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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8-15 10:49:35
  • 수정 2018-08-15 11:3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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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의 서울 풍경 [WT DB]


[한강의 기적, 한강의 저주]


2016년 여름까지는 어느 누구도 대한민국이 이토록 비틀거리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라가 위태롭다’고 느꼈던 일은 한 두 번이 아니지만 그것은 대부분 나라가 정치적으로 혼탁해지고 부패와 비리가 자라고 국민정신이 너무 세속적·물질적이 되어간다는 걱정이었지, 정말 나라의 근본이 무너져 내린다는 위기감은 아니었다. 그동안 참으로 많은 지식인·우국지사들이 대한민국의 기강해이와 부정부패를 질타했는데 나라를 일깨워서 부조리 척결을 촉구하기 위해서이지 나라를 때려서 실신시키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지구상의 어느 나라나 신생국에서 선진국이 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진통과 모순을 겪지 않은 나라는 없었지만 우리나라는 그 과정이 압축적이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보다 그 진통을 더 심하게 겪은 것으로 느꼈다. (그것은 우리의 느낌이었고, 사실은 선진국의 선례를 보고 예방조치를 취한 바가 많아서 총량은 훨씬 적었음이 틀림없다.)


어쨌든 우리나라가 얼마나 살벌하고 부실하고 빈곤한 환경에서 탄생했는가를 감안한다면 이만큼 튼튼하게 이만큼 풍요롭게 성장한 것은 기적이라 이름 붙이기에 손색이 없다. 이것은 국민의 단합된 노력의 결과이지만 비상한 행운과 신의 가호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고도 느껴진다.


우리나라의 구한말이나 해방 전후, 한국동란 직후의 모습과 1990년대 이후 모습을 보는 외국인들은 ‘한강의 기적’을 경탄해 마지않고, 우리 자신도 우리가 이룬 기적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워낙 부실한 토양에서 급속도로 성장했기에 허술한 점, 억지로 얽어맨 구석들이 많을 수밖에 없고 그 틈을 비집고 부패, 허세, 권력남용 등의 독버섯이 끈질긴 뿌리를 내린 것도 사실이다.


[교육수준의 향상]


전통적으로 ‘못 배운’ 설음이 너무나 컸기에, 서민에게도 배움의 문이 열리자 한 맺힌 백성들이 너도나도 자녀를 필사적으로 교육시켰고, 따라서 우리나라는 소득 수준에 비해서는 물론 절대적으로 세계 평균보다 지식수준이 월등히 높아졌다. 따라서 다른 나라, 사회보다 사회 부조리에 대한 국민의 의식이 예리하고 비판의 목소리 또한 높았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한 편에서는 무럭무럭 성장하고 한 편에서는 그 성장의 불균형을 질타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 매우 건강하고 바람직한, 사회발전의 좋은 조건이 되는 현상이었지만 분단의 현실 등의 이유로 왜곡되어 자기 어머니를 죽이고 자기 살을 파먹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대한민국의 화농부위를 도려내고 새 살이 돋게 하자는 외침이 말한 사람의 의도와는 달리 대한민국의 가치와 정당성을 부정하는 이념형성에 기여해 온 것 같다. 사실 나 자신도 대한민국을 여러 모로 질타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필자가 박사학위를 받아서 귀국한 것이 78년 8월, 만 30세 때였는데, 귀국하면서부터 코리아 타임즈 지에 위클리 칼럼을 연재했다. 영자신문은 독자가 아마도 외국인이 더 많고, 한국사회의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매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회부조리에 대한 비판보다는 인간 심리, 행태에 대한 고찰을 담았다. 개인적인 감상 위주였지만 의외로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그러다가 1984년에, 나의 한국문학 영역서 출간에 즈음해서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한 것을 계기로 동아일보에 5.5매 짜리 작은 칼럼을 쓰기 시작해서 3-4주에 한번 꼴로 10년 가까이 연재했다. 1990년 초반부터는 국문지에 가장 비중있는 칼럼인 10-11매 ‘논단’에 기고를 20여년간 했다.


