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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10-17 19: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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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리케 항해 왕자의 초상으로 1837년에 발견되었다. [이명희]


[엔리케 항해 왕자(Infante Dom Henrique, 1394.03.04.-1460.11.13.)]


[출생]

  엔리케 왕자는 14세기 말에 아비스 왕조를 연 포르투갈 국왕 죠앙 1세(재위 1385-1433, Avis 왕조 개창)의 왕자이다. 어머니는 잉글랜드 랭커스터 공작 존 오프 곤트(John of Gaunt)의 딸인 필리파(Philippa of Lancaster)(주1)이다. 


  엔리케는 죠앙1세아 필리파 왕비의 5명의 아들 가운데 3남으로 태어났다(1394년). 왕위는 장자인 두아르테(1391-1438)에게 계승되었고, 엔리케 등 다른 왕자들은 초기 아비스 왕조의 기틀을 잡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엔리케도 자신이 항해를 직접 항해를 하지는 않았지만 포르투갈이 대항해시대를 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역사자료 등에는 ‘항해왕자(Infante de Sagres 또는 O Navegador)’라고 호칭되고 있다. 영어권에서는 헨리 항해 왕자(Prince Henry the Navigator)라고 부른다.


[아비스 왕조]

  아비스 왕조는 푸르투갈의 두 번째 왕조(1385-1580)이다. 포르투갈의 첫 번째 왕조인 부르고뉴 왕조의 페르난도 1세 국왕의 사후, 그 왕비와 귀족의 전제정치에 반발하는 세력의 옹호와 와인 및 올리브 오일의 수출을 통해 새롭게 성장한 상공계층의 지지를 배경으로 당시 포르투갈의 신분제 의회인 코르테스에 의해 아비스 기사단장 출신인 죠앙 1세가 국왕으로 선출되어 아비스 왕조가 성립하였다.


여는 왕조가 그렇듯 아비스 왕조도 혼란을 겪었으나, 15세기 초에는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중앙에 큰 세력을 형성하고 포르투갈을 괴롭히고 있던 카스틸야 왕국과 화해조약을 체결(1411년)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다.


이러한 정치적 안정을 배경으로 포르투갈의 아비스 왕조는 나라의 안정과 발전을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그 방향은 유럽의 황금 공급처였던 아프리카 대륙에 진출하는 것이었다. 아비스 왕조는 이를 통해 국내의 경제 위기와 신흥 귀족 세력의 발호에 대처하고자 하였다.


[세우타 정복]

1414년 21세의 엔리케는 부왕 죠앙 1세와 함께 이슬람세력이 농성하고 있던 지브롤터 해협에 있는 도시 세우타(Seuta)를 공략하는 전쟁에 참여한다.


다음해인 1415년 8월에 큰형인 두아르테(죠앙1세의 장남)를 비롯하여 작은 형 페드로 그리고 엔리케 등 죠앙1세의 왕자들이 중심이 되어 모로코의 항구 도시 세우타를 점령함으로써 포르투갈 해외진출의 거점이 마련된다.


세우타의 점령을 계기로 포르투갈은 이슬람 상인들의 중개 없이 금과 향신료를 구입하기 위한 활로를 확보하기 위해 아프리카 서안항로, 나아가서는 인도 항로의 개척에 대한 야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죠앙 1세는 세우타 정복전에 두 번이나 참가하고 큰 공을 세운 엔리케를 기사에 서임하고, 아비스왕조 개창 이래 처음으로 비제우공(Duke of Viseu)에 임명하였다.


[해외진출]

 1418년 12월 엔리케는 자르코(Zarco, 1390-1470)와 테이세이라(Teixeira, 1395-1480) 등을 파견하여, 1419년에 마데이라(Madeira)를 발견하고, 다음해부터 식민지화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엔리케의 해외진출 및 탐험사업에 있어서 첫 성과라고 할 수 있다. 


