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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2-05 11:4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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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 당시 있었던 프랑스군의 강화부 약탈은 1860년 영, 불 연합군의 북경 약탈을 연상케 한다. 당시 영불 연합군은 북경을 쳐들어가 원명원(圓明園) 등의 진귀한 보화를 약탈하였다. 장교와 병사들은 값진 보물을 팔과 어깨에 주렁주렁 걸치고 등에 짊어져도 넘쳐나 스스로는 가지고 갈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게다가 보물 잔치를 한 그들은 원명원을 통째로 불살라 버렸다.


참고로 원명원은 북경 근처에 있는 청나라의 이궁(離宮)이다. 강희제 당시인 1707년 옹친왕에게 하사한 정원이었는데, 그가 황제(옹정제)로 즉위한 후 여러 건물이 증축되었고, 정원도 확장되었다. 이후 건륭제 당시에는 원명원 안에 장춘원(長春園), 기춘원(綺春園) 이 건설되었다. 기춘원은 후에 만춘원(萬春園)으로 개칭되었다. 창춘원 북쪽에는 서양풍의 건물이 지어지고, 거기에 사고전서(四庫全書) 정본을 소장하였다. 그러나 함풍제 재위 당시 1856년 애로호 사건(제2차 아편전쟁)을 계기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북경에 침입하자 황제는 열하로 피난을 갔고, 외국군대는 원명원을 약탈하고 파괴하였다. 이후로도 피해는 이어져 문화대혁명 등을 지나면서 원명원은 더욱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 원명원을 1980년대 들어서면서 중국 당국이 생각을 전환하여 유적공원 건설을 시작하였고 일부 지역을 회복하였다. 현재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애국심 고취와 관광 자원으로 변모하였다. 이후 많은 논란을 거친 끝에 중국 당국이 거금을 투입하여 복원 공사를 실시하기로 하였으며, 절강성의 기업인들은 300억 위안(약 5조2천400억 원)이란 거금을 들여 성내에 대규모의 원명신원을 조성하여 2015년에 정식으로 개장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청국이 번영을 누릴 때 지어진 원명원은 후일 청국을 침략한 외국군에게 파괴되고, 한 때 중국 당국으로부터도 봉건잔재로 구박을 받았다. 이제 인식이 바뀌어 귀중한 문화유산이자 중국의 자존심으로 복귀하니,‘인간지사 새옹지마’라는 격언이 겹쳐져 보인다.


▲ 프랑스에서 반환받은 의궤 [뉴시스]


강화도의 약탈도 규모는 작지만 영국과 프랑스군에 의한 원명원 약탈의 유사한 형태였다. 이때 약탈한 강화부 외규장각(外奎章閣) 소장의 전적(典籍) 340여 책 중 일부가 일반에게 잘 알려진 조선조의 의궤(儀軌)이다. 1979년 프랑스에 유학하던 박병선 박사가 이를 발견하여 국내에 소개한 이후 많은 관심을 모았다. 그러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프랑스의 고속철(떼제베)을 들여오기로 계약할 당시 한창 언론에 보도되었다. 미테랑 대통령 시절의 프랑스는 의궤 한권을 가져와 보여주면서 이를 반환해 줄 듯 제스쳐를 보였지만, 잠깐 보여준 것 외에는 의궤 전체의 반환이 불가능한 듯 보이면서 많은 논란이 일었다.


프랑스측은 전리품이라는 것이었고, 이쪽에서는 약탈품이라는 논리였다. 프랑스는 문화를 지극히 사랑하는 나라로 널리 알려져 있고, 국기도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청백적(靑白赤)의 삼색기(三色旗)이다. 약탈한 문화재로 인해 한국인들의 원성을 사는 것과 이를 원주인에게 반환하는 것, 어느 것이 프랑스의 이념에 부합하는 것인가. 이를 반환한다면 프랑스가 문화대국의 모범을 보이는 전기가 되지 않을까. 이렇게 주장하는 한국인들이 적지 않았고, 필자도 그렇게 쓴 적이 있다. (『조선왕조사』2, 동방미디어, 1998)

그러나 한국의 문화유산이 해외의 미국, 영국 등지의 저명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니,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계기로도 활용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다른 주장도 있다. 주로 외교관이나 현지의 큐레이터, 유학생 등 일부의 견해이기도 하다. 