국문신문에 기고는 거의 예외 없이 사회부조리에 대한 비평이었다. 사실, 1950년대에 성장한 사람으로서 한국사회의 발전에 자주 경탄했지만 일간지에 논설을 기고하는 사람의 역할이란 정부가 잘 못 하는 것, 사회부조리와 부정을 고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그리고 상당한 개인적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용감한 칼럼을 계속 썼다.


1987년 초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선언에 반대하는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에 동참하는 서명도 했다. 두고두고 다행스럽고 기쁘게 생각했던 87년의 시민혁명이 오늘날 주사파정권 출범의 단초였을 줄이야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는가.


[반정부 데모와 경쟁했던 강의]


1980년대에 대학교수는 여러모로 ‘못 해먹을’ 노릇이었다. 고려대에서 문과대 강의는, 오후 2시에 강의를 들어가면 출석을 부르고 강의가 본론에 들어갈 무렵에 어김없이 바로 아래에 있는 ‘민주광장’으로 불리던 운동장의 확성기에서 ‘타도하라’ ‘물러가라’ ‘박살내자’ 등의 온갖 살벌한 구호가 흘러나와서 수은주가 아무리 높은 날씨에도 창문을 꼭꼭 닫고 목청을 있는 대로 높여서 강의를 했다. 교수가 강의하기 힘든 것은 물론이거니와 학생들로서도 강의를 듣기가 얼마나 고역이었겠는가.


물론 불편과 고민은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그때는 (문교부의 지시에 따라) 학교에서 ‘지도교수’제를 실시해서 교수들은—영문과의 경우에는 학생이 많아서 수십명씩의—학생을 ‘지도’해야 했는데, 한 학기에 한번은 의무적으로 면담을 해야하고 ‘운동권’이나 ‘반체제’ 성향이 있는 학생은 특별관리 대상이었다. 교수들은 원론적으로는 자기의 ‘지도학생’이 반체제 데모를 하거나 하면 연대책임을 져야했지만 학생이 구치되거나 수감이 되더라도 실지로 교수가 징계를 당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교정을 우주인 같은 복장을 한 진압경찰들이 점령하고, 최루탄이 교정에 자욱하고, 자기 지도학생, 자기반 학생 뿐 아니라 자기가 봉직하는 학교의 수많은 학생들이 공부를 팽개치고 학생운동에 투신하고 그 결과 수감되는 등의 고초를 겪고 취업 등에서 불이익을 받는 것을 지켜보는 교수들의 죄의식은 말할 수가 없었다.


[‘운동권’ 심리]


나는, 시위를 하다가 검거되면 하룻밤 또는 며칠 ‘구류’를 살고 조사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구타나 잔혹행위를 당하기도 하고 심하면 고문까지 당하는 ‘운동권’에 가담하는 학생들의 심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젊은 시절에 내 한 목숨 바치더라도 우리 불쌍한 동포를 빈곤과 후진성에서 구할 수 있다면 기꺼이 잔 다르크가 될 텐데, 하고 열렬히 갈망한 것이 어쩌다 떠오르는 몽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까지 부모에게 끊임없이 ‘공부하라’는 ‘쪼임’을 받으며 1~2년, 많게는 2~3년을 잠 한 번 제대로 못 자고 죽어라고 공부만 해서 소위 1류 대학에 입학한다 해도 1학년 교양과목에서 배우는 내용이란, 이것을 알면 세계를 구원할 수 있을 것 같은 것이 아니었다. 물론 대학교육의 기본목표는 사회의 작은 톱니바퀴가 될 기능인을 길러내는 것이지 메시아를 길러내는 것이 아니다.


물론 거기서 성장해서 자신의 분야에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근본자질도 심어주어야 하지만 그것은 자질에 더해서 자신의 부단한 노력과 주변 환경이 함께 작용해야 이루어진다. 어쨌든, 거의 눈가리개를 하고 좁게 전방만 주시하면서 공부에만 올인했던 학생들은, 대학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고 보니 대학이 그토록 죽자 사자 목숨 걸고 달려 올만한 목표였나, 하는 실망감과 함께 새롭게 그들의 의식을 두드리는 ‘사회부조리’가 쇳덩어리처럼 그들을 내리눌렀을 것이다.


