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5.18 40주년 기획(1)]‘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본 5.18’ - 193명의 사망자, 3,139명 부상자 발생한 사실상 내전 - 5.18에 대해 아직도 국민들 충분히 이해못해
  • 기사등록 2020-04-25 10:15:35
  • 수정 2020-05-06 11:35:33
기사수정


▲ 올해로 5.18 40주기를 맞는다. 5.18을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까? [사진=김형석/ Why Times DB]


대한민국사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마 한 분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한국사에는 현대사만 있고 대한민국사가 없기 때문이다. 고구려에는 고구려사, 신라에는 신라사, 백제에는 백제사가 있고, 고조선사, 고려사, 조선사도 있지만, 정작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사라는 말은 없다.


한국사학계에서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4월 11일을 대한민국의 건국일로 인정하기 때문에, 1948년 8월 15일은 정부 수립일이라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김일성 정권이 수립된 1948년 9월 9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이라고 표기한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은 한국사에서 남북분단시대의 남측 정부이고,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된 셈이다. 이런 엉터리 같은 논리 모순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이 같은 내용이 초등학교 사회과 6학년 교과서에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유엔으로부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국가로 인정받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20세기 세계사에서 독일의 ‘라인강의 기적’을 능가하는 ‘한강의 기적’을 일군 나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로서의 역사를 부정한다면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자기 스스로를 성찰하는 자성사관이 아니라 자기존재를 부정하는 자학사관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역사적 관점에서 대한민국사를 정리하고 재조명하는 역사 특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사를 특강하면서 무슨 주제로 시작할까? 많은 고심을 하였다. 그런데 5.18, 40주기를 앞두고 치룬 총선에서 586이 대한민국 정치의 주류로 자리매김했다. 이들은 이전 세대를 적폐로 규정하고 ‘청산의 대상’으로 삼는 반면, 이전 세대는 이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5.18이 보수와 진보를 편 가르는 갈등의 진원지가 되었다. 따라서 5.18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계속되는 갈등과 대립으로 퇴보할 수밖에 없다. 그뿐 아니라 5.18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현 정권이 나가려는 정치적 방향성을 읽을 수가 없다. 5.18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 필요한 이유이다.


이제 5.18민주화운동이 40주년을 맞게 된다. 먼저 5.18로 인해 故人이 된 193명의 영령들의 명복을 빈다. 그동안 세상이 참 많이도 바뀌었다. ‘광주사태’라고 불리던 5.18은 민주화운동이라는 법적 지위를 얻게 되었고, 관련자들은 ‘폭도’라는 불명예를 벗고 자랑스러운 국가유공자가 되었다.


이처럼 5.18의 법적 지위는 180도로 바뀌었지만, 5.18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복잡하다. 아직도 많은 분이 “5.18이 왜, 민주화운동이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것은 그동안 5.18에 관한 조사만도 8차례나 이루어지고, 그중에서 3차례는 국가의 공권력이 강제된 조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문점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해에는 특별법에 의한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설치되었지만, 활동이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고 이로 인해 5.18에 관한 논쟁이 일단락될 것으로 믿는 사람은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5.18에는 아주 복잡다단한 미스터리가 존재하는데 5.18이 다른 민주화운동과는 달리 국가 권력과 싸우며 민간인 166명과 군경 27명 등 193명의 사망자와 3,139명의 부상자를 발생시킨 사실상의 내전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세계사의 유사한 사건은 물론 국내여순사건이나 제주4.3사건과 비교할 때 피해가 훨씬 작다는 점이다. 서울대 정치학과의 최정운 교수는『5월의 사회과학』에서 그 이유를 ‘폭력과 사랑의 변증법’으로 설명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사회현상에 대한 인식일 뿐 구체적인 실체를 규명하지 못하면 허상이 되고 만다.


5.18당시 광주에는 초등학생도 총을 메고 다니고, 수류탄의 안전핀을 줄에 달아 어깨에 두르고 다니는 사람까지 있어서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뿐 아니라 전남도청 지하실에는 화순광업소에서 탈취한 다이너마이트와 폭약들, 전남도내 38개 무기고에서 탈취한 총기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자그마치 8톤 트럭 4대 분량이었다. 공수부대가 시위대에 밀려 광주에서 철수하고 아무렇게나 방치된 각종 무기와 폭약을 자원하여 정리하고 그곳을 끝까지 안전하게 지키다가 희생당한 의인들이 있었다.