현재 런던의 대영제국 박물관이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워싱턴의 스미소니안 박물관 등지에 전시된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의 미이라와 각종 기념비, 석상 등에 대해서도 그런 주장은 교차되고 있고, 국제사회의 뜨거운 논쟁거리이기도 하다.


일단 프랑스에 소장된 조선의 의궤는 한국 정부와 프랑스 정부 사이에 상당기간 난항을 겪다가 2011년 양국이 반환하기로 서명했고, 5년마다 갱신하는 영구 대여의 형식을 취하였다. 이후 의궤 297권의 반환을 완료하였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들 의궤는 모두 어람용이고, 그중 약 30책이 다른 곳에는 없는 유일본이다. 


참고로 조선조의 의궤는 길례(왕실의 제사에 관련된 의례), 흉례(왕실의 장례에 관한 의례), 가례(왕실의 혼인 관련 의례), 빈례(외교사절에 대한 응접의례), 군례(군사 관련 의례) 등 각종 국가 행사에 관한 일종의 기록물이자 화보이다. 그림을 통해 행사의 모든 진행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천연색의 그림과 글, 통계로 보여주고 있다. 요즘으로 치면 영상기록물이자 국가 의전에 관한 매뉴얼이다. 즉 각종 국가적 의례와 행사에 소요된 물자와 인력, 진행 절차 등이 당시의 최첨단 기술을 동원하여 그리고, 기록하고, 장정하여 최고의 장정과 정성을 기울여 도서로 제작한 것이다. 그중 어람용은 국왕에게 보고하기 위한 용도이고, 나머지는 분상용, 즉 나누어 비치하기 위한 용도로 제작된 것이다.


조선의 의궤는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서울대 규장각(이상 분상용),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파리의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어람용 의궤)에 각기 소장되어 있다. 분상용이란 재난에 의해 분실, 소실되는 일을 대비하여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하기 위한 것이란 뜻이고, 어람용은 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나아가 왕이 열람해 보기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1980년대에 이들 의궤의 자세한 사항과 국내, 국외 소장처 등을 비교 대조해 출판한 것이 고 박병선 박사의『조선조의 의궤: 파리 소장본과 국내소장본의 서지학적 비교검토』(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이다.


1979년 파리에서 조선의 의궤를 발견하여 한국에 알린 고 박병선 박사는 그곳 도서관의 사서직에서 쫒겨나기도 하였다고 한다. 한 연구자의 조선조 의궤 발견과 이에 대한 문제 제기로부터‘ 반환’까지 근 32년 정도가 걸린 셈이다. 외로운 학자의 집념과 한국 사회의 여론, 그리고 프랑스와 한국 양국의 경제, 문화적 교류가 어울려 이루어 낸 공동의 성과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박병선,『조선조의 의궤: 파리 소장본과 국내소장본의 서지학적 비교검토』(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성황용,『근대동양외교사』, 명지사, 1993. 김용구,『세계외교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 이성무,『조선왕조사』2, 동방미디어,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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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원 역사 에디터 이민원 역사 에디터의 다른 기사 보기
  • <경력>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문학박사(역사학)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
    -원광대 사범대 초빙교수
    -국제한국사학회(회장)
    -현재: 동아역사연구소(소장)
    현대의전연구소 자문위원

    <주요저술>
    『이상설-신교육과 독립운동의 선구자』』(역사공간, 2017)
    『대한민국의 태동』』(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5)
    『조완구-대종교와 대한민국임시정부』』(역사공간, 2012)
    『조선후기 외교의 주인공들』(백산자료원, 2007)(공저)
    『Q&A한국사: 근현대』(청아출판사, 2008)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국학자료원, 2002)
    『한국의 황제』(대원사, 2001)

    <번역서>

    『국역 윤치호영문일기』 2(국사편찬위원회, 2014)
    『국역 윤치호영문일기』 3(국사편찬위원회, 2015)
    『나의 친구 윤봉길』(도서출판 선인, 2017)(原著: 金光, 『尹奉吉傳』, 上海: 韓光社,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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