그리고 하루 종일 같은 교실에서 같은 공부를 했던 친구들과 헤어져서 매 강의시간마다 교실을 옮겨서 익숙치 않은 얼굴들과 강의를 들으면서 실존철학자 하이데거의 말대로 ‘내던져진’ 존재처럼 느끼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운동권에서 손짓이 오고, 운동권 모임에 한 번 가보면 단번에 사활을 같이하는‘동지’가 생기고, 너무나 보잘 것 없고 미미한 존재로 느껴지던 자신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한 몸을 바치고 역사의 물길을 바꾸는 대열에 동참할 수 있다는 뿌듯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접근하는 것이 큰 문제풀이처럼 어렵기만 하던 이성과의 접촉 역시 ‘대의’라는 매개가 있어 동지로서 접촉할 수 있으니 그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그런 상황에서 신변의 안전과 출세를 위해서 운동권에는 근처에도 가지 말고 공부만 하라는 부모님의 말씀은 한심한 보신주의로 들리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운동권에서 ‘학습’하는 맑스주의 교재들은 금서를 읽는 자부심과 함께, 세계를 혁신할 수 있는 무기를 손에 쥔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 당시 운동권 학생들과 대화를 해 보면, 학생들은 자신들이 정의의 사도임을 내세우면 현 시국의 부당함에 대한 의식이 부족할 것이 분명한 여교수쯤이야 얼마든지 굴복시킬 수 있다는 자세로 나왔다.


내 편에서는 학생들은 공부를 하고 실력을 길러야 독재정권과의 장기적인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고 나라를 발전시켜서 그들이 구하고 싶은 기층민들을 더 확실히 이롭게 할 수 있지 않느냐는 논리를 폈다. 학생들은 부분적으로 나의 논리를 인정했지만 독재 타도가 더 시급하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 당시에 학부모들은 물론 교수들도 학생들이 데모로 밤낮을 지새우는 것을 ‘공부하기 싫어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운동권학생들을 만나보면 공부하기 싫어서 데모한다는 생각이 드는 학생들도 분명 있었지만 나는 학생들을 그런 눈으로 보는 사람을 몹시 싫어했다.


나는 학생들이 공부하기 싫어서 보다는 지적, 감정적으로 미숙하고 아직 능력을 쌓지 못한 젊은 나이에 자신에 대한 불만, 자기 가정과 가족, 부모에 대한 불만 기타 무수한 젊은 시절의 고뇌와 불만을 학생운동에 투신함으로써 잊고 보상받으려하는 심리가 강하다고 생각했다.


한 학생이 나에게 상담을 하러 와서, 당시 반에 있던 (조금 정신박약이 의심되는) 여학생을 ‘구제’해 줄까 생각한다는 말을 하다가 ‘아니면 학생운동을 찐—하게 할까’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참으로 난감했다. 연애를 구세주의 역할을 맡기 위해서, 학생운동을 모든 불만을 초월하는 도피처로 생각하다니. 물론 이 학생을 전형적 운동권학생의 예로 간주한 것은 아니지만 정신적 미숙함이 성숙함보다 운동권에 더 많은 수혈을 한 것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5·18의 비극성과 저주]


사실 대학교수들이 운동권학생들과 대화—라기보다는 토론—을 하면 ‘밀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5·18 이었다. 몇몇 지독한 ‘어용’교수 빼놓고 어느 교수가 5·18 진압을 지지하고 동조하는 교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운동권 학생들은 자기들의 시위 기타 반정부투쟁에 반대하면 무조건 5·18 진압을 변호하는 세력인양 몰았다.


