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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2-24 16:16:51
  • 수정 2019-02-25 10:5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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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재 박규수 [인물한국사]


[고종의 멘토 박규수]


고종 즉위 후 고종에게 직간접으로 큰 영향을 미친 왕실 외의 인물은 누구일까. 고종이 ‘제왕수업’을 할 당시로부터 직접 정사를 챙기기 시작한 이후 개항 관련 정책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관료는 다름 아닌 환재(瓛齋) 박규수(1807~1876)로 생각된다.


박규수는 1921년 3월 31일 민영환, 신응조, 이돈우 등과 함께 고종의 ‘4공신(功臣)’으로 명명되어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이처럼 박규수는 고종의 묘정에 배향된 4대신의 한 사람이었고, 고종 즉위 초기 10 여년 사이에 3년간(1866-1869) 평안감사로 근무한 기간을 제외하면 조정에서 한성판윤, 형조판서, 우의정 등 중책을 수행한 인물이다.


그 배경에는 그가 조대비의 남편인 익종(효명세자, 1809-1830)의 세자시절 맺어진 특별한 교분, 그리고 이를 감안한 조대비(1808-1890)의 배려 등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박규수는 고종 보다 45세 연상, 흥선대원군(1820-1898) 보다 13세 연상이다. 이렇게 그는 효명세자, 조대비, 흥선대원군, 고종과 일정한 연관이 있었다는 점에서 순조~고종에 이르기까지 정치, 사상, 인맥 상으로 깊은 연계성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박규수는 15세부터 문명을 떨쳤다. 20세 무렵 순조의 후계자인 효명세자와 교유하면서〈주역〉을 강의하고 서로 국사를 의논했다. 그러나 1830년 세자의 갑작스런 죽음과 연이은 부모와의 사별로 칩거하며 학문에 전념했다. 이 시기 조부 박지원의 실학사상을 계승하면서, 윤종의·남병철·신석우 등 당대의 학자들과 교유했다. 이후 그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들어서게 된 것은 1848년이지만, 관료로서 뚜렷이 부각된 것은 고종 즉위 이후이다.


박규수가 태어난 곳은 서울 재동이다. 백송으로 유명한 헌법재판소가 위치한 곳이다. 이곳은 경복궁, 창덕궁 등 궁궐에 이웃해 있고, 흥선대원군의 저택이자 고종의 탄생지 운현궁과도 가깝다. 게다가 개화파 청년의 리더 김옥균의 집(현 정독도서관 자리)과도 가깝다.


그는 1864년 도승지에 임명되고, 사헌부대사헌, 이조참판, 한성부판윤을 거쳐, 공조판서겸 경복궁 영건도감 제조를 겸하였다. 다시 예조판서, 대사간, 지돈녕부사,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한성판윤, 형조판서를 지낸 뒤 1872년 진하사로서 두 번째 중국을 다녀왔다. 귀국 후 형조판서, 우의정을 지냈다. 이때 흥선대원군에게 개국의 필요성을 언급한 뒤, 1874년 9월 사직하고, 1875년 판중추부사로서 국정의 일선에서 물러나 젊은 양반자제들을 가르쳤다. 그해 9월 운양호사건이 일어나자 정부당국에 개항을 주장하여 1876년 2월 일본과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게 하였다. 그해 기사(耆社, 고령의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 들었고, 수원유수로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관료로서 박규수는 진주민란 시절 탐관의 엄벌을 상소한 것, 평안감사 시절 제너럴 셔먼호를 소실시키고, 다른 한편 천주교도의 희생을 줄이려 노력한 일, 운양호사건 이후 개국을 적극 주장한 일, 누대에 걸친 기계 유씨 가문과의 악연을 풀고 유길준을 발탁한 사례 등에서 보듯 애민적 목민관, 국가 미래를 내다 본 시대의 지식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박규수의 학문에 대해서는 북학파의 계보에 연결되는 실학자, 개화사상의 선구 혹은 개화파의 원로 지도자, 북학파와 개화파를 연결시켜 준 중심 인물, 혹은 서양의 사상과 제도(서법) 보다 동양의 사상과 제도(동교)의 우월성을 확신했던 유학자 등 다양한 해석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는 실학의 연장선에서 개국통상론을 주장했고, 초기 개화사상의 형성에 교량역을 한 인물이자, 박지원 등으로부터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김홍집, 유길준 등의 개화파 청년들을 사상적으로 이어준 인물로 이해된다. 그는 명문가의 가풍, 학맥, 왕실과의 인연, 중국학자들과의 교유 등을 바탕으로 내외정세에 대한 넓은 안목을 갖고 국정의 조언자, 신진 인물들의 스승으로 넉넉한 인간상을 보여 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상의 그에 대한 인물 평가에 더 추가하자면 그는 순조~고종 집권 초기까지 효명세자(익종)의 학문적 ‘절친’이자 국왕 고종의 ‘멘토’였다는 점이다. 그가 고종의 멘토 격으로 역할을 한 흔적은 실록에 일부 보인다. 그는 도승지로서 고종 즉위 초기 국왕의 국정 자세와 다짐을 담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교서를 지었다.


