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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2-11 10:2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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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은 신성한 것이며, 돈은 더러운 것이다’는 고정관념을 정말 믿는 사람들이 있을까
-노동은 그냥 몸을 움직여 돈을 버는 일일 뿐이며, 돈은 더러운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
-헌법 33조의 노동3권은 자발적 노예를 계약이나 직업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허용한다


다른 나라에도 그런 관념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노동은 신성한 것이며, 돈은 더러운 것이다’는 관념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혹자는 신성하지 않으면 노동이 아니라는 비약적 논리를 펼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노동은 신성한 것일까? 그리고 과연 돈은 더러운 것일까? 그래서 사람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노동을 하며, 더러운 돈을 혐오하여 가능하면 돈으로부터 멀어지려 하는 것일까?

 

금난전권과 더러운 돈

 

조선시대 당시 수도였던 한양에는 장사가 될 만한 곳에는 모두 육의전이라는 관허상인들만이 자리 잡고 나머지는 모두 난전이라 하여 장사가 금지되었다 한다. 그러한 난전 그러니까 오늘날의 잡상인을 규제하는 권한을 금난전권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금난전권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역사는 금난전권의 뿌리는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양반층이었으며, 따라서 금난전권은 결국 권력과 결탁한 양반 하수인들의 장사를 돕기 위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당시 선비를 포함하여 양반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돈이었으며, 그 돈을 버는 수단은 권력을 등에 업고 장사를 독점하는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돈이 되는 일은 모두 내가 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에겐 돈을 멀리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잡상인은 사회질서를 어지럽힘을 이유로 내쳐야 했으며, 돈은 더러운 것이므로 누구도 만지지 말도록 교육을 시켜야 했던 것이다. 돈이 더러운 이유는 나만 만져야 되기 때문이었다.

 

▲ 예나 지금이나 지배계층은 더럽고 위험한 노동을 하지 않는다.


노동이 신성하며 직업에 귀천이 없는 이유

 

예나 지금이나 지배계층은 노동을 하지 않는다. 문제는 누군가는 힘들고 더러운 노동을 해야만 하는 것이 사회구조라는 데 있다. 누군가는 똥을 퍼야 하고, 누군가는 곡괭이질을 해야 하며, 누군가는 가마를 매야 한다. 그런데 나는 그러한 일을 하기 싫다면 누군가에게 그러한 일을 하도록 이념화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은 신성시되었으며, 직업엔 귀천이 없어야만 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문세가나 부자들이 그렇게도 신성한 노동이나 귀천이 없는 더럽고 힘든 일들을 가능하면 멀리하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돈은 더러운 것이며, 직업엔 귀천이 없고, 노동이 그렇게 신성하다면 왜들 보다 많이 배우고 돈도 많고 골프로 단련된 강인한 체력을 자랑하는 분들이 하나같이 천하지도 않고 신성하기만 하며 돈은 안 되는 노동을 기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톰 아저씨와 몸을 불사른 개 이야기

 

중학교 다닐 때였던가, 지금의 교육부에 해당하는 당시 문교부가 제시하는, 중고생이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목록 중에 미국에서 건너 온 ‘톰 아저씨(uncle Tom) 이야기’가 들어 있었던 기억이 있다. 내용인즉슨 흑인노예가 주인을 위하여 오직 한 길 충성을 다하며, 목숨을 바쳐 노예로서의 길을 간다는 것이었던 같다.

 

그와 유사한 이야기로 우리나라에는 어느 강아지가 술 먹고 곯아떨어진 주인이 산불에 타 죽으려 하자 자기 몸을 불살라 주인을 구하고 자기는 죽었다는 이야기가 곳곳에 전설이 되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노예들의 꿈은 주인을 위해 장렬히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배움이 짧은 것인지 자꾸만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노동은 신성하지 않다. 노동은 그냥 몸을 움직여 돈을 버는 일일 뿐이다. 돈은 더러운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다. 따라서 누구나 예외 없이 좋아한다. 톰 아저씨는 그 남는 힘을 노예해방에 썼어야 했다. 주인 옆에 불이 붙고 있으면 몸에 털이 많은 개는 얼른 강물로 몸을 피해야 한다. 불이 꺼질 때까지.

 

언젠가 교수공채에 응할 일이 있었을 때 높으신 분이 약간의 용돈이 필요하시다며 삶이 버거운 표정을 지으시던 기억이 있다. 역시나 높으신 분이라서 그런지 용돈이 1억인가 1억 5천만 원인가 되신다고 옆에 계신 분이 귀띔해 주셔서 매우 고맙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때 문중답을 팔아서라도 그 높으신 분의 용돈을 챙겨드려야 했었던 것 같다. 그랬다면 지금쯤 대학의 각종 잡상인들을 다스리는 금난전권을 휘두르고 있을 것 아닌가? 오직 노예만이 노예해방에 반대한다. 노예로 길들여져 있으므로.

 

헌법은 사회적 특수계급을 부인하며(제11조 제3항), 강제노역을 금하고 있다(제12조 제1항).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서 노예제도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헌법이 자발적 노예까지 금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발적 노예는 계약의 자유나 직업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허용되며, 헌법 33조의 노동3권은 오히려 자발적 노예들이 더욱 노예스럽게 살 수 있도록 보호해 준다.

 

삶이 저물어가도록 한 번도 노예로 살아본 적 없는 나는 너무나도 당연히 춥고 배고프다. 삶은 누가 더욱 혹독한 노예로 자신을 담금질 하느냐에 따라 비례하여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깨닫기에는 너무 늦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민중을 해방했다는 것과, 미국의 링컨대통령이 남북전쟁 시대에 흑인노예를 해방하였다는 것과 지난 겨울 광화문의 촛불집회가 우리를 간난으로부터 해방시켰다는 것과 그래서 우리가 지금 행복한지를 묻고 싶다.

 

그대 지금도 노예제도를 반대하십니까?

 

그 말을 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제3의 길' 轉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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