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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2-15 12:08:28
  • 수정 2019-02-15 14: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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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관계의 출발과 현재]


한국과 미국이 역사상 처음으로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1882년이다. 당시 고종은 미국과의 수호조약 체결을 고대하였고, 미국 측의 사절 파견 소식에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근래 들어 언론이나 방송에서 고종은 청일전쟁 직후 일본이냐, 러시아냐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서 아관파천을 통해 러시아를 택하였으니 친러파라는 주장을 흔히 접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내막을 잘 모르는 주장이다. 친미, 친러, 친일 식으로 과장해 표현하자면, 고종은 당연히 친미파이고, 친러는 일본의 강박에 따른 차선의 방책에 불과하였다.


▲ 1882년 고종이 미국과 체결한 조미통상우호조약 [한국학중앙연구원]


고종의 미국에 대한 호의적 감정은 조미조약 체결과정은 물론, 공사파견에 대한 보답, 즉 보빙(報聘)의 목적으로 1883년 민영익과 홍영식 등의 일행을 미국 방문 사절로 파견할 당시는 물론, 1887년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일행 파견 당시에도 잘 노출된다. 미국에 대한 고종의 관심은 그야말로 짝사랑이라 할 만 했다. 고종은 미국을 영토 침략 야욕이 없는 부강한 나라이고, 조선을 청국이나 일본, 러시아의 간섭과 위협으로부터 막아 줄 형제의 나라로 보았다.


조미조약에 등장하는‘호의적 주선’(Good Office, 거중조정(居中調整)으로도 해석됨), 즉 한 당사국이 제3국과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다른 당사국이 성의껏 중재하여 주도록 한다는 조항에 그토록 매달린 이유도 그러하다.(이점 후일의 이승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다른 어느 외국 보다 미국인 의사, 즉, 의료선교사와 교사, 고문관 등을 가장 많이 초빙하여 근대화에 활용하고자 하였고, 청일전쟁 직후 고종과 왕비가 운산금광을 미국인에게 내어 준 이유도 거기에 있다.


실제로 초기에 내한한 의료 선교사 알렌이나 아펜젤러, 언더우드, 스크랜턴 등 미국의 감리교나 장로교 계통 선교사, 헐버트, 길모어 등의 육영공원 교사, 그레이트하우스, 제너럴 다이와 같은 고종의 군사고문 등 여러 인사들 중에는 그에 부응한 역할을 해 준 인물들이 적지 않다.


더불어 고종과 조선 조정은 미국에 대한 기대가 컸고, 동맹국으로까지 발전하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그런 바람은 거기까지였다. 미국은 조선은 물론, 대한제국 당시에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한미관계는 동맹국 관계로 발전하지 못하였고, 고립무원한 대한제국은 1910년 멸망했다.


이후 고종의 그런 소망이 성취된 것은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6.25를 거치면서 이승만의 집요한 외교적 공세가 겹치면서였다. 1953년에 맺어진 한미상호방위동맹이 그것이다. 최초의 조미조약 체결 이후 72년 만에 이룬 성과였다. 고종이 그토록 갈망했던 동맹이 고종을 그토록 저주했던 이승만에 의해 달성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여하튼 이것이 군사외교적 디딤돌이 되어, 대한민국은 국토 방위에 대한 불안감을 상당부분 덜고,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구호 아래 경제, 산업 발전에 박차를 가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 많은 국내외 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이 처음 만날 때의 모습은 전연 딴 판이었다. 미국 측은 구애하고, 조선은 막무가내로 거부하는 형국이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강화도에서의 조선군과 미군의 접전, 즉 신미양요이다. 당시는 고종이 직접 정사를 챙기기 이전, 즉 조선의 문호를 폐쇄하여 고립을 자처하던 때, 즉 흥선대원군이 실세였던 때였다.