▲ 대서양의 한가운데 위치하는 아조레스 제도는 9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리스본에서 1500km 떨어져 있다.[이명희]


  1427년에는 포르투갈에서 약 1000킬로미터 떨어진 대서양의 중앙부에 있는 아조레스(Agores)제도를 발견하였다.


이후 그리스도 기사단 소속의 캐버럴(Cabral) 등이 이 섬에 대한 탐험을 행하여, 1439년 이후에는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는데, 처음에는 포르투갈인 이주자가 중심이 되었지만 점차 각국으로부터 이주자가 증가하였다. 후일 아조레스는 신대륙 항해의 중요한 기지가 되었다.


▲ 이 지도의 좌측 하단의 7개의 섬이 카나리아 제도이며, 당시 유럽인들은 이 섬으로부터 200km 밖이 세상의 끝이라고 믿고 있었다.[이명희]


  엔리케의 시대까지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해안의 최남단이 카나리아 제도로부터 200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하는 보하돌 곶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보하돌 곶 저 너머는 이 세상의 끝이며, 그곳부터는 부글부글 끓는 바다가 펼쳐진다고 믿고 있었다. 당시의 유럽 항해자들 사이에서 이 미신에 대한 공포는 절대적인 것이었고, 보하돌 곶을 넘어 항해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엔리케는 1422년부터 이 미신에 대한 도전을 계속하였고, 때때로 탐험대를 파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런데 1433년에 새롭게 포르투갈의 왕으로 즉위한 엔리케의 형, 즉 두아르테 1세는 보하돌 곶 너머의 신규 도달지에서 발생하는 상업상의 이익 중에서 1/5을 엔리케에 주겠노라고 약속하였다.


엔리케는 1434년에 탐험가인 질 에아네스(Gil Eanes)를 파견하여 당시의 지식과 장비로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보자돌 곶에 도달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오랫동안 항해자들 사이에 믿어져 오던 미신이 타파되었고, 이후 엔리케의 탐험사업을 더 한층 탄력을 받게 되었다. 특히, 포르투갈에서는 엔리케에 의해 캐러벨(Caravel)선이 대거 도입되고 항해기술도 향상되어 탐험사업과 해외진출이 급속하게 진전되었다. 


  1437년에 엔리케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탄지르(Tangier)(주2)에 파병했으나 이슬람 세력에게 완패하여 실패로 끝났다. 이때 동생인 페르난드 왕자가 사로잡혀 40세에 죽을 때까지 6년간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엔리케의 군사상의 평가는 크게 추락하였다.


1438년에 두아르테 1세의 치세가 5년으로 막을 내리자, 그로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에 대한 보증을 약속 받고, 작은 형인 코임브라공(Duke of Coimbra) 페드로가 6세의 알퐁소 5세의 섭정(1439-1448)을 맡는 것을 지지하였다.


바로 이 시기에 아조레스 제도에 대한 식민지화가 본격화 하였고, 포르투갈이 새롭게 개발한 캐러벨선을 이용하여 탐험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1441년에 현재 모리타니아 연안의 블랑코 곶에 도달하였다. 1443년에는 아르긴만에 도달하였으며, 1448년에 이곳에 포르투갈의 요새를 쌓았다. 1444년에는 세네갈 강과 베르데(Verde)에 도달하였다. 이어서 기니아를 방문하고 드디어 사하라 사막 남단에 도달하였다. 


  이로써 엔리케는 사하라 사막을 통과하는 대상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아프리카 남부의 부를 손에 넣을 수 있는 항로를 확보하겠다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남부의 금을 획득할 수 있게 되자 1452년에 처음으로 금화를 주조할 수 있게 되었고, 이즈음 국정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엔리케 등은 코임브라 대학(University of Coimbra)에 천문학 강좌를 개설하고 지도 연구와 제작을 하도록 하는 등 대항해시대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고자 하였다.


