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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1-29 11:18:42
  • 수정 2019-01-29 12:5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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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교 박해로 500여명이 순교한 공주 금성동의 황새바위성지 [충청남도]


[조선의 천주교도 박해]


18세기말 천주교는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교회를 설립하는 등 발전을 보게 되었지만, 조선 정부로부터 혹독한 박해를 받기도 하였다. 순조 원년, 즉 신유년의 박해(신유박해,1801), 헌종 5년, 즉 기해년의 박해(기해사옥,1839)가 그것이다. 그러나 철종조에는 안동김씨 세도가들도 천주교에 관대한 태도를 보였고, 그러한 분위기에서 베르누(Simon Francois Berneux, 한국식 이름은 장경일(張敬一)) 등 12명의 프랑스 신부가 입국하여 선교 활동을 하였다. 게다가 1860년에 벌어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청국 수도(북경) 점령 사태는 서양의 군대가 조선에도 쳐들어오리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분위기에서 조선에서는 천주교에 입교하여 자신의 안위를 도모해 보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렇다면 고종의 즉위는 천주교도의 활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풍양조씨가 영향력을 미쳤던 순조, 헌종 때는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있었다. 그러므로 고종이 즉위하면서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 것은 천주교의 앞날에 다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것이었다. 그러나 정국의 주도권은 곧 흥선대원군에게 넘겨졌고, 그 점은 천주교도들에게 희망을 보여준 것이었다. 무엇 보다 흥선대원군의 부인과 고종의 유모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이를 모를 리 없는 흥선대원군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천주교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입장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라와 조정에 과연 어떠한 작용을 하게 될 것인가가 그것이다. 그러나 결론은 불온하다는 쪽으로 났다.


1860년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자 러시아는 이를 중재하여 준 댓가로 천진조약을 통해 연해주를 확보하였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러시아가 국경을 맞대게 된 것이다. 그 후 자주 러시아인들이 통상을 요구하였고, 러시아가 남진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흥선대원군과 고관들이 불안해하였다. 이때 승지 남종삼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침을 저지하자는 건의를 하였다. 조선에서 활동하는 베르누 프랑스 주교를 활용하면 가능할 것이라 하였고, 흥선대원군도 이를 받아들일 듯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간에 일이 어그러졌다. 지방에 가 있던 다블뤼 주교와의 연결이 지체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북경을 다녀 온 동지사(冬至使) 이흥민(李興敏)도 청국에서 천주교도를 탄압하고 있다는 보고를 하였다. 게다가 조정의 고관 조두순 등도 배외정책을 지지하였다.


앞서 황사영의 백서사건(帛書事件)으로 일반 국민들이 천주교도들을 외세의 압잡이로 오해하고 있었던 데다가, 이런 사태가 겹치면서 흥선대원군은 180도로 생각을 돌렸다. 천주교도를 박해하는 쪽으로 방침을 굳힌 것이다. 서양 신부도 서양 오랑캐와 한통속이고, 조선의 천주교도들은 그들의 앞잡이라고 보았다. 이로부터 대대적인 박해가 가해졌다.


1866년 1월 5일 베르누 주교의 하인 이선이와 전장운, 최형 등이 체포되었다. 이들에게 무시무시한 고문이 가해졌다. 이어 베르누 주교, 다불뤼(Daveluy)주교 등 프랑스 신부 9명과 홍봉주, 남종삼은 물론, 정의배, 전장운, 최형 등의 주요 신자들과 수 천 명의 교인들이 서울과 전국에서 체포되었다. 이들 모두 서울의 새남터와 충남 보령의 갈매못 등지에서 순교하였다. 박해의 현장은 참으로 목불인견이었다고 한다.


