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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5-07 14:4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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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돈 상태의 광주 모습 [사진=김형석/ Why Times]


[첫 번째 지도자 김원갑]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 동안 광주는 혼돈의 도시였다. 더욱이 22일 계엄군이 외곽으로 철수하고 닷새 동안은 무정부 상태였다. 이때 해방구가 된 광주를 이끈 지도부는 전남도청에 상주하던 학생수습위원회와 시민군 조직이었다. 그 중에서도 첫 번째 지도자는 20살의 재수생(정확히는 만 19세의 삼수생) 김원갑이다. 그는 22일 이른 아침에 500여명의 무장시위대로 하여금 시민군을 조직하여 도청을 접수하고 차량으로 광주 시내를 순회하면서 안내방송을 시행하여 시민들을 안정시키는데 기여했다. 


▲ 5.18 당시의 시민군 지도자 김원갑 -사진=Why Times DB]


  그는 또 시내 일곱 곳에 시민군을 배치하여 계엄군의 동태를 조기에 파악하고, 계엄군이 진입해올 경우에 이를 저지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하도록 조치했다. 계엄군의 갑작스런 철수로 맞은 긴급한 상황에서 10대의 김원갑이 취한 일련의 조치는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그러나 재수생이 사태를 수습한다는 자체가 지도부의 취약성을 단적으로 나타낸 증거였기에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김원갑은 그날 저녁에 송기숙 교수의 주도로 결성된 학생수습위원회 김창길(23, 전남대) 위원장에게 지휘권을 넘기게 되지만, 한나절 동안 도청 지도부를 지휘한 데 대해서는 평생토록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김원갑은 1980년 10월 24일 보통군법회의에서 단기 3년6월, 장기 4년을 선고받은 후 고등군법회의에 제출한 항소장에서 “본인은 광주사태에 도청에서 총지휘한 사람으로서 단기 3년6월, 장기 4년을 주시다니 창피해서 명함이나 내놓겠습니까. 저에게 형량을 주시려거든 위원장 김종배나 상황실장 박남선 같이 사형을 주던지, 아니면 무죄를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법의 현명한 재판을 바랍니다.”라고 강변했다. 그는 또 얼마 전 치룬 제21대 총선에도 광주광역시 북구을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며 선거포스트에 기재한 경력에다가 1980년 5.18시민군 총지휘(시민군 대장)이라고 명기했다. 


▲ 5.18 당시 회수한 무기들 모습 [사진=김형석/ Why Times]


  [두 번째 지도자 김창길]


  1980년 광주에서는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도청 앞 광장에서 ‘광주지역 10개 대학 연합 민족·민주화 대 성회’를 주도한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27)이 상징적인 인물이었는데, 5.17비상계엄령이 선포되자 그를 비롯한 각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이 모두 잠적해버리면서 혼란이 발생했다. 따라서 학생수습위원회는 이들이 나타날 때까지 대리하는 조건의 한시적인 임시학생수습위원회로 결성되었다. 위원장 김창길, 부위원장 김종배(조선대), 총무 정해민(전남대), 대변인 양원식(조선대), 무기관리담당 허규정(조선대) 등을 선임하였고, 그 산하에 총기회수반, 차량통제반, 수리보수반, 질서회복반, 의료반을 두었다. 이런 점에서 김원길이 스스로 창출한 ‘셀프 권력’이라면, 김창길은 대학사회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이었던 셈이다. 


  학생수습위원장으로 선출된 김창길은 전남대 농경제학과 3학년이었다. 목포고등학교 때 전라남도 조정 대표선수로 전국체전에 출전했고, 대학에 진학해서는 국비장학생으로 학업에 열중한 모범생이었다. 서클연합회 행사부장을 맡고 있었지만 활동은 거의 없는 편이었다. 각종 시위에도 개인으로 참여할 정도로 민주화를 열망하는 평범한 학생이었으며 운동권은 아니었다. 따라서 광주지역사회의 지도자들이 모인 시민수습대책위원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실행하려는 입장이었고, 강경파의 주장처럼 계엄군과 싸우며 해방구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다만 박남선이 지휘하는 시민군은 형식적인 편제는 수습위원회에 소속했지만 독자적으로 활동을 전개했기 때문에 김창길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김창길의 학생수습위원회가 당면한 과제는 구속자들의 석방이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창길은 시민수습위원회 한완석 목사·조비오 신부 ·명노근 교수 등과 8인 협상단의 일원으로 계엄사와의 협상에 나섰다. 이때 김창길은 회수된 총기 중에서 카빈소총 150정을 반납하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계엄사에 연행된 34명을 석방해왔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학생수습위원회에는 무기반납을 주장한 온건파와 이에 반대하는 강경파간의 갈등이 나타났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비폭력투쟁을 주장한 종교계 인사들의 영향으로 인해 무기회수와 반납에 기울고 있었다.


