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19-05-07 23:21:43
  • 수정 2019-05-24 11:15:13
기사수정


▲ 미국의 압력으로 1854년 개항을 하게 된 일본은 분권적인 막부정권을 전복하고 천황 중심의 절대주의 체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명치유신(1868)이 바로 이것이다. 그림은 메이지 천황이 1868년 3월 교토에서 도쿄로 입성하는 장면.[Why Times DB]


조선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는 사이 일본 사회는 크게 변하고 있었다. 미국의 압력으로 1854년 개항을 하게 된 일본은 이후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 등과 조약을 체결하여 외부 세계에 문호를 활짝 열었다. 일본은 이와 같은 변화를 철종 재위 당시 조선에 통고한 바 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서양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연구 보다는 오히려 오랑캐가 다시 출몰할지 모르니 나라의 경계에 힘쓰라고 일본에 충고를 하는 정도로 일을 얼버무렸다.


당시 일본은 새롭게 변화하는 세계의 정세를 놓고 심각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외부의 도전에 내부의 결속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분권적인 막부정권을 전복하고 천황 중심의 절대주의 체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명치유신(1868)이 바로 이것이다. 이후 문명개화(文明開化) 란 구호 아래 일본은 안으로 힘을 모으고 밖으로 힘을 뻗쳐 나가고자 했다. 그런데 이때 일본 내에서는 조선을 미래의 중요한 정복 목표로 삼자는 자들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들의 생각은 무엇인가. 우선, 조선은 공업화, 도시화를 지향하는 일본에게 공산품 수출 시장으로서의 가치가 있었다. 또한 일본에 필요한 농산품, 즉 쌀 등 곡류의 공급시장 가치가 있었다. 더 중요하게는 미래의 넓은 시장이자 전략적으로 중요한 중국 대륙의 동북 지역, 즉 만주로 진출할 교두보로서의 가치가 있었다.


이 점은 후일 한반도를 둘러싸고 본격화되어 간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갈등에서 잘 입증된다. 가령 청일전쟁의 강화로 맺어진 시모노세키조약과 삼국간섭,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 그리고 이들 사건으로부터 근 10년 뒤에 동북아에서 벌어진 러일전쟁 등이 그것이다.


이런 일본의 구상은 여러 자료에 보인다. 그중 하나가 사다 하쿠보(佐田白茅: 외무성 관료)의 주장이다. 그는 1869년 부산 왜관에서 조선사정을 정탐하고 돌아간 뒤 외무경(澤宣嘉)에게 1870년에 건백서를 정부에 올렸다. 긴 문장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다.


무릇 조선을 정벌해야 하는 이유는 대략 이러합니다. 즉 얼마 전 프랑스는 조선을 공격하였다가 패하여 원한이 끝이 없으니 반드시 조선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고, 러시아는 그 동정을 몰래 살피고 있으며, 미국 역시 공격할 뜻을 갖고 있으니 이는 모두 조선의 재화를 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이 만약 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저 도적 무리들에게 조선을 넘긴다면 실로 순망치한(脣亡齒寒)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다 하쿠보는 황국을 위하여 조선 정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지금 군대를 보내자는 논의를 내 놓았는데 사람들은 반드시 재물을 낭비하여 국가를 좀 먹는다며 그 논의를 없애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을 정벌하는 것은 이익이 되고 손해 볼 것이 없읍니다. 비록 하루에 약간의 재화를 투자한다 해도 50일이 지나지 않아 그것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대장성은 매년 20만원을 에조(蝦夷: 北海道)에 지출하고 있는데 몇 년이 걸려야 개척이 끝날지 모릅니다. 조선은 금혈(金穴)이며 미맥(米麥) 또한 자못 많으니 단번에 이를 쳐 빼앗아 그 인민과 재화를 징수하여 에조에 이용하면 대장성은 그 대가를 취할 뿐만 아니라 몇 년간의 개척 비용을 절약할 수 있으니 그 이익이 어찌 크다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고로 조선을 정벌하는 것은 부국강병을 도모하는 책략입니다. 재화를 낭비하고 국가를 좀먹는다는 의론으로 쉽게 물리칠 일이 아닙니다.


지금 일본은 군대가 많아서 걱정이지 적어서 걱정이 아닙니다. 병사들은 자못 전투를 좋아하여 지난 무진전쟁(戊辰戰爭:1868)에 만족하지 않고 또 다시 전쟁을 손꼽아 기다리니 이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혹여 사사로운 싸움으로 내란을 일으킬까 걱정스럽습니다. 다행히 조선 정벌에 이들을 이용하여 그 병사의 왕성한 기운을 쓰게 하면 단번에 조선을 무찌를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군제를 크게 연마시키는 것이 되고 국가의 위엄을 해외에 빛내는 것이 되니 어찌 신속히 조선을 정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日本外交文書』)