이때 전국을 일제히 수색하니 포승에 묶여 끌려가는 모습이 길가에서 보이는 정도였고, 포도청 감옥이 만원이 되어 재결할 수도 없었다. 그 중에는 아낙네, 어린 아이들과 같은 철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포장이 민망하여 천주교를 믿지 말 것을 타일러도 신자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이때 매로 때려서 기여코 회개시키고자 하니 피부가 낭자하게 터지고 피가 청(廳)에까지 튀어 올랐다.(중략) 죽일 때마다 교를 배반하겠는가고 물으면 어린 아이들도 그 부모를 따라서 천당에 오르기를 원하였다. 흥선대원군이 듣고서 다 죽이라고 명하고 어린아이들만은 살려주라고 하였다. 시체를 수구문 밖에 산더미처럼 쌓아 버리니 백성들이 벌벌 떨면서 더욱 더 조정의 명을 두려워 하게 되었다.(출처: 근세조선정감 )


혹독하기 이를 데 없고, 너무도 많은 희생자를 낸 병인사옥(1866-1872)의 참상이 바로 이것이다. 병인사옥은 신유사옥, 기해사옥과 더불어 3대 사옥이라 하는 바, 그중에서도 병인사옥이 가장 심하였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을 자극하여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가중시킨 사건이 있었다. 오페르트 도굴사건과 두 차례의 양요, 즉 서양 세력과의 충돌이 그것이다.


▲ 흥선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충남 예산군]


[현존 국왕 조부의 무덤을 파헤친 사건: 오페르트 굴총사건]


프랑스 함대의 침략을 전후로 조선 조야의 서양인에 대한 적개심을 고조시킨 다른 사건이 있었다.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Oppert)라는 독일 상인 일행이 남연군묘소를 도굴하려한 일이 그것이다. 남연군이라면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이자, 조선 국왕의 친할아버지가 아닌가? 오페르트는 두 차례에 걸쳐 배를 타고 상해로부터 충청도 앞바다에 도착한 바 있다. 그는 조선 측 지방관헌에게 통상의사를 표명하면서 국왕의 알현까지 요구하였지만, 번번이 거절당하였다. 1866년 2월과 6월, 7월이었으니 프랑스함대의 1차원정이 있기 직전이다. 그는 조선과 통상을 하여 일확천금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2차에 걸쳐 내항한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뒤(1868) 오페르트는 제3차의 항해를 계획하였다. 병인년의 박해를 피해 중국에 와 있던 페론 신부의 권유도 있었다. 오페르트는 680톤짜리 차이나호(China)를 빌려 그해 4월 18일(5/10) 약 130명의 인원을 이끌고 충청도 해안(덕산군 구만포)에 상륙하였다. 그중에 한국인 천주교 신자 최선일(崔善一)과 상해의 미국영사관 통역을 지낸 젠킨스(F.B.Jenkins)외 8명의 서양인 선원, 20명의 말레이인, 100명의 중국인 수부가 있었다.


국제적 도굴범 집단이 될 오페르트 일행은 현지 주민들에게 자신들을 러시아병이라고 사칭하였다. 러시아 당국이 알면 뒤집어질 일이자 국제적 흉악 범죄였다. 이어 덕산군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빼앗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놀란 덕산군수가 이유를 물으니 총을 쏘며 접근을 못하게 하였다. 이들은 늦은 밤이 되자 남연군의 무덤 앞에 이르러 삽질을 시작하였다. 뒤 쫒아 간 덕산군수와 아전 등이 혼비백산할 지경이었다.


이게 누구의 묘인가? 나라 임금님의 할아버지이자, 호령 한마디에 산천초목이 벌벌 떤다는 대원위대감의 부친이 잠든 묘가 아닌가. 덕산군수와 아전, 군민들이 죽기 살기로 달려들어 제지하려 하였지만, 총기로 무장한 그들을 대적할 방도는 없었다. 다행이도 남연군의 묘광(墓壙)은 오래 전 흥선대원군의 사전 조치로 견고하기가 바윗돌과 같았다.


야사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원래 그곳은 절터였는데 명당임을 안 흥선대원군이 반은 협박하다시피 하여 주지승을 매수하고 그 터를 샀다. 부친의 유골을 이장하기 위해서였다. 이장할 당시 무슨 생각에서인지 흥선대원군은 석회를 끓여 부어 묘광을 단단히 덮어 두었다. 돌아가는 길에 세 형들은 모두 요괴의 꿈을 꾸고 두려워 했는데, 흥선대원군만은 오히려 명당임이 틀림없다고 기뻐하며 두려워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돈을 챙긴 뒤 몰래 길을 나서던 주지승은 갑자기 발광하다 게거품을 물고 죽었다. 요괴가 호통친 때문이라 했으나,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그렇게 된 대강의 배경이 짐작되는 부분이다.