  마침내 25일 새벽에 열린 학생수습위원회에서는 김창길의 주도로 모든 무기를 반납하기로 결정했다. 시민군의 총기를 회수하여 도청 안에 모아놓고, 모두가 도청에서 빠져나가기로 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윤상원은 무기반납을 반대하던 부위원장 김종배와 상황실장 박남선을 규합하여 무기반납을 막고 시민군을 한군데 집결시켜 전투력을 강화하자는데 뜻을 모았다. 그날 오후 윤상원은 YWCA에서 대기하던 운동권학생 30여명을 데려와서 회의장 옆방에 대기시키고, 회의장에는 강경파인 김종배·허규정 외에도 학생운동권 출신인 윤상원·정상용·이양현이 합류했다. 


  이들은 7시부터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김창길을 비롯한 온건파들을 투항파로 몰아세웠다. 격렬한 논쟁을 마친 9시경에 김창길이 학생수습위원장직을 내려놓고 도청을 떠났다. 이때 박남선이 권총을 들이대면서 김창길을 하차시켰다는 설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 광주시민군 지도자 김종배의 최근 모습 [사진=김형석/ Wjy Times]


  [세 번째 지도자 김종배]


  이렇게 하여 김종배를 위원장으로 한 항쟁파 지도부가 태어났다. 이때 외무 부위원장으로 선출된 정상용의 말처럼, 도청 안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학생수습위원회의 명칭을 민주투쟁위원회로 변경하고, 새로운 집행부를 구성했다. 위원장 김종배, 부위원장 (내무)허규정 (외무)정상용, 대변인 윤상원, 상황실장 박남선, 기획실장 김영철 등이다.


  김종배는 1954년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태어났다. 조선대학교 무역학과에 재학 중 5.18을 맞았다. 보수적인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하였으며, 광주에서도 보수 성향을 가진 동명교회를 출석하고 있어서 사회 참여보다는 사회봉사에 열심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조선대학교에서 라이온스클럽을 조직하고 봉사활동에 앞장섰던 탓으로 평소에는 온순하고 현실에 순응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회변혁을 위해 YMCA에서 모이던 파리코민 스터디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는 22일 전남도청에서 송기숙 교수 주도로 학생수습위원회를 구성될 때 장례위원장을 자원하였는데, 전남대생인 김창길이 위원장으로 선임되자 학교 안배 차원에서 조선대생인 김종배에게 부위원장을 맡겨 겸직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김종배는 장례위원장으로서의 업무에 주력했고, 학생수습위원회는 김창길이 주도했는데 유독 무기회수와 반납에 대해서만 강한 반대의 입장을 나타내며 강경파의 리더 역할을 감당했다. 


▲ 광주 시민군 박남선의 당시 모습 [사진=김형석/ Why Times]


  [시민군 지휘자 박남선]


  학생수습위원장은 해방 광주의 정치 지도자였다. 그러나 시민군 지휘자는 별개 조직이나 마찬가지였다. 명목적인 편제상으로는 학생수습위원회 산하이었지만, 사령관이라는 직함도 없었기 때문에 김원갑이 물러나자 곧장 상황실장 박남선이 그 역할을 스스로 감당했다.  


  한편 일반인이던 박남선(26)이 학생수습위원회에 참여하게 된 것은 24일 저녁부터 25일 새벽까지 진행된 심야회의에서 위원 중에서 일부가 이탈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이런 엄청난 사태를 학생들만 수습한다는 것은 힘들다고 판단하고 황금선, 박남선, 김화성 등 일반인도 포함키로 결정한데 따라서였다. 그러나 이때 박남선은 확대수습대책위원회 입장과는 별개로 시민군을 친위적인 지휘체계로 만들었다. 그는 전남도청 1층의 현관 옆에 자리한 서무과에 상황실을 설치하고 자신이 상황실장을 맡아 조직을 총괄하면서, 후배인 양시영을 부실장, 이용숙을 통제관, 오동일은 경비반장으로 임명하여 시민군의 지휘체계를 완전 장악했다. 


  그리고 군 통신병 출신 예비군 6명으로 정보수집반을 구성하여 도청 3층에 별도 사무실을 두고 계엄군의 통신을 감청했다. 정보수집반은 박남선이 직접 통제한 1급 비밀사항이었다. 이들은 계엄군에게 노획한 무전기를 이용하여 공수부대 주파수를 알아내고 무전을 도청하여 계엄군의 동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한 후 보고했다. 이렇게 수집된 정보를 독점한 박남선은 시민군 사이에서 절대적인 존재로 부상했다. 그러나 그는 확대수습위원회를 신뢰하지 않고 독자노선을 구상했다. 그는 확대수습위원회가 무기 반납을 결정하더라도 정예시민군 30여 명과 함께 끝까지 항전하기로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그가 시위에 가담하게 된 것은 5월 20일 동생 남규가 공수부대원에게 폭행을 당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황룡강 작업현장에서 동생이 전남대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에 올라온 그는 문병을 마친 후 곧바로 시위에 참여했다. 박남선은 시위현장에서 만난 예비군 동료들을 규합하여 투쟁에 나섰다. 가톨릭센터 주차장에 있던 승용차 유리창을 돌로 부수고 시트에 휘발유를 부어 불을 붙인 후에 공수부대가 모여 있는 한국은행사거리 쪽으로 밀어붙였다. 차는 불길에 휩싸였고 검은 연기가 봉화처럼 타올랐다. 