▲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들어온 제네럴 셔먼호


[제너럴 셔먼호 사건]


조선 정부의 프랑스신부 9명 처형으로 조만간 프랑스함대가 조선을 쳐들어오리라는 소문으로 조선 조정 내외가 불안한 가운데, 정체불명의 배 한척이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왔다.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였다. 셔먼호는 백령도를 거쳐 대동강 하구의 급수문을 지나 거침없이 대동강을 거슬러 온 것이다. 배의 승조원들은 프랑스신부의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함대가 쳐들어 올 것이라 하면서 통상교역을 요구하였다. 조선관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장마로 불어난 강물을 거슬러 만경대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장마비가 그치면서 갑자기 수량이 줄어 운항이 어려워지자, 불안을 느낀 그들은 중군 이현익을 납치하는 등 난폭한 행동을 하였다. 이에 분노한 평양군민이 달려들어 양측 사이에 충돌이 빚어졌다. 배에서 대포를 쏘아대자 군민 중에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셔먼호는 운항이 자유롭지 못하였다. 평양감사 박규수가 화공을 명하여 공격하자 셔먼호는 꼼짝없이 불에 타 버리고 말았다. 배에서 뛰어 나온 선원들도 자극된 평양의 군민들에게 잡혀 타살되었다.


이때 평안감사(平安監司)는 조정에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장계(狀啓)를 올렸다.


“평양부에 와서 정박한 이양선(異樣船)에서 더욱 미쳐 날뛰면서 포를 쏘고 총을 쏘아대어 우리 쪽 사람들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들을 제압하고 이기는 방책으로는 화공 전술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므로 일제히 불을 질러서 그 불길이 저들의 배에 번져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쪽 사람들인 최난헌(崔蘭軒)과 조능봉(趙凌奉)이 뱃머리로 뛰어나와 비로소 목숨을 살려달라고 청하므로 즉시 사로잡아 묶어서 강안으로 데려왔습니다. 이를 본 군민들이 울분을 참지 못해 일제히 모여들어 그들을 타살했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섬멸했습니다. 그제서 성안의 소요가 비로소 진정되었습니다.”


실록의 해당일자에는 배의 이름(General Sherman)은 등장하지 않고, 사람 이름에 최난헌(崔蘭軒)이 등장하고 있다. 아마도‘제너럴 셔먼’의 중국어 발음에 가까운 한자로 배의 이름을 알려 준 것으로 보이지만, 소통이 잘 안되다 보니 그 배를 타고 와서 조선 측과 대화를 나누고자 했던 선교사 토마스(Thomas, Robert Jermain)의 이름을 그렇게 오해하여 기록한 것 아닌가 추측된다.


당시 제너럴 셔먼호는 성조기를 달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이들은 그것이 미국기인지 무엇인지 알 턱이 없었다. 국적을 영국으로 잘못 알고 있던 조선 측에서는 뒤에 미국 측의 항의를 받고서야 알게 되었다. 원래 셔먼호는 선주가 미국인 프레스톤(Preston,W.B.)이었지만, 천진에 도착한 뒤 영국의 메도즈 상사(Meadows and Company)와 계약을 체결하여 임대 중이었다. 완전무장한 선원에다 대포 2문까지 갖춘 무장 상선이었다. 메도즈 상사는 조선과 교역을 희망한 것이고, 영국인 개신교 선교사 토머스는 포교의 꿈을 안고 조선 행을 택한 것이었다.


▲ 신미양요 당시 덕진진과 남장포대에서 미군함을 공격하는 조선군 [한국학중앙연구원]


[신미양요-광성보의 성조기]


한편 제너럴 셔먼호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미국 측에서는 조선 연안에서 모종의 사태가 발생했을 것으로 짐작하였다. 더불어 조선의 개항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미국 측에서는 두 차례나 탐문 항행을 계획하였다. 조선에서 사태가 발생하였다면, 응징도 하고 손해배상도 청구하고, 가능하면 통상조약도 맺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모두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다 1871년에 이르러 마침내 조선 원정을 단행하였다.


미국의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Rodgers,J.)는 3월 27일(5/16) 콜로라도(Colorado)호를 기함으로 군함 5척에 군사 1,230명, 대포 85문을 탑재하고 조선원정에 나섰다. 청국주재 미국공사 로우(Frederich F.Low)도 함께 한 채였다. 원정에 앞서 일본의 나가사키(長崎)에서 약 보름 동안 해상 기동훈련을 실시한 뒤였다. 조선이 개항의 협상을 거부할 경우 무력을 행사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페리제독의 일본 개항을 본 딴 것이었다.


로저스는 인천 앞바다에 도착 한 뒤 서울로 가기 위해 수로를 탐색하겠다고 조선 측에 통고한 뒤 강화해협에 들어섰다. 로저스의 함대가 손돌목에 이르자 조선의 강화포대에서 사격을 하였다. 조선과 미국 아시에 처음으로 군사적 충돌이 벌어진 것이다.(손돌목 포격사건) 로저스 측은 평화적 탐측활동에 대한 포격이라고 주장하며 조선 대표의 파견을 통한 협상과 사죄 및 손해배상을 하라고 요구하였다. 거부하면 10일 후에 보복하겠다는 단서도 붙었다. 물론 조선 측에서는 주권과 영토의 침략 행위라고 반박하고 이를 거부하였다. 양측 모두 한번 해보자는 식이었다.


