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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4-27 18:05:53
  • 수정 2020-04-28 16: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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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로 사망한 희생자들 [사진=김형석/ Why Times]


5.18은 중요한 팩트마다 다양한 주장이 난무한다. 이런 미스터리를 풀려면 역사학적인 방법론으로 5.18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해야만 한다. 필자는 그 결과 ‘광주, 그날의 진실’을 출간한데 이어, ‘월간 조선’ 5월호에 “또 하나의 5.18”과 “문용동의 일기”를 게재한 바 있다.


지금 5.18이라는 미스터리사건의 비밀을 풀어줄 key를 공개하려고 한다. 바로 ‘문용동 일기’이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5.18 관련 인물들의 일기를 컬렉션으로 구축해서 인터넷상에서 오픈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중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이 ‘문용동 일기’이다.


이번에 공개되는 부분은 1979년 9월 11일부터 1980년 5월 22일까지의 일기 30편이지만, 원래 ‘문용동 일기’는 문용동이 중학교 3학년이던 1969년부터 1980년 5월까지 11년에 걸친 기록이다. 필자는 일기 628편과 수첩메모와 설교문, 잡기장 등 다양한 기록을 소장하고 있다.


▲ 5.18의 진실을 알려줄 문형동 관련 자료들 [사진=김형석/ Why Times]


‘문용동 일기’가 이번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2001년에 발간된 추모자료집 ‘새벽길을 간 이’에 일부가 수록되었고, 2010년에 출간된 고은의 ‘만인보’에도 ‘어떤 일기장’이란 시를 통해서 존재가 알려졌다.


그러나 이후 어떤 연구자도 이 소중한 자료를 주목하지 않은 채 사장(死藏)되고 있었다. 필자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서 ‘월간 조선’ 5월호에 ‘문용동 일기’를 소개했는데, 때마침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도 일부나마 공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필자는 ‘문용동 일기’가 5.18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사료라고 판단하고 있다.


도대체 문용동은 누구이며 그의 일기가 왜 중요할까? 문용동은 1952년 9월 6일 전남 영암군에서 문순봉과 김봉님의 8남매 중에서 여섯째로 태어났다. 군서북초등학교를 졸업하자 1965년 광주로 이사하여 조선대부속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고 3때인 1972년 4월 친구를 따라 광주제일교회에 출석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목사가 되기 위해 호남신학교에 진학했다.


그가 기독교를 신앙한지 불과 1년만의 이 같은 변화는 스승으로 존경하고 부모처럼 따르던 한완석 목사로부터 받은 영향 때문이었다. 한 목사는 자택의 식탁을 늘 교인들에게 개방했는데, 문용동은 거의 매일 저녁식사를 함께 나누며 밥상머리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다. 교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문용동은 한 목사의 아들보다 식사를 함께 한 경우가 오히려 더 많았다고 한다. 한 목사는 철저한 국가주의자이고 평화주의자였다.


“국가를 상대로 싸우려고 하면 안 된다. 데모는 간디처럼 무저항 비폭력으로 맨손으로 하는 거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한완석 목사의 가르침이 문용동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문용동은 1974년 호남신학교 2학년 때 군에 입대하여 수도방위사령부에서 헌병으로 근무한다. 1977년 복학 후 1979년부터 전남노회 여전도회연합회 파송을 받아 상무대교회 전도사로 일하게 된다. 이로써 그는 호남신학교를 다니는 대학생이자 군인교회 전도사로 5.18을 맞이한다.


5월 18일 교회를 다녀오던 길에 공수부대에 폭행당한 노인을 구해준 것이 계기가 되어 5.18에 참여하였고, 22일에는 시민군이 되어 도청 지하실에 쌓인 폭발물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당시 전남도청 지하실에는 엄청난 폭발물이 쌓여 있었다. 이것이 폭발하면 광주시가지의 ⅓이 날아갈 것이라는 판단에서 계엄군도 진압작전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대치 상황이 길어지면서 신군부는 25일 이후에는 도청 진입을 강행하는 상무충정작전을 구체화했고, 이에 맞서 시민군을 지휘한 강경파 지도부는 결사항전과 폭발물 폭파를 공언한 상태로 대치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이때 광주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전남북계엄본부인 전교사를 비밀리에 방문하여 폭탄을 제거하도록 도움을 청하고 성사시킨 사람이 바로 문용동이다. 그렇게 24일 밤에 도청 지하실의 폭약을 해체하는데 성공한 문용동은 이후에도 무기고를 지키다가 26일 새벽 도청에서 사살 당했다. 그가 죽음을 무릅쓰고 폭발물을 제거하는데 앞장선 것은 오로지 광주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려는 희생정신의 발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용동이 죽은 후에 군에서는 그를 군의 공작요원으로 매도하여 전공(戰功)을 조작하는데 이용했고, 이런 사실을 모르던 지역사회에서는 ‘군(軍)의 프락치’로 오해한 탓에 문용동은 오랜 시간동안 누명을 쓰고 배신자란 편견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軍이 조작한 사실이 밝혀지고, 그의 행적을 증언한 증인들이 나타나면서 오해가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01년 처음으로 소개된 그의 일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1980년 5월 10일자 일기를 소개한다.


“어지러운 정가(政街). 소란스런 학원. 위기와 같은 시국. 현 시점에서 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가. 탁류속의 민주주의란 배(船)는 안개 속을 지나 어디로 흘러가는가. 예언자적 통찰 역사를 직시하는 눈길. 시대를 분별하는 사고(思考). 그리고 상황과 시공에 맞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 저 소요 사태(민주회복운동, 학원자율화, 계엄 해제…)를 먼발치에서 구경만 하고 난 그냥 있어야만 하는가?”