  1444년부터 1446년에 걸쳐 대략 14척의 탐험선이 라고스 항을 출항하였다. 그 결과 1450년대에 아프리카 서쪽 대서양 중앙에 있는 카보베르데(Cabo Verde) 제도를 발견하고, 1460년에는 탐험대가 오늘날의 시에라레오네 연안에 도달하였다.


▲ 지도 왼쪽 검은 색 부분이 시에라레오네 [이명희]


  시에라레오네에 도달할 때까지 엔리케가 파견한 선단이 아프리카 연안을 답파한 거리는 2400킬로미터에 달하였고, 엔리케의 이러한 공적은 후일 죠앙 2세 시대(1481-1495년) 해외 진출의 발판이 되었다.


즉, 엔리케의 사후 28년 후인 1488년에는 포르투갈의 디아즈에 의해 아프리카 최남단인 희망봉에 도달하게 된다. 이렇게 대항해 시대의 막을 연 엔리케의 이름은 그의 사후 ‘항해 왕자’라는 경칭으로 오늘날 불리게 되었다. 


  엔리케가 이렇게 탐험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1420년 5월 25일에 그리스도 기사단의 지도자로 지명되어 막대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던 기사단의 원조를 끌어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엔리케는 기사단의 중책을 수행하면서 그 자금을 배경으로 1440년까지 탐험사업을 지속할 수 있었고, 스스로 그리스도교를 열렬하게 신봉하여 후세에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질 정도로 포르투갈 인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 발견의 기념탑(1960) [이명희]


[후세에 세워진 기념비]

  엔리케 몰후 500년을 기념하여 1960년에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 시내의 테조강변에 포르투갈의 대항해시대를 기념하기 위한 모뉴먼트 ‘발견의 기념탑’이 세워졌다.


그 기념물은 엔리크가 탐험사용 시에 이용하였던 캐러벨(Caravel)선의 모습을 본떠 만든 높이 52m의 콘크리트구조물로서 선수(船首)에는 엔리케가 강을 응시하고 있고, 그 뒤로 동시대를 살았던 탐험가, 과학자, 지도제작자, 선교사 등 30명이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여 서있다. 그것으로부터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는 대항해시대의 건축물로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제레니모 수도원의 베렌탑이 있다. 


  1994년에는 포르투갈 정부로부터의 선물로서 탐험가들의 사적을 기념한 ‘헨리 항해 왕자 공원(Prince Henry the Navigater Park)’이 미합중국 메사츠세츠주 뉴 베드포드(New Bedford)의 포프섬에 건설되었다. 


  포르투갈의 전 역사에서 15세기의 대항해 시대야말로 포르투갈인들이 가장 활기 있고, 또 인류와 세계에 가장 큰 기여를 했던 시기일 것이다. 바로 그 시대의 그 첫 문을 연 사람이 바로 엔리케 항해왕자였고, 그는 오늘날의 포르투갈 인들에게 가장 자랑스런 포르투갈인인 동시에 우리들 인류에게도 자랑스런 선구자로 기억될 것이다.


주1) 죠앙 1세와 정략결혼을 하였지만 필피파는 아비스 왕조의 기틀을 잡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녀는 잉글랜드의 기사도 정신을 익히고 있었고, 죠앙1세와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여 아비스 궁정의 중심을 잡았다. 또 왕과의 사이에 5형제를 낳아 모두 훌륭하게 교육하였는데, 1415년 당시 유행하던 흑사병으로 죽어갈 때 병상에서 아프리카 공략에 나서는 아들들을 불러 “용감하게 싸우고 오라”고 하며 검을 건넸다고 한다. 그녀는 영국에 랭커스터 왕조를 개창한 잉글랜드 왕 헨리4세의 누나이기도 하다.


주2) 탄제라고도 하며 모로코 북부의 도시이다. 일찍이 페니키아 인에 의해 교역거점이 설치되었고, 로마제국과 반달 왕국 그리고 동로마제국의 지배를 거쳐 당시에는 이슬람세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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