교수로서 학생운동을 말리지만 5·18 진압을 옹호하는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은 매우 난감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북한 특수부대의 5·18 개입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아마 알려졌다 해도 그런 주장은 운동권에서 격렬히 배격해서 토론을 하다가 살인도 날 수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5·18 직전의 ‘서울의 봄’에 여러 날 도시의 기능이 마비되고 시위대에 길이 막혀서 병원에 가지 못해서 사망한 응급환자 이야기도 듣고 해서 치안부재 상태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하고 있었지만 ‘광주진압만행’의 이야기들을 듣고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느꼈다. 그리고, ‘기득권층’에 속하게 된 한 사람으로서 죄의식도 심했다.


나에게 5·18은 대한민국의 ‘원죄’였고, 영원히 극복하지 못할 상처였다. 그래서 그 비극과 원죄의 주범으로 전두환 대통령을 증오했다. 그의 죄과는 무엇보다도 수많은 젊은이들을 학생운동으로 몰아넣어서 그들을 배워야 할 젊은 날을 데모로 지새우다가 머리에 설익은 좌파이념만을 넣고 사회에 나가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싫어서 운동을 하지 않은 학생들에게 영원한 죄의식과 부채감을 안고 살게 한 것. 그래서 전두환 대통령 치하의 경제호황 등 업적을 인정하는데도 인색했고, 훗날에 전두환 대통령의 장점을 찬탄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해도 그에 대한 증오와 원망이 사그러지지는 않았다.


이제, 5·18에서의 북한의 역할을 알게 되니 전두환 대통령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물론, 개인적으로 일면식도 없으니 내가 미워한다고 마음아파하거나 미안해한다고 위로를 받을 일도 없지만.


5·18이라는 장애물이 있었지만 학생들에게 데모하라고 권장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훈장의 입장은 양보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나에게 이념문제로 도전(?)을 하는 일도 드물어서 학생들과 이념대결은 별로 해보지 않았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학생들에게 나라에 진정 필요한 인재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라는 진부한(?) 진리를 역설했고, 미리부터 죄스러워하며 위축되지는 않았다.


가끔 ‘학생회임원’이라면서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학생회의 메시지를 전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있었는데 나는 10분 이내로,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하면 허락하겠다고 해서 학생들과 함께 학생회의 말을 듣고, 특별히 문제삼을만한 내용이 아니면 그냥 강의를 하고, 비합리적인 말이면 그들이 떠난 후에 차분히 그 비합리성을 지적했다.


5·18의 진실이 온 천하에 밝혀져야 우리나라가 다시 온전해 질 수 있을 것이다.


[3년 운동의 30년 후유증]


학생운동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심각한 불이익을 대가로 자부심과 소속감을 얻었는데 ‘운동권’가입을 거부한 학생들의 시련 역시 혹독한 것이었다. 학생운동은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반체제 운동으로 기여할까 학문적 도야로 기여할까 사이의 선택의 문제였어야 하지만 80년대에, 그리고 90년대 초 까지도, 그렇지 못했다.


학생운동을 하는 학생들이 신체적인 박해를 당하고 사회진출에도 심한 불이익을 당했기 때문에 소위 ‘기능주의’라고 불리였던 비운동권 학생들은 아무리 학생운동이 나라에 기여하는 자기 식의 방법이 아니라는 소신에 따라 학생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개인적 ‘보신주의’라는 자책을 면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교실이 그렇게 양분된다는 것, 그래서 우월감과 함께 피해의식을 지닌 부류와 그런 설익은 우월감에 대한 반감과 죄의식을 지닌 부류로 나누어진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서글펐다.


지난 2013년에, 고대 83학번 30주년 홈커밍데이에 초대를 받아 가보니 기념식은 운동권가요로 시작해서 학창시절 민주화운동 회고의 분위기로 끓어 넘쳤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컬하게도 83학번 학생들은 졸업하자마자 전두환이 꽃피게 한 경제호황으로 모두 좋은 직장을 얻어 무럭무럭 승진해서 다들 회사의 중견간부, 임원 같은 위치에서 학교에 발전기금도 엄청나게 기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참석자들은 그들이 그토록 타도하려 한 독재정권의 덕분에 풍요로운 삶,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모순은 생각은 하지 않는 듯 했다. (물론 겉모습을 보고 내면까지 알 수는 없는 일이기는 하다.)