만약에 그들의 자발적인 수고와 희생이 없었더라면, 광주시민과 군경들은 지금보다 수십 배, 수백 배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은 뻔한 일이다. 당시 현장을 잘 아는 전문가는 그 폭약들이 폭파했더라면 1977년 발생한 이리역 폭발사고보다 3배 이상의 피해가 생겼을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1980년 5월 광주를 구한 10인의 의인들’이라고 부른다.


시민들이 소지했던 5천정이 넘는 총기회수운동을 벌여 90%가 넘는 총기를 회수함으로써 광주시민의 희생을 크게 줄이는데 수고한 수습대책위원들의 노고도 기억해야 한다.


▲ 수습대책위원으로 크게 활약했던 故 방철호 목사 [사진-김형석/ Why Times DB]


우선 수습대책위원으로 크게 활약했던 故 방철호 목사로부터 들은 증언을 소개한다.


“그때 도청 지하실에서 수습대책회의를 하는데 광복회 활동하는 김갑제가 문을 열고서 들어와서는 눈을 부라린 채 권총을 들이대면서 “광주시민이 다 죽어도 민주화는 해야 합니다.”하고 외치는 거예요. 근데 수습위원 한 분이 벌떡 일어나더니 "이놈아. 광주시민 다 죽으면 누구를 데리고 민주화할래. 살긴 살아야 한다."하고 호통을 친 후에 회의를 계속했어요.”


필자는 2018년 1월 15일 방 목사님과 만나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상세히 들을 수가 있었다. 그날로부터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방 목사님은 세상을 떠났다. 평생을 광주지역사회를 위해 사회운동과 복지사업에 헌신하면서 파란만장한 83년의 삶(生)을 산 방철호 목사의 마지막 인터뷰였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밖에서 본 5.18은 국가의 독재 권력에 맞서 광주시민이 민주화를 위해 싸운 것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그 민주화의 방법을 놓고 치열한 갈등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광주에서는 시민사회의 자발적인 무기회수운동이나 도청 지하실의 폭발물 해체사건은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어 왔다. 정의와 민주화를 내세우며 투쟁을 주장하면 자랑스러운 일이고, 국가 질서와 생명의 존엄성을 말하는 것은 마치 배신자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편견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고 있다. 그런 가운데 5.18당시 수습대책위원회에서 윤상원과 함께 강경파의 입장을 대변하던 정상용의 인식 변화는 주목할 만하다.


▲ 5.18당시 수습대책위원회에서 윤상원과 함께 강경파의 입장을 대변하던 정상용 [사진=김형석/ Why Times]


정상용은 2007년 5월 전남대 5.18연구소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그때 당시 무기반납에 반대했지만 어느 한쪽의 주장이 절대적으로 옳았다고는 보지 않는다. 무기반납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계엄사의 앞잡이도 아니었고, 평범한 사람들의 경우 충분히 그와 같은 입장을 취할 수 있었다. 교수, 신부 등 수습위원들이 무기를 회수하고 다닌 것도 희생을 줄이기 위한 순수한 행위였고, 나이도 더 들었으므로 매사에 조심스러운 행동의 결과였다고 본다. 우리는 평소 사회변혁을 추구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항쟁 자체를 바라보는 입장이 달랐던 것이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까지 끝까지 싸우자고 했던 사람들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영웅적이었으며, 수습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투항주의자였다고 몰아붙이는 것은 큰 잘못이다. 서로 입장의 차이였음을 인정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 항쟁에 뛰어들어 열성적으로 활동했던 그 점을 더욱 높이 평가해야 될 것이다.”


그렇다. 5.18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은 다양하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는 분열과 갈등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5.18당시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취한 일련의 행동들이 과연 얼마나 옳은 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길은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한번쯤 성찰해보는 것이 5.18민주화운동 40주기를 맞는 지금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이다.(계속)



[덧붙이는 글]
* 보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기 원하는 분은 <월간 조선> 5월호와 단행본 <광주, 그날의 진실>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관련기사
TAG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whytimes.kr/news/view.php?idx=5983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정기구독
헤드라인더보기
    게시물이 없습니다.
정치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