요약하면 다른 나라 보다 앞서서 조선을 정복하는 것이 일본의 부국강병을 도모하는 길이란 뜻이다. 조선의 자원과 인력을 확보함과 동시에 정부의 구조조정, 즉 명치유신으로 일자리를 잃은 봉건무사들의 살 길도 열어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당시는 조선에서 흥선대원군이 실세로 군림하던 때였다. 그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 조선을 다루기는 용이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 국내 정국의 변동과 함께 흥선대원군이 권세를 잃고 정치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바로 그 무렵인 1873년 일본에서 정한론(征韓論)이 크게 대두하였다. 그만한 사정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명치유신으로부터 3년 뒤 종래의 번을 폐하고 현을 두어 중앙 정부의 직접 관할 하에 두게 한 조치가 있었다. 이같은 폐번치현(廢藩置縣, 1871)에 이어 국민징집령(國民徵集令, 1872)에 따라 일본의 젊은이 누구나 군인이 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에 특수 신분의 무사였던 사무라이(侍)들이 하루아침에 실직하고 설 땅이 없게 되었다. 이들은 불만을 품은 사족, 즉 불평사족(不平士族)으로서 근 60만에 달했다. 이들의 처리 문제는 명치 정부의 사활과도 관계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한론이 과열되었으니, 전국시대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통일 이후 역할이 없어진 무사들의 처리를 겸해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정한론의 거두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였다. 지속된 지속된 논쟁의 골자는 조선을 당장에 정복하느냐, 좀 더 기다리느냐 하는 시기 선택 문제였다. 이 논쟁은 정치 주도권 싸움과 결부되어 에토 신뻬이(江藤新平) 등의 정한당과 시마 요시타케 등 우국당 인물들이 합작한 ‘사가의 난(佐賀의 乱, 즉 佐賀戦争)’(1874)으로 번졌고, 이어진 사족들의 반란 끝에 사무라이 출신 무사들의 불평을 기반으로 사이고 다카모리가 평민 출신의 병사들이 주력인 신정부군을 상대로 일으킨 ‘서남(西南)의 역(役)’(1877)의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양자 모두 정부군에 패하여 에토는 효수(梟首)되고, 사이고는 할복 자결하였다. 당장으로서는 급진적인 정한파들이 패배한 것이다.


이때 이와꾸라 토모미(岩倉具視) 등이 정한파 주장을 반박한 표어는 우선 일본의 내실을 다져 힘을 길러야 한다, 즉 ‘내치를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아직 일본정부의 기초가 확립되지 못하여 내란의 위험이 있으며, 조선과 일본이 전쟁을 하면 러시아에게 어부지리가 될 뿐 아니라, 차관을 빌려 줄 영국에도 내정간섭의 틈을 주어 일본이 제2의 인도로 전락하리라는 것이었다. 당초 정한론을 주장했던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등도 이때 정한론을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일본의 주요 인물들이 유럽과 미국을 다녀온 후 이들 국가에 비해 형편없이 취약한 국력과 과학 기술 격차 등을 절실히 깨달은 때문이었다.


▲ 일본은 운양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의 개항을 압박하였고, 조선 조정은 갑론을박 끝에 개항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것이 1876년 초 강화도에서 조선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조일수호조규, 또 다른 용어로는 ‘강화도조약’ 혹은 ‘병자수호조약’이다. [Why Times DB]


정한론자들의 주장을 배제하면서 일본은 신속히 힘을 키워 갔다. 부산을 거점으로 조선에 대한 정보수집에 힘을 기울였다. 군함을 부산에 보내어 위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1875년 9월, 정체모를 한 척의 배가 갑자기 서울의 코앞인 강화해협의 초지진포대에 접근하였다. 그 배는 흰 천에 빨간 점 하나를 동그랗게 찍은 깃발을 달고 있었다. 일본의 군함 운양호였다. 운양호는 그해 5-6월 조선의 남해안과 동해안을 떠돌며 시위포격을 하는 등 조선 군민을 불안하게 했던 일본군함, 즉 춘일호(春日號), 운양호(雲揚號), 제2정묘호(第二丁卯號) 등 3척 중 하나였다. 이제 일본의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강화도의 수비병은 이 배의 정체를 알 까닭이 없었다. 게다가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겪은 뒤라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설사 일본배임을 알았다 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국적을 알 수 없는 배가 해안을 침범했으니 조선해안의 군사들로서는 도발로 여길 수밖에 없는 일 아닌가. 초지진 포대에서는 다가오는 배에 포격을 가하였다. 그러자 상대 쪽에서 기다렸다는 듯 함포사격을 가해왔다. 그 배에서 뛰어 나온 일본군은 영종도(永宗島)에 상륙하여 약탈과 방화를 하였다. 포대의 공격에 대한 보복이라 했다.


조선군은 전사자 35명에 부상자 및 포로 16명, 일본 측은 경상자 2명이었다. 일본군은 영종도에서 대포 36문과 화승총 130정을 전리품으로 약탈해 갔다. 이것이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의 간략한 전말이다. 결국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조선의 개항을 압박하였고, 조선 조정은 갑론을박 끝에 개항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것이 1876년 초 강화도에서 조선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조일수호조규, 또 다른 용어로는 ‘강화도조약’ 혹은 ‘병자수호조약’이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성무, 『조선왕조사』, 동방미디어, 1998. 김용구, 『세계외교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 이민원, 『대한민국의 태동』,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4.
TAG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whytimes.kr/news/view.php?idx=3869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이민원 역사 에디터 이민원 역사 에디터의 다른 기사 보기
  • <경력>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문학박사(역사학)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
    -원광대 사범대 초빙교수
    -국제한국사학회(회장)
    -현재: 동아역사연구소(소장)
    현대의전연구소 자문위원

    <주요저술>
    『이상설-신교육과 독립운동의 선구자』』(역사공간, 2017)
    『대한민국의 태동』』(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5)
    『조완구-대종교와 대한민국임시정부』』(역사공간, 2012)
    『조선후기 외교의 주인공들』(백산자료원, 2007)(공저)
    『Q&A한국사: 근현대』(청아출판사, 2008)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국학자료원, 2002)
    『한국의 황제』(대원사, 2001)

    <번역서>

    『국역 윤치호영문일기』 2(국사편찬위원회, 2014)
    『국역 윤치호영문일기』 3(국사편찬위원회, 2015)
    『나의 친구 윤봉길』(도서출판 선인, 2017)(原著: 金光, 『尹奉吉傳』, 上海: 韓光社, 1933)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정기구독
최신 기사더보기
교육더보기
    게시물이 없습니다.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