“아! 나와 같이 어린 사람이 홍업(洪業)을 이어받고는 밤낮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행여 정사를 태만히 하지 말아서 위로는 하늘의 뜻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백성의 기대에 부합되게 하여 우리 조종(祖宗)께서 쌓아놓으신 인덕과 대왕대비께서 남기신 은근한 훈계를 더럽히지 말 것을 생각하였다.

듣자하니, 선유(先儒)들의 말에,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하는 즈음은 매우 두려워해야 한다.’ 하였으니, 이는 필경 정사와 법령을 시행하는 사이에 크게 하늘의 뜻을 감동시키지 못했거나 백성의 신망을 얻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 세력이 강한 자들이 겸병하여 백성들이 생업을 잃어버렸는가? 세금을 징수함에 법도가 없어 백성들의 힘이 고갈되었는가? 돈은 가치가 없어지고 물가는 비싸져서 농민(農民)과 공장(工匠)들이 고통스러워하는가? 사치가 지나쳐 절도가 없어 재정이 고갈되었는가? 뇌물을 숭상하여 탐욕이 성해졌는가? 청탁이 자행되어 송사(訟事)가 많아졌는가?

관리의 등용이 공정하지 못하여 관리가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가? 초야에 버려진 현재가 많아 선비들이 학문에 힘을 쓰지 않는가? 관작을 남발하여 기강이 문란해졌는가?

아! 하늘과 조종께서 정성스럽게 나를 돌보심이 어떠하며, 나에게 맡겨주신 것이 어떠한가? 혹시나 이 가운데서 한 가지라도 나에게 있다면 어찌 감히 선조가 받으신 아름다운 명을 잘 도모하고 닦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조정의 신하들에게 널리 고하노니,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나의 말을 분명히 듣고 모두 각각 나의 잘못을 숨김없이 지적하여 나의 미진한 점을 바로잡아서 저 하늘의 인애(仁愛)하는 마음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게 하라.”


요약하면 하늘의 뜻과 조종의 인덕, 대왕대비의 훈계를 받들어 백성의 삶을 성실히 돌보고 학문을 부지런히 닦되, 신하들의 간언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특히 백성들의 생업, 조세와 물가, 재정, 관리등용 인재 발탁, 관작남발과 청탁, 사치와 안락에 대한 경계와 학문 연마에 대한 언급 등은 어린 국왕에 대한 주문이자 그동안의 정치 풍토에 대한 지적이기도 할 것이다.


이후 고종에게 강의를 하던 박규수는 ‘신하들의 말을 경청하시라’ 는 내용으로 거듭 진언하였고, 고종은 경청할 것을 다짐하며 지시하였다.


“이제부터는 권강(勸講)이나 소대(召對)를 막론하고 강독(講讀)할 때마다 내가 과연 잘 읽었거든 잘 읽었다고 하고 잘못 읽었거든 잘못 읽었다고 하되 읽은 횟수를 계산하지 않는 것이 매우 좋을 것이니 이렇게 시행하는 것이 옳겠다.”하니, 강관(講官) 박규수(朴珪壽)가 아뢰기를, “신 등도 그렇게 하여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으나 황송스러운 생각이 앞서서 감히 선뜻 말씀을 올리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사실 간언(諫言)을 좋아하는 전하의 덕의(德意)를 저버린 셈이 됩니다. 삼가 나가서 강관인 옥당(玉堂)의 관리들에게 알리겠습니다.”하였다.

하교하기를,“만일 바른말을 해 주는 것을 어렵게 여긴다면 어떻게 여러 신하들과 함께 정사를 하겠는가? 도리에 맞는 정당한 말을 내 어찌 귀에 거슬린다고 하여 듣기 싫어하겠는가?”


▲ 고종의 꿈나무 박영효


[박규수와 고종의 꿈나무]


박규수가 고종의 스승격이라면, 고종이 미래 국가의 동량으로 생각했던 총아들로는 외척 가문 인물로 민영익, 민영환 등이, 그 외 영역의 인물들로 김옥균, 박영교, 박영효, 서광범 등이 있다. 이중 후일 갑신정변, 갑오개혁, 독립협회 운동, 을사늑약 전후, 헤이그특사 전후 등 고종의 정책과 관련하여 간헐적이나마 최후까지 등장하는 인물이 박영효이다.


박영효(1861~1839)에게는 두 개 호칭이 따라다닌다. 하나는 금릉위, 다른 하나는 ‘개화혁명가’이다. 금릉위는 흥선대원군와 박규수의 의중이 반영되어 철종의 부마, 즉 사위로 간택된 당시 ‘정일품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의 품계와 함께 부여된 작위이고, 개화혁명가는 박규수에게 훈도받은 청년들이 일본의 명치유신을 모델로 갑신정변을 일으킨 이후 붙여지게 된 명칭이다. 이후 그는 어려 차례 일본, 미국 등지로 망명했고, 평생 일본의 구속을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그에게 애국 혹은 친일의 낙인이 붙는 배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구절양장의 인간사를 누가 단정할 수 있는가, 환재 선생의 질타가 들려오는 듯하다.


