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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10-06 12:51:59
  • 수정 2018-10-07 08:5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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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자경전 [문화재청]


“궁궐은 임금이 나라의 일을 보는 곳이자 사방이 우러러 보는 곳이며,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나아가는 곳이므로 제도를 장엄하게 해서 위엄을 보이고, 이름을 아름답게 지어, 보고 듣는 자에게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 정도전이 조선 태조에게 궁궐의 여러 전각 이름을 지어 올리면서 아뢴 말이다.


현재 서울에는 조선 시대의 궁궐 5개가 남아 있다. 경복궁은 서울의 북쪽에 위치하여 북궐(北闕), 창덕궁과 창경궁은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하여 동궐(東闕), 경희궁은 서쪽에 위치하여 서궐(西闕), 그리고 남서쪽에 위치한 덕수궁(1907년까지 경운궁으로 불림)은 서궁(西宮) 혹은 명례궁으로도 불려지곤 했다.


그중 경복궁(景福宮)은 5백년 역사 조선의 정궁(正宮) 혹은 법궁(法宮)으로 불린 곳이다. 국왕이 국정을 운영하는 정치의 중심이자 의례적, 상징적으로도 조선의 중심임을 말한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경복궁을 지은 것은 태조 4년(1395)이다. 이성계는 국왕 즉위 직후 도읍을 옮기기로 하고, 즉위 3년째인 1394년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공사를 시작하였고, 이듬해인 1395년 완공하였다. 불과 2년 사이에 경복궁을 완공한 셈이고 보면 매우 놀라운 속도이다.


경복궁의 명칭은 정도전이 올렸다. 『시경』 주아(周雅)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두 자를 따서 이름 붙였다.


그러나 태조 당시 모든 건물이 완공된 것은 아니고, 이후 역대 왕들이 여러 전각을 추가로 지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태종대와 세종대의 사례이다.



▲ 경복궁 경회루 [이민원]



태종은 재위 12년(1412) 당시 궁내에 경회루(慶會樓)를 완공하였다. 경회루의 이름은 태종의 명을 받아 하륜이 지었다. ‘경사스런 연회’ 정도로 그 의미가 이해된다. 태종이 경회루를 짓게 한 주요 목적은 무엇일까. 태종이 경회루 영건을 추진할 때 재정 등의 이유로 신하들 중에 이를 반대한 이들도 있었던 것 같다.


태종은 ‘"내가 이 누각을 지은 것은 중국(中國) 사신에게 잔치하거나 위로하는 장소를 삼고자 한 것이요, 내가 놀거나 편안히 하자는 곳이 아니다.“라고 하여 신하들의 반대를 무마한 모습이 보인다. 태종의 속마음이야 어찌 사신 접대만을 위해서였겠는가마는, 조선 시대 왕 중에서도 선이 굵고 대가 센 인물인 태종도 대명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경회루 공사에 대해 신하들의 공감을 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정도전 등은 당초 재상 중심의 정치를 고려하여 경복궁을 설계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국왕 중심의 국정 운영을 추구하였다. 경회루의 조성에는 왕과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국왕과 대신들의 화합 속에 국정을 이끌어 가기 위한 연회와 휴식, 담론의 공간 조성이라는 목표도 엿보인다. 생전의 태종은 경회루에 상왕(태조)을 모셔와 세자, 종친, 부마 등과 자주 연회를 열었고, 역대 국왕도 이곳에서 대신들과 빈번히 연회를 열었으며, 명의 사신은 물론, 일본, 여진, 유구의 사신을 응접하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한편, 세종은 경복궁에 집현전을 두어 학문적 소양이 높은 문관들을 가까이 두었다. 또한 경회루 남쪽에 ‘물시계’, 즉 자격루(自擊漏)를 설치한 보루각(報漏閣)을 세웠다. 궁의 서북 모퉁이에 천문관측 용의 간의대(簡儀臺)를 설치하고, 강녕전 서쪽에 흠경각(欽敬閣)을 짓고 일종의 천문시계 장치인 옥루(玉漏)를 설치하였다.


