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부길 whytimespen1@gmail.com

[좌표 합의까지 갔다가 다시 멈춘 협상]
이란이 호르무즈해협 통항 협상의 서명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멈춰 섰다. 이란과 오만은 선박이 통과할 항로의 좌표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에 도달했지만, 통행료와 이란의 선박 통제권, 미국의 해상봉쇄·제재 해제 순서를 놓고 주장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문제는 단순한 조건 다툼만이 아니다. 최고지도자 모즈타바 하메네이가 5개월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가운데 대통령과 외교라인, 혁명수비대(IRGC)가 서로 다른 신호를 보내면서 “도대체 누가 최종 결정을 내리는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커지고 있다.

미국의 군사·안보 전문매체 더워존(The War Zone)은 “지난 5일 이란 외무부는 오만과 호르무즈해협 통항 좌표에 관해 ‘기본적인 이해에 도달했다’며 공동 발표문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면서 “걸프만 진입 선박은 이란 항로로, 출항 선박은 오만 항로로 분리해 이란이 5~7%, 오만이 3%의 통행 수수료를 걷는 안이 검토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더워존은 이어 “그러나 미국 측 관계자들은 이 같은 잠정 항행 조치에 이란의 승인이 필요하지 않다고 반박하며, 중요한 세부사항이 아직 합의되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면서 “이란은 여기에 더해 항만 봉쇄와 제재 해제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요구하며 이행 순서를 놓고도 맞서고 있는데, 이에 반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3일 취재진에게 ‘협상이 지금도 진행 중’이라며 이번이 이란 측에 ‘좋은 문서에 서명할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보면 미국측 주장과 이란 주변에서 실제 일어나는 일과는 완전히 엇박자가 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란의 '얼굴 없는' 최고지도자, 실권 잃은 대통령]
이에 대해 영국의 BBC는 “협상이 좀처럼 마무리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이란 권력이 사실상 통제 불능 상태로 갈라져 있다는 데 있다”면서 “최종 승인권은 최고지도자 모즈타바 하메네이(Mojtaba Khamenei)가, 군사·안보 실권은 이란혁명수비대(IRGC)와 최고국가안보회의가, 실무 협상은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국회의장과 압바스 아라그치 외무장관이, 합의 집행과 경제·민생은 마수드 페제시키안 대통령이 나눠 쥐고 있다”고 짚었다.
BBC는 이어 “문제는 이 사슬의 정점에 있어야 할 모즈타바가 지난 3월 부친 알리 하메네이 사망으로 최고지도자에 오른 뒤 단 한 번도 공개 석상에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라면서 “5개월째 영상도, 음성도 없이 서면 메시지로만 뜻을 전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페제시키안 대통령은 6일 국영방송 인터뷰에서 모즈타바와의 소통이 ‘매우 어렵다’고 토로했다”고 밝혔다.
불과 보름 전인 지난달 21일 인터뷰에서 "최고지도자와의 접촉이 점차 늘고 있다"고 말했던 것과는 정반대되는 설명이다. 승인 도장은 최고지도자가 찍지만, 합의가 틀어졌을 때 책임은 대통령이 지는 구조 속에서 페제시키안이 최근 수차례 사임을 시사했다는 보도까지 나왔으나 대통령실과 최고지도자실은 이를 부인했다.
결국 외무부가 협상안을 만들어도 최고지도자가 이를 승인할 것인지 확신하기 어렵고, 대통령이 합의를 약속해도 IRGC가 현장에서 이를 집행할지 장담하기 힘든 구조가 됐다. 승인 도장은 최고지도자가 찍지만 협상 실패와 경제난의 책임은 대통령이 떠안는다는 점에서 페제시키안의 정치적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협상 테이블 뒤에서 총을 든 IRGC]
이 권력 공백을 실질적으로 메우고 있는 세력이 IRGC다. 미 국방분석기관 크리티컬 스레츠(Critical Threats)는 지난 4일 보고서에서 “현재 이란의 군사 기구가 정권 의사결정을 사실상 주도하고 있으며, 미국을 압도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호르무즈해협 통제권에 대한 실질적 양보를 거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고지도자 군사고문 모센 레자이 소장도 지난 3일 관영매체에 “이란의 드론·미사일 공격이 미군 전력을 역내에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며 “해협 통제권 포기 불가론을 재확인했는데, 이는 아흐마드 바히디 소장이 이끄는 IRGC 강경파의 자신감을 반영한다”는 것이 이 매체의 진단이다.
실제로 IRGC는 지난 6월 정전 합의 이후에도 "승인받지 않은 항로"로 다니는 선박을 이유로 무력 사용을 반복해 왔다. CNN은 지난달 13일, “IRGC는 아랍에미리트(UAE) 유조선 두 척이 항해 시스템을 끄고 경고를 무시한 채 '지뢰가 설치된 항로'로 진입하려 했다며 미사일로 타격했고, 오만 영해에서 발생한 이 공격으로 인도 국적 선원 한 명이 사망했다”면서 “이 공격 이후 정전은 사실상 붕괴됐고 트럼프 대통령은 의회에 '제한적' 군사 조치 재개를 통보했으며, 미 중부사령부는 이란발 선박에 대한 해상 봉쇄를 재가동했다”고 밝혔다.