미국측은 4월 23일(6/10) 초지진에 상륙하여 공격작전을 개시하였다. 10개 중대의 상륙부대에 포병대, 공병대, 의무대, 사진촬영반이 동원되었다. 수륙 양면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함상에서 조선군 포대를 향하여 대포를 쏘아 댔다. 해병대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초지진을 점령한 뒤 야영을 하였다. 한밤 중에 조선군의 야습이 있었지만, 별다른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다음날 아침 미군은 덕진진을 공격해 들어갔다. 해상에서 함포가, 육상에서 포병대가, 미군을 엄호하는 가운데 덕진진도 손쉽게 점령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광성보. 강화의 진무중군 어재연의 찰주소(札駐所), 즉 사령부가 있는 곳이었다. 11일 아침 11시 부터 약 1시간 동안 미군의 집중적인 포격이 가해진 후 상륙한 미군 해병이 광성보로 진격해 들어갔다. 거기서 어재연이 600여명의 병력으로 결사 항전하였다. 남북전쟁에 참여했던 역전의 미군과 화승총을 든 조선군 사이에 백병전이 벌어졌다. 이때 조선군은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아홉겹(30겹이라고도 함) 솜 넣은 옷을 입고 있었다. 솜옷은 방탄용이었으나 오히려 무더위에 희생자만 늘리는 결과가 되었다.


한 시간 가량의 공방 끝에 마침내 광성보도 미군에게 함락되었다. 조선군 피해는 어재연 형제를 비롯하여 진무영 천총(千總) 김현종, 광성별장 박치성 등 전사자 350명(미측 자료), 부상자 20여명. 미군은 맥키(Hugh Mckee) 중위 이하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이었다. 이상은 미군측이 확인한 숫자로, 그중 광성보 전역에 널려 있는 시체수가 243구, 해협에 떨어져 죽은 자가 100여구였다. 그러나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조선군 전사자가 53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군민의 사기를 고려하여 대폭 축소한 듯하다.


당시 450명의 해병대를 이끌고 광성보를 점령한 미군의 지휘관은 블레익(Homer C. Blake) 중령이다. 그는 남북전쟁에 종군하여 용맹을 떨친 군인이다. 조선군의 저항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이렇게 회상하였다.


그렇게도 협소한 장소에서, 그렇게도 짧은 시간 내에 그처럼 많은 불꽃, 납덩이, 쇠붙이가 오고 간, 화약과 연기 그득한 전투를 본 적이 없다. (William Elliot Griffis, America in the East)


참으로 격렬한 전투였다. 비록 빈약한 무기 때문에 미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기는 했지만, 우국충정이 가득한 조선군의 반듯한 정신력만은 높이 살만했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김원모,『근대한미교섭사』, 홍성사, 1979 송병기, 『근대한중관계사연구』,단대출판부, 1985. 이배용, 『한국근대광업침탈사연구』, 일조각, 1989. 이성무, 『조선왕조사』2, 동방미디어,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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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원 역사 에디터 이민원 역사 에디터의 다른 기사 보기
  • <경력>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문학박사(역사학)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
    -원광대 사범대 초빙교수
    -국제한국사학회(회장)
    -현재: 동아역사연구소(소장)
    현대의전연구소 자문위원

    <주요저술>
    『이상설-신교육과 독립운동의 선구자』』(역사공간, 2017)
    『대한민국의 태동』』(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5)
    『조완구-대종교와 대한민국임시정부』』(역사공간, 2012)
    『조선후기 외교의 주인공들』(백산자료원, 2007)(공저)
    『Q&A한국사: 근현대』(청아출판사, 2008)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국학자료원, 2002)
    『한국의 황제』(대원사, 2001)

    <번역서>

    『국역 윤치호영문일기』 2(국사편찬위원회, 2014)
    『국역 윤치호영문일기』 3(국사편찬위원회, 2015)
    『나의 친구 윤봉길』(도서출판 선인, 2017)(原著: 金光, 『尹奉吉傳』, 上海: 韓光社,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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