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19-07-20 19:52:42
기사수정


▲ 이승만 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LA지회 주관으로 지난 17일 열린 서거 54주기 기념식 [사진=Why Times]


이승만 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LA지회는 지난 7월 19일 11시에 나성삼일교회에서 서거 54주기 추모행사를 가졌다.


이날 추모식에서 설교를 맡은 이기홍 목사(부이사장)는 "민족의 지도자 모세(히 11:23-29)"를 제목으로 모세와 비교할 수 있는 이승만 박사를 언급하며 하나님의 섭리를 전했다.


첫째. 고난의 생활이다. 모세의 광야 40년 동안,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5년 7개월을 지내면서 예수를 영접해 옥중 전도하면서 뒤늦게 헌신 했고, 배재학당에서 선교 교육을 받아 눈뜨게 되어 영어도 배워 국제적 안목 지니는 길에 들어섰다. 그리거 고종의 밀사로 미국으로 출국했고 고난 속에서 미국의 학문을 배웠다.


둘째. 고난 속에 백성을 구했다. 모세처럼 이 박사도 해방 후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유엔 승인도 받았으며, 6 25전쟁 속에서 3년 1개월 동안의 위기시 지도력을 발휘했다. 더불어 한미동맹 협정도 했다.


셋째. 위기에 기도로 승리했다.


모세가 정복 전쟁시 기도한 것처럼 이 박사도 한성감옥, 해외기도, 부산피난처에서 기도를 했다. 이런 신앙이 있었기에 영부인 프란체스카가 기도하는 지도자라 인정했던 것이다. 이 박사는 대통령이면서도 정동제일교회 명예장로로 기도생활을 계속했고, 제헌 의회시 이윤영 의원 목사의 기도로 시작하게 하였다.


이 대통령은 한국군에 군목제도를 두어 군대를 기도하는 처소가 되도록 했다.


넷째. 모세가 온유하였듯 이 박사도 온유 겸손 검소했다.


이 박사는 해외순방시 제네바에서 만난 오스트리아 출신 타이피스트 통역관이었던 프란체스카 영부인을 경비 부담을 줄이려 혼자 출국해 외교 활동을 하기도 했다.


다섯째. 모세와 이 박사는 마지막 모습이 비슷했다.
이 박사는 하와이에서 귀국하지 못하고 서거했다.


4.19 이후 하와이로 가 조국을 사랑하는 맘을 지니고 90세로 서거했다. 그는 국민장으로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꿈엔들 잊으랴 한강과 남산을..."
이런 애국심을 그의 시에서 볼 수 있다.


온 국민이 추모할 민족의 지도자이다.


2부 추모식에서 최학량 LA회장은 "이승만 건국 신앙정신이 강조되어야 할 뭉쳐야 할 상황, 조국을 구원해야 할 정세"로 이승만 건국 대통령 서거 54주기 추모행사의 취지를 설명을 하였다.


이어 김관진 목사, 조인영 배재학당 전 회장, 이국봉 남가주원로목사회장 등이 추모사를 하였다
이날 행사를 지켜보며 오찬 기도한 그레이트 한반도 통일 리더십 연구소 대표인 김회창 박사는 "이승만 박사는 한반도에 공산주의가 악함을 몸으로 깨우쳤고, 한국을 건국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켜간 세계적인 선각자 지도자이고, 미국과 유엔 참전국, 참전용사들, 자유 대한인들에 대한민국을 피흘려지킨 결과에 보람을 가지게 한 하나님이 보내신 지도자"라고 언급하였다.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whytimes.kr/news/view.php?idx=4283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정기구독
Why TV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