크리티컬 스레츠(Critical Threats)도 “이달 2일에도 이란 육군 대변인 모하마드 아크라미니아 준장은 이란이 양해각서(MoU)와 정전 국면을 '충분히 활용'해 신규 장비를 반입하고 손상된 체계를 복구·재생산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면서 “협상파인 아라그치 외무장관과 갈리바프 국회의장, 페제시키안 대통령은 일관되게 외교를 통한 실리 확보를 주장해 왔고, 페제시키안은 지난 6월 경제적 이익을 내세워 모즈타바 최고지도자로부터 양해각서 승인을 얻어낸 것으로 전해진다”고 짚었다.
그러나 지난달 정전 압박이 거세지자 강경파 사이에서는 협상파를 향한 '쿠데타' 경고까지 나왔고, 전직 외무장관 만수체르 모타키는 방송 인터뷰에서 역내 미군 기지를 겨냥한 공격을 공공연히 주장했다. 이런 배경 속에 IRGC는 지난달 25일 나흘간의 소강 상태를 깨고 유조선 3척을 다시 공격했으며, "경고에도 불구하고 위험하고 불법적인 항로로 계속 이동했다"고 주장했다.
[정전을 이용해 전력을 복구한 이란]
한편, 이란 군부는 정전 기간을 협상의 시간이 아니라 전력을 재건할 기회로 활용했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고 있다. 이란 육군 대변인은 “양해각서와 정전 국면을 충분히 활용해 신규 장비를 반입하고 손상된 군사체계를 복구·재생산했다”고 밝혔다.
반면 페제시키안 대통령과 아라그치 외무장관을 비롯한 협상파는 제재 완화와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외교적 타협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이 때문에 이란 내부에서는 정전을 체제 회복의 기회로 보는 군부와, 경제 붕괴를 막기 위한 마지막 출구로 보는 협상파의 시각이 충돌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외무부가 미국과 합의문을 완성해도 군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선을 넘는 순간 협상 자체가 무산될 수 있다. 협상의 진짜 한계선을 결정하는 세력이 외교부인지, 최고지도자인지, 아니면 IRGC인지조차 명확하지 않은 셈이다.
["그가 정말 최고지도자였나"… 확인되지 않은 회동설]
최고지도자의 장기 잠행은 이란 안팎에서 각종 추측을 낳고 있다. 반정부 성향 매체 이란인터내셔널은 지난 4일 “페제시키안 대통령이 검게 코팅된 차량 뒷좌석에서 모즈타바를 자칭하는 인물과 짧게 만났으며, 서로 얼굴을 볼 수 없고 악수도 금지된 채 목소리로만 대화했다”고 단독 보도했다. 이란인터내셔널은 이어 “회동 직후 대통령이 보좌진에게 ‘방금 그 사람이 정말 최고지도자가 맞느냐고 물었다”고 밝혔다. 그만큼 최고지도자의 실체에 대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협상이 늦어지는 사이 무너지는 민생]
지도부 간 불통이 길어지는 동안 이란 서민 경제는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뉴욕포스트는 “이란 통계센터 집계로 지난 3월 식품·음료 물가는 1년 전보다 112.5~113.8% 뛰었고, 빵·곡물은 140%, 우유·치즈·달걀은 116.8% 상승했다”면서 “리알화 가치는 달러당 환율이 올해 1월 150만 리알에서 지난달 194만 리알로 30% 가까이 폭락했다”고 보도했다.
폭스뉴스도 이란 일간 자한에사나트를 인용해 “치즈와 버터, 고기를 훔치거나 매장 안에서 몰래 먹어치우는 손님이 최근 10개월 새 늘었다”고 전했다.
미아드 말레키 미국 민주주의수호재단(FDD) 연구원은 "이런 사례들은 일화적이지만 확인된 거시 데이터와 정확히 부합한다"며 "이란은 이미 '티핑존' 안에 들어와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진짜 티핑포인트는 극적인 단일 사건이 아니라 지금 슬로모션으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 즉 통화 붕괴와 2차 세계대전 수준의 식품 인플레이션, 생필품 절도가 겹쳐 빈곤층뿐 아니라 광범위한 계층의 기초 열량 섭취 자체가 무너지는 임계점의 형태로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페제시키안 대통령조차 지난 5일 대국민 담화에서 “이란이 어려움과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적이 국민을 시위로 유도하려 압박을 가하고 있다”며 “이란은 여전히 강하다”고 강조했다.
[Why Times Insight]
이번 국면의 본질은 단순한 ‘협상 지연’이 아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협상안을 실제로 승인하고 집행하며, 그 결과까지 책임질 단일한 권력 주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란은 대외적으로 하나의 국가 자격으로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승인권자와 협상 담당자, 군사적 실행권자, 정치적 책임자가 서로 다르다. 외무부가 합의를 만들어도 최고지도자가 승인할지 알 수 없고, 대통령이 약속해도 IRGC가 현장에서 이행할지 확신하기 어렵다.
따라서 호르무즈 통항 합의가 발표되더라도 이를 곧바로 위기 해소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최고지도자가 5개월째 육성조차 공개하지 않는 상황에서 IRGC의 현장 행동 하나가 정전을 무너뜨리고 협상을 원점으로 되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 이란에서 벌어지는 가장 위험한 현상은 IRGC의 ‘독자 폭주’가 확인됐다는 데 있지 않다. 외교라인과 군부, 대통령과 최고지도자 사이에 실제로 어떤 지휘·승인 체계가 작동하고 있는지 외부에서는 물론 이란 내부에서조차 명확히 알기 어렵다는 데 있다. 이 권력 공백이 길어질수록 미국과의 협상은 표류하고, 경제 붕괴와 민생 파탄의 대가는 이란 국민에게 고스란히 돌아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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