스는 “서방 금융제재로 해외 자본시장 접근이 크게 제한된 러시아는 국내 은행과 기관투자가를 통해 국채를 소화하면서 재정적자를 메워왔다”면서 “그런데 지금은 국민 쪽에서는 은행 밖으로 돈이 이동하고, 채권시장에서는 투자자들이 정부가 원하는 조건으로 국채를 받아주지 않는 현상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푸틴의 전쟁경제를 떠받치던 두 개의 국내 자금 통로가 동시에 압박받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에 쏟아부은 돈…재정적자도 눈덩이]


문제는 러시아 정부가 바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돈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인테르팍스는“러시아의 상반기 재정적자는 이미 5조 7000억루블에 달했는데, 이는 GDP의 약 2.5% 규모 ”라면서 “러시아 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과 군수산업을 떠받치기 위해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면서 당초 예상보다 빠르게 재정 부담이 커지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OFZ 경매 중단 역시 바로 이러한 재정적자가 확대되는 상황에서 발생했다.


푸틴 정부가 더욱 곤혹스러운 것은 돈이 필요하다고 무작정 통화를 풀 수도 없다는 데 있다. 전쟁 관련 정부지출과 인력 부족, 생산비 상승이 물가를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리를 낮추면 물가와 루블 가치가 다시 흔들릴 수 있고, 반대로 고금리를 오래 유지하면 기업의 금융비용과 부실 위험이 커진다.


결국 러시아 경제는 전쟁을 계속하려면 돈을 더 써야 하지만, 돈을 더 쓰면 물가와 재정이 흔들리고, 이를 막기 위해 돈줄을 조이면 기업과 은행이 어려워지는 딜레마에 빠져들고 있다.


여기에 러시아 경제 내부에서도 경고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국영 개발은행 VEB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였던 안드레이 클레파치는 “러시아가 장기적인 경제전에서 성공하기 어렵다”며 경제·사회적 위기를 경고한 뒤 최근 자리에서 물러났다. 전쟁경제에 대한 비판적 진단 자체가 크렘린에 상당한 부담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Why Times Insight: 러시아 국민들의 ‘조용한 불신임’이 시작됐나]


이번 사태를 단순히 “러시아의 돈이 떨어지고 있다”는 차원에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러시아가 당장 국가부도에 빠진다는 의미도 아니다. 여전히 에너지 수입이 존재하고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자산과 금융수단도 남아 있다. 또한 최근 현금 수요 급증에는 모바일 인터넷 차단과 세금회피 목적의 현금거래 증가라는 현실적 이유가 분명히 존재한다. 따라서 이를 전면적인 ‘뱅크런’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직 과도하다.


그럼에도 이번 변화가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전쟁의 비용이 러시아 국민의 금융행동을 바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22년 침공 직후 러시아 금융시장의 혼란은 서방의 초강력 제재라는 외부 충격에 대한 공포가 주된 원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러시아 내부에서 만들어진 문제가 국민들의 일상으로 파고들고 있다.


우크라이나 드론이 날아오자 정부는 인터넷을 끊는다. 인터넷을 끊으니 카드결제가 막힌다. 국민들은 현금을 찾는다. 전쟁비용이 커지면서 재정적자가 확대된다. 정부가 국채를 팔려고 하지만 시장은 더 높은 대가를 요구한다.


하나하나 떨어져 보이던 현상들이 결국 ‘전쟁’이라는 하나의 원점에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푸틴에게 가장 위험한 문제가 등장한다. 러시아 국민들이 거리에서 푸틴에게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적 지지는 여론조사로 나타나는 반면 국가에 대한 신뢰는 결국 돈의 움직임에서 가장 냉정하게 드러난다.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것보다 직접 가지고 있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려 해도 투자자들이 정부가 원하는 가격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사회에서 줄어들고 있는 것은 단순한 유동성만이 아니다. 바로 국가에 대한 신뢰다.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굴복시키겠다며 시작한 전쟁을 4년 넘게 이어왔다. 그러나 그 대가는 이제 전장에서만 지불되는 것이 아니다. 재정적자와 고금리, 물가 부담과 기업의 금융비용을 거쳐 러시아 국민들의 지갑 속으로 직접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최근 나타나는 현금 선호와 예금 이탈은 푸틴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경고다. 러시아 국민들이 푸틴에게 공개적으로 반대표를 던지는 대신 자신의 돈부터 국가의 금융시스템 밖으로 옮기는 ‘조용한 불신임’이 시작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푸틴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영토를 차지하느냐는 훗날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이미 치르고 있는 대가는 분명해지고 있다. 푸틴은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국가의 재정을 소모했고, 이제 그 전쟁은 러시아 국민의 국가에 대한 신뢰마저 소모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푸틴에게 가장 두려운 장면은 러시아 국민이 거리로 뛰쳐나오는 순간보다 먼저 찾아올 수도 있다. 국민들이 “은행보다 내 손에 쥔 현금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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