어쨌든 1980년대에는 교수는 개강 첫 날부터 휴교를 하게 되더라도 중간고사는 치르고 해야 할 텐데, 하는 조바심을 했다, 중간고사를 보지 않으면 그 학기 성적을 낼 근거가 없고, 성적을 낼 수 없으면 그 학기는 모든 학생에게 유급학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졸업이 늦어지고 등록금도 그만큼 더 내야하고 취업도 늦어지는 것이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속히 졸업해서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되어야하는 상황에서 너무나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반 군사독재 데모가 없어지면서 그런 조바심을 할 필요가 없어지자 세상이 달라진 느낌이었다.


[체제 비판의 효용과 역효과]


운동권학생들이 학업을 무가치하게 생각하는 것과 다른 학생들의 학업 집중을 방해하는 것을 질책하기는 했지만 나 역시 그들만큼이나 체제에게 대해 비판적이고 내 나름으로 독한 비판을 했다. 뜻하지 않게 신문지면에 기고를 할 수 있어서 칼럼을 통해서 독한 비판을 많이 쏟아내어서, 그 시절의 한 문과대학장님은 ‘이제 우리나라에 사내놈은 둘 빼고 다 죽었어. 서지문이 하고 이인호’라고 하시며 남자들의 칼럼은 오히려 ‘몸조심’ 하느라 우회적으로 말하는데 이인호 선생님과 나의 칼럼이 강력하고 매섭다는 칭찬을 하시기도 했다.


운동권 학생들에게 어쩐지 이질감이 느껴지는 부분, 그들의 동기의 순수성을 의심하게 되는 부분은 많았지만 그래도 나는 다른 동료들보다 (영악하고 냉정하지 못해서인지) 운동권학생들에 대한 부채감을 훨씬 오래 지녔지 않았나 생각된다. 일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정의’를 위해 투쟁한 운동권 ‘투사’들 중 대부분은 당시 경제호황과 높은 취업률의 덕으로 졸업과 함께 취직을 해서 내실 있는 삶을 영위하며 국가에도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동자’로 사법당국과 심한 마찰을 겪은 학생들은 1980년대에는 사회진출에 있어서 상당한 불이익을 받았다. 작가 공지영씨의 “인간에 대한 예의”인가 하는 소설집에 보면 과거 운동권 ‘동지’들이 빛바랜 투사들로 만나는 단편들이 있는데 인물들이 대부분 생활도 궁핍하고 낙오자의 열패감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운동권’ 경력을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해서 국회에서 큰 목소리를 내는 인사들도 많지만 운동권출신 낙오자들에게 우리 사회는 여러 의미에서 부채가 있다.


그런데 이제, 80년대의 이념을 그대로 지닌 주사파가 정권을 잡으니 참으로 우리나라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졌고, 그들의 진모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들의 위험을 소리높이 외치지 않은 것이 너무나 자책이 된다.


[폐허 위에 세워야 할 나라]


물론, 주사파니 NLL이니 하는 반 대한민국 세력에 양분을 공급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기득권세력이다. 무수히도 많았던 갑질, 각종 비리, 의혹, 부패, 이런 것들이 쉴 새 없이 먹거리가 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좌파들이 이 사회에서 그토록 큰 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겠는가?


요즘도 드러나는 프랜차이즈 본사의 갑질(착취), 대한한공 오너들의 언어도단의 행태 기타를 볼 때마다 보수가 저래서 망했지, 하면서 절망하게 된다.


그러나 50년대, 미국의 우유가루 배급을 위해서 어린이들이 10월, 11월부터 교회에 다니고, 국산 연필심은 깎자마자 부러지고 국산 컴퍼스는 한 바퀴를 제대로 돌리기 전에 다리가 미끄러지고, 지우개는 글자가 지워지기 전에 종이가 찢어져서 그런 불량품을 만드는 나라 국민임을 서러워하던 세대에게, 오늘날의 한국은 그야말로 환상의 나라이다.