  21일에는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대형버스 7대를 탈취하여 금남로 차량시위를 전개하면서 주목받았다. 그러나 공수부대 총격에 무참히 무너지자, 나주경찰서 무기고 총기를 탈취해서 시위대에 나눠주고 조작법을 가르쳤다. 저녁이 되자 무장시위대를 광주천변에 매복시키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다가, 다음 날 아침 해가 뜨자 시위대를 인솔하고 도청으로 입성했다. 


  이미 광주공원에서 시민군을 조직하고 도청에 들어온 김원갑과 함께 상황실을 설치하고 차량통행증과 유류 보급증 및 도청 출입증을 만들어 발부했다. 그날 저녁 학생수습위원회가 결성되고 김창길이 등장하면서 김원갑이 물러나자 박남선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무장시위대의 지휘자로 부각되었다.


[윤상원과 ‘투사회보’]


  5.18기간 동안 수습대책위원회와 시민군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언론이 철저하게 통제되어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한 시민들은 무척 궁금해 했다. 따라서 이런 정보 욕구를 충족시키고 시민을 선무할 매체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학생운동권을 배후에서 견인하며 민중운동권과 가교 역할을 담당하던 윤상원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무장투쟁 열기를 확대하고 고조시키기 위해서는 정확한 전황 파악에 기초한 구체적인 투쟁지침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 선전선동 역할을 들불야학이 맡기로 하고 윤상원은 각자의 역할을 부여했다. 들불야학의 학생(노동자)과 강학(대학생)으로 구성된 투사회보 팀은 문안작성조(윤상원, 전용호), 필경조(박용준), 등사조(김성섭, 나명관, 윤순호), 물자조달조(김경국)로 나누어 활동했다.


  〈투사회보〉의 탄생에는 들불야학과 함께‘광주 재야의 정신적 메카’이던 녹두서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윤상원은 18일 밤 녹두서점을 찾아서 예비검속으로 검거됐던 김상윤(녹두서점 주인)의 부인 정현애와 광주 상황을 외부에 알리기 위해 유인물 제작을 논의했다. 외부와 연결통로였던 녹두서점에는 전국 각지에서 광주 상황을 물어오는 전화가 쇄도했고, 김상윤의 연행에 ‘염려의 성금’이 답지하자, 정현애는 성금 대부분을 윤상원에게 쾌척했다. 들불야학 팀은 이 성금을 기반으로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갔다.


 〈투사회보〉의 효시가 된 것은 19일 발행된〈광주시민 민주투쟁회보〉이다. 21일 시민들이 총궐기하여 계엄군을 광주 외곽으로 몰아내자 윤상원은 이날을 ‘시민 승리의 날’로 정하고, ‘투사’라는 제호를 붙여 회보 이름을〈투사회보〉로 변경했다. 22일부터는 전남대의〈대학의 소리〉와 극단‘광대’에서 발행하던 유인물을 통합하고 발행 장소를 YWCA로 옮긴 후, 고속복사기를 이용하여 매일 적게는 5-6천부에서 많게는 4만 부까지 발행했다. 이렇게 만들어진〈투사회보〉는 노동자들을 통해 녹두서점과 광주 시내 전 지역으로 배달됐다. 21일 1호를 시작으로 25일 8호까지 발간하고, 26일부터 제호를〈민주시민회보〉로 변경하여 10호까지 발행했다. 윤상원은 권력이란 관점에서 보면 〈투사회보〉를 통해 여론의 향배를 주도하고 정보를 생산하는‘언론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셈이었다.


  새로운 민주투쟁위원회 집행부는 위원장 김종배·상황실장 박남선·대변인 윤상원의 삼각체제로 출범했다. 김종배는 정치적 지도자로, 박남선은 시민군 지휘관의 역할이 주어졌지만, 실제로 위원회를 이끈 사람은 윤상원이었다. 이처럼 5.18항쟁의 지도부라고 할 박관현(27), 김원갑(19), 김창길(23), 김종배(26), 박남선(26), 윤상원(30) 6인의 평균 연령은 25세다. 참고로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33), 박영효(23), 홍영식(29), 서재필(29), 윤치호(18), 서광범(25) 등 6인의 평균 연령도 25세로 동일하다. 이들의 행동을 두고 ‘철없는 젊은이들의 부나비 같은 행동’이란 평가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1세기 전 봉건사회로부터 탈출을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처럼 새로운 사회변혁의 열망이 강하게 자리하였음을 발견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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