이날의 일기에는 연일 계속되는 대학가의 시위를 보면서 동참해야할지를 고심하며 갈등하는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어서 1980년 5월 22일자 일기이다.


“이 엄청난 피의 대가는 어떻게 보상해야 하는가.

이 엄청난 시민들의 분노는 어떻게 배상해 줄 것인가.

도청 앞 분수대 위의 시체 관 32구. 남녀노소 불문 무차별 사격을 한 그네들. 아니 그들에게 무자비하고 잔인한 명령을 내린 장본인. 역사의 심판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리라.

전대 부속병원 영안실의 시체 시체들. 병원마다 꽉 메인 총상환자들.

카빈 소총과 M1으로 무장하고 눈이 뒤집어진 시민들의 차량의 돌진. 완전히 폐허 같은 금남로. 전소되어버린 문화방송국. 앙상한 골재만 남고 타버린 수많은 차량들.

이 엄청난 피해의 현장. 누가 이 시민에게 돌을, 각목을, 총기를 들게 했는가. 이럴 수가 있는가. 정말 이럴 수도 있는가.

우리는 참여하여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 계엄당국의 엉터리없는 오도. 불순분자의 난동이라니, 그럼 내가 불순분자란 말인가.

대열의 최전방에서 외치고 막고 자제시키던 내가 적색분자란 말인가. 우리는 후세에 전 국민에게 광주사태가 몇몇의 불순세력에게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니라, 무자비한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노한 선량한 시민들의 궐기임을 알리고 증언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시민이 빵과 주먹밥과 음료수를 나누는 광경이 적색 폭도란 말인가.

뭔가를, 진정한 민주주의의 승리를 보여줘야 한다.

나의 불참이, 나의 방관, 외면이 수습을 더 지연시키는 것이다.”


5월 22일은 계엄군이 광주에서 철수하고 시민군이라고 불리던 시위대가 도청을 접수한 첫째 날이다. 이날부터 닷새 동안 광주는 정부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해방구가 되었다. 문용동은 시민군에 참여하게 된 이유를 후세에 민주화운동을 한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는 26일 밤에 누나와 연인이 차례로 찾아와서 “부모님 생각을 해서라도 집으로 돌아가자”고 설득할 때, “여기서 죽으나 집에서 죽으나 마찬가지다. 내가 죽으면 태극기로 덮어 묻어 달라.”고 거절한 후 27일 새벽에 죽음을 맞이한다.


이런 문용동의 행적을 두고서 기독교계에서도 논쟁이 뜨겁다. 문용동은 2016년 그가 생전에 속했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통합)에서 순직자로 지정되었는데, 이번에는 순교자로 추서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순교란 말을 “자기가 믿는 종교 때문에 박해를 받아 목숨까지 잃게 되는 일”이라는 보편적 의미로 해석할 때는 해당이 되지 않지만, ‘주의·사상을 위해서 죽는 경우’를 포함하는 광의(廣義)로 해석하면 문용동의 경우가 적합한 사례(事例)이다.


그러나 정작 문용동의 종교성을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은 불교 승려였다가 환속한 고은 시인이 ‘만인보’에 남긴 문용동과 관련한 4편의 시이다. 그중에서 ‘문용동’이란 제목의 시를 소개한다.


시민군 문용동

5월 26일 날 저녁

오래된 단팥빵 두 개 먹었다 배고픈 것 나았다

옆에서 피우는 담배 연기 독했다.

구약성서 모세의 떨기나무와 벌거숭이 시나이 산을 생각했다.

호남신학대 졸업하면

낙도에 가

교회 개척할 생각도 가려운 듯 무러운 듯 이어졌다.

밤이었다.

이런 생각 다 버렸다.

지난 열흘 동안

시위대열

하루하루

가열 찬 시위대열 시민군이 되고 말았다

도청 지하실 무기관리를 맡았다 … 죽음이 다가왔다

신 새벽이었다

계엄군 충정작전 병력이 칠흑 속 다가왔다.

도청 1층/ 탕 탕탕 쓰러졌다.

2층

풀 풀풀 쓰러졌다

M16 총탄 세발 맞은

주검 문용동”


고은은 문용동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시민군이 된 문용동이 도청 지하실 무기고를 지키는 모습을 마치 모세가 시내산의 떨기나무 아래에서 십계명을 받고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출애굽을 인도한 모습에 비유한다. 이는 문용동의 행동이 광주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고귀한 희생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 그의 장래 희망이 호남신학대를 졸업한 후 낙도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섬사람을 위한 삶을 살려던 것임을 내비치면서, 문용동이 진실한 크리스천이었음을 강조한다.


이런 고은의 생각은 그가 쓴 또 다른 시인 ‘어떤 일기장’에도 나타난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는 “하루 한 번씩 두 번씩 무등산을 바라보더니 / 한밤중 잠들기 전 고개 꺾고 간절히 기도하더니 아멘이더니 … 천당 있으라. 지옥 있으니 천당 반드시 있으리라. 아멘”고은은 문용동의 일기장을 보고 종교를 초월한 시상(詩想)으로 문용동이 천당에 있을 것을 확신하고 있다. (계속)




[덧붙이는 글]
*보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기 원하는 분은 ‘월간 조선’ 5월호와 단행본 ‘광주, 그날의 진실’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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