부정부패가 횡행하는 중에도 지어 진 휘황찬란한 고층건물들, 숲이 울창한 산, 어디로나 뻗은 고속도로, 안락하고 고급스러운 철도 망, 버스 정류장에 이르면 곧 도착할 버스가 몇 번 몇 번인지 알려주고 앞에 놓인 도로가 정체되고 있는지 소통이 원활한지를 미리 알려준다.


1950년대에는 여권을 받으려면 평상 2달에서 6개월까지 걸릴 수 있는 ‘신원조회’를 먼저 통과해야 신청절차를 밟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당일로 발급을 받아 수백만 수천만 한국인들이 매해 세계를 누빈다. 인천공항은 세계에서 제일 이용이 편리한 공항이라고 한다.


내가 젊었을 때는 한 번 산 물건은 나중에 하자가 발견되어도 반품은 어림없고 많이 밑지고 교환만 받아도 천만다행이었다. 예전에는 관공서에 서류를 하나 떼러가도 공연히 죄인처럼 주눅이 들었지만 이제는 전화민원에 대해서도 어떻게 처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문자로 알려준다.


이 모든 것과 그 이상을 이룩한 공로자들의 공로를 인정하고 칭송한 평론가가, 매체가 그리도 드물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죄스럽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사기꾼, 협잡꾼, 도둑이 많지만 대부분의 시민이 정직히 일했기 때문에 이만큼 부강한 신용사회가 된 것이 아닌가.


2004년에 중국에서 몇 달을 체류했는데 중국인에게 한국제품이 그토록 선망의 대상이라는 것이 눈물겹도록 기뻤다. 이렇게 훌륭한 나라를 이룩한 그 수많은 일꾼들과 그들의 공로를 잊었기 때문에 오늘날 좌파를 득세하게 했다는 생각에 억장이 무너진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잃어버린 10년’을 넘어서 나라를 흠집내고 철거하기 위해 쐐기를 박은 10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9년 동안 어느 정도 원상복구를 하고 보강도 좀 했는데 문재인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나라가 태풍을 맞는 나무처럼 비틀거린다.


그냥 좌파인사들로 정권을 꾸리는 정도가 아니라 요소요소, 방방곡곡을 샅샅이 장악하고 우선 나라의 경제 기반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구 여권을 완전히 뿌리 뽑고 회복불능으로 질식시키는 작업을 시간표대로 착착 진행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원전폐쇄 정책에서 보듯 나라의 인프라는 무너져 내리고 있다. 최근에 온 95mm의 비에도 산사태로 태양광 패널이 떠내려와서 중금속으로 땅이 오염되고 있는데도 탈원전 정책을 포기나 수정할 생각이 없다. 태양광에 그리도 집착하는 이유가 구 운동권 인사들에게 태양광설치 사업을 맡기려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들린다.


이제 사법부는 청와대의 하수인이 되었고 국회도 야당은 전멸했고 여당은 청와대와 코드를 맞추느라 숨을 죽이고 있어서 이 나라는 어떤 분이 표현한대로 삼권분립에서 삼권통합으로 가고 있다. 그래서, 보수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부분이 너무 많아서 한 번 밭을 갈아엎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그냥 밭을 갈아엎는 정도가 아니라 지진을 유도해서 산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져서 나라를 삼켜서 이 나라가 지도상에서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두렵다.


더구나 이 나라를 북한에 바치려한다는 의심까지 드니, 70년의 부단한 노력이 허업인가, 이제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 줄 것이라곤 초토화된 폐허밖에 없는가.


6월 13일 선거에서 구여권의 참패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새로운, 진정한 보수세력이 태어날 정지작업이라고 믿고 싶다.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우리나라의 위기를 정확히 파악해서 우리나라를 파괴하려는 세력을 견제할, 그래서 뽑히려는 우리나라의 기둥뿌리를 다시 굳건히 박는, 일꾼이 되어주기를 손 모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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