▲ 국보 229호 보루각 자격루 [문화재청]


이중 자격루, 옥루 등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즉 연월일시(年月日時)는 매년 명 나라 황제로부터 받는 책력(冊曆)을 쓰지만, 시간은 조선 국왕이 조선의 표준에 맞게 정확히 측정하여 쓴다는 것이다. 이때 발명한 자격루는 시간을 알리는 ‘시보’(時報) 장치로서 동서양 역사에서 가장 앞선 ‘원조시계’로 평가되고 있다.


이처럼 조선 왕조의 권위와 품격을 담고 있던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한양을 점령하면서 창덕궁, 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타버렸다. 이후 경복궁은 19세기 중반까지 복원되지 못하였다.


선조는 경복궁 중건을 희망했으나 재정 곤란을 이유로 실현되지 못하였고, 대신 창덕궁을 다시 지어 집무처로 삼았다. 이후 광해군, 효종, 영조, 정조, 순조 등 역대 국왕도 대부분 경복궁 중건을 거론했으나 역시 재정이 곤란하다는 신하들의 주장과 풍수가 불길하다는 이유 등으로 무산되곤 했다. 왕권이 강했다면 생각하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그만큼 조선 후기에는 왕권이 취약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종이 즉위하자 과거에 비해 규모를 크게 달리한 경복궁이 기다렸다는 듯이 지어졌다. 조대비의 지명으로 흥선대원군이 총력을 기울여 추진한 19세기 조선 최대의 건축 공사였다. 규모는 7,481칸, 궁성 둘레는 1,813보, 높이 20척이었다.


경복궁 중건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그 무렵 조선은 밖으로는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등이 이어지고, 안에서는 천주교도 박해, 서원철폐 등으로 내정과 외정이 크게 동요하던 시기이다. 성년이 된 고종이 직접 정사를 추스르기 시작한 연후에도 운양호사건, 조일수호조규, 서양 각국과의 조약 체결 등이 이어지면서 조선은 격동에 휩싸여 갔다.


이후 조선 조정은 만성적인 재정 곤란을 겪었다. 당대에도 많은 물자와 인력을 들여 꼭 토목사업을 추진해야 하느냐는 반론이 있었고, 현재에도 그런 에너지를 세계정세 파악과 서양 배우기에 투여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비판이 있다.


반면 고종 초년에 경복궁 중건을 하지 못했다면, 이후로는 그럴 기회가 거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대의 결단이 없었다면 오늘의 세종로 거리와 광화문 주변, 그리고 경복궁이 자리하고 있는 세종로 1번지 모습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고, 경복궁도 한국의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을 것이다.


과연 어느 것이 타당한 선택이었을까. 왕조의 질서를 생각하면 중건이 옳았고, 서세동점의 새 조류를 감안한다면 아무래도 무리한 투자가 아니었을까. 지하의 조대비와 흥선대원군에게 어떻게 평가하시는가 묻고 싶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남문현, 「세종조의 누각(漏刻)에 관한 연구」, 『동방학지』 57, 1988 이강근, 『경복궁』, 대원사, 1998. 성대경, 「대원군의 내정개혁」,『한국사 37』, 국사편찬위원회, 2000. 이광호 외, 『궁궐의 현판과 주련』Ⅰ, 수류산방,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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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원 역사 에디터 이민원 역사 에디터의 다른 기사 보기
  • <경력>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문학박사(역사학)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
    -원광대 사범대 초빙교수
    -국제한국사학회(회장)
    -현재: 동아역사연구소(소장)
    현대의전연구소 자문위원

    <주요저술>
    『이상설-신교육과 독립운동의 선구자』』(역사공간, 2017)
    『대한민국의 태동』』(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5)
    『조완구-대종교와 대한민국임시정부』』(역사공간, 2012)
    『조선후기 외교의 주인공들』(백산자료원, 2007)(공저)
    『Q&A한국사: 근현대』(청아출판사, 2008)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국학자료원, 2002)
    『한국의 황제』(대원사, 2001)

    <번역서>

    『국역 윤치호영문일기』 2(국사편찬위원회, 2014)
    『국역 윤치호영문일기』 3(국사편찬위원회, 2015)
    『나의 친구 윤봉길』(도서출판 선인, 2017)(原著: 金光, 『尹奉吉傳』, 上海: 韓光社,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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