분명한 것은 박영효의 존재가 빠진다면, 한국 근대사 이야기가 상당부분 무미건조해 질 것이란 점이다. 대한민국 국기의 원류가 된 최초의 태극기 제정, 근대 수도 서울 최초의 도로정비, 한국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 개항 초기의 개화당 형성과 갑신정변, 갑오경장과 지방제도 개혁, 독립협회운동과 광무황제, 일제하 조선인의 식산운동과 언론, 이우공과 박찬주 여사의 결혼 비사 등등 모든 일과 이야기가 달라졌거나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 수신사 박영효는 최초로 태극기를 해외에서 사용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박규수는 병인양요 당시 평양감사로서 제너럴 서면호를 격침시킨 장본인이다. 이 일로 조정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졌다. 그러나 이후 박규수는 쇄국을 고집하는 흥선대원군과 달리 서양사정과 문호개방에 깊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미 1860년 영불연합군이 북경을 침략한 직후 열하를 다녀온 그의 눈에 조선의 장래는 어두웠다. 서양은 물론 일본도 이미 해양의 시대로 돌입해, 넓은 바다에 철선(鐵船)을 띄우고, 서울의 한강에까지 배를 띄워 오가는데, 조정 내외의 보수적 인사들은 서양을 오랑캐라 배척하고, 코앞에 닥친 나라의 운명을 서양 사정을 알아보며 타개할 방도를 모색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흐름 속에 박규수는 젊고 총명한 양반 자제들에게 관심을 부여했다. 박영효가 영혜옹주(철종의 유일한 혈손)의 부마로 간택되는 과정에도 박규수의 역할이 있었다. 박영효의 부친에게는 3남 2녀가 있었다. 박영효는 큰형인 영교를 따라 친척인 박규수의 사랑을 드나들면서 오경석, 유대치 등으로부터 개화사상을 익혔다. 후일 이광수를 만났을 때 박영효는 “우리들의 새로운 사상은 박규수의 사랑에서 나왔다”고 회고했다.


박규수의 사상은 조선의 개항과 박영효ㆍ김옥균ㆍ서광범 등 신진기예의 청년들에 의해 개화혁신 운동으로 이어졌다. 다만, 박규수 같은 1세대 개화사상가가 세상을 떠난 뒤 혈기방장한 이들을 단도리 해 줄 원로그룹이 없었던 점은 아쉬웠다. 박규수의 타계와 빈 공간을 채워 준 1세대 개화사상가들이라면, 역관 오경석, 의관 유대치 등을 꼽을 수 있겠으나, 이들은 중인 신분이었다. 이들의 역할과 영향력에는 많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순조 이래의 조정 흐름을 놓고 볼 때 제왕 수업을 착실히 다져가던 효명세자가 2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나고, 고종이 문호개방 쪽으로 정책을 취한 지 얼마 안 되어 박규수가 세상을 떠난 것은 조선의 불운이라 생각된다. 고종은 은연 중 박영효 등 신진기예의 청년들을 후원했지만, 이들과 조정의 중신들 사이를 조율할 원로가 아쉬웠다. 갑신정변 전후의 사태가 이를 잘 보여준다. 임오군란 이후 청국의 간섭을 받는 상황에서도 고종의 정책 방향은 개화파에 가까웠다. 그러나 원로급 지도자의 역할이 빠진 틈에 노회한 일본 정객의 선동과 분열책이 우국충정에 가득한 청년들을 정변으로 치닫게 한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 결과는 고종 집권 전반기 리더십의 좌절이자, 19세기 후반에 싹터가던 근대화 정책에 치명타가 되었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광린,『개화당연구』, 일조각, 1973. 신용하,「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역사학보』107, 1985. 이완재,「박규수의 가계와 생애」,『한국사상사학』12, 1999. 김명호,『환재 박규수 연구』, 창비, 2008. 김종학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 일조각,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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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력>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문학박사(역사학)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
    -원광대 사범대 초빙교수
    -국제한국사학회(회장)
    -현재: 동아역사연구소(소장)
    현대의전연구소 자문위원

    <주요저술>
    『이상설-신교육과 독립운동의 선구자』』(역사공간, 2017)
    『대한민국의 태동』』(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5)
    『조완구-대종교와 대한민국임시정부』』(역사공간, 2012)
    『조선후기 외교의 주인공들』(백산자료원, 2007)(공저)
    『Q&A한국사: 근현대』(청아출판사, 2008)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국학자료원, 2002)
    『한국의 황제』(대원사, 2001)

    <번역서>

    『국역 윤치호영문일기』 2(국사편찬위원회, 2014)
    『국역 윤치호영문일기』 3(국사편찬위원회, 2015)
    『나의 친구 윤봉길』(도서출판 선인, 2017)(原著: 金光, 『尹奉吉傳』, 上海: 韓光社,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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