이렇게 석회로 단단히 굳힌 무덤이었으니, 삽질이 잘 될 리가 없었다. 서둘러 내려치는 곡괭이도 되튀기만 할 뿐, 시간만 지체되었다. 배를 대어 둔 해안의 조수가 빠져 나갈 시각은 임박하고, 자칫 소문을 듣고 몰려오는 관민들에게 잡혀 도륙을 당할 판이었다. 초조해진 일당은 작업을 포기하고 줄행랑을 쳤다. 공주영에서 군관과 포수들이 득달같이 들이닥쳤을 때 일당은 차이나호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달아난 뒤였다.


사태를 전해들은 흥선대원군은 노기충천하였다. 양이를 추적하여 박멸하라는 엄명을 내리는 한편, 천주교도들이 내응했다고 보고 이들의 색출과 처단을 명하였다. 다시 천주교도들에게 피를 부르는 박해가 가중되었다. 그 사이 오페르트 일행은 한술 더 떠 기고만장한 행동을 하였다. 경기도의 영종진 앞바다에 도착한 오페르트는 현지의 영종첨사를 통해 흥선대원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전하게 하였다.


“묘소를 범한 것은 예에 어긋나는 일이나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보복하려는 데서 나온 일이다. 속히 고위 관원 한 사람을 보내어 우리와 협상토록 하라. 그렇지 않을 경우 반드시 국난을 당할 것이다.”(오페르트 저, 한우근 역, 『조선기행』 ; 유홍렬, 『한국천주교회사』를 참고)


참으로 방자하기 짝이 없었다. 일개 상인이 한 나라의 집권자를 상대로 협박하고 있는 게 아닌가? 정부에서는 조용히 글을 되돌려 보냈다. 그 사이 오페르트는 또 다시 사단을 일으켰다. 영종도에 상륙하여 총질을 해대며 성문을 뜷고 들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수비병들이 반격을 가해 그의 일행 중 2명을 사살하였다. 오페르트는 천방지축으로 날뛰었지만, 결국 2명의 시체만 남기고 달아났다. 마치 서부활극에 등장하는 악당들 같았다.


오페르트 일행의 행위가 미친 영향은 실로 컸다. 오늘날에도 그러하지만, 당시대 조선인들에게 조상의 무덤이란 목숨보다도 소중하고 신성시하는 대상이었다. 도굴 사건은 조선인 모두에게 서양인에 대한 적개심을 높이게 하였다. 서양인들은 남의 무덤이나 파헤치고 아무에게나 총질을 해대는 불법 무도한 야만인이라는 생각이 조선인들에게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오폐르트의 남연군묘 도굴 사건은 동서양 어느 쪽에도 도움이 안 되는 만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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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원 역사 에디터 이민원 역사 에디터의 다른 기사 보기
  • <경력>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문학박사(역사학)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
    -원광대 사범대 초빙교수
    -국제한국사학회(회장)
    -현재: 동아역사연구소(소장)
    현대의전연구소 자문위원

    <주요저술>
    『이상설-신교육과 독립운동의 선구자』』(역사공간, 2017)
    『대한민국의 태동』』(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5)
    『조완구-대종교와 대한민국임시정부』』(역사공간, 2012)
    『조선후기 외교의 주인공들』(백산자료원, 2007)(공저)
    『Q&A한국사: 근현대』(청아출판사, 2008)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국학자료원, 2002)
    『한국의 황제』(대원사, 2001)

    <번역서>

    『국역 윤치호영문일기』 2(국사편찬위원회, 2014)
    『국역 윤치호영문일기』 3(국사편찬위원회, 2015)
    『나의 친구 윤봉길』(도서출판 선인, 2017)(原著: 金光, 『尹奉吉傳』, 上海: 韓光社,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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