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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04-17 08:04:02
  • 수정 2023-04-17 11:4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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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영일은 4.19당시 대학 3학년 재학중이었다.



1.들어가면서


올해 3월 26일은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한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탄신 148주년이다. 특히 그분의 업적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7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지금까지 일종의 저주와 같은 두 개의 왜곡된 프레임에 씌워 그분의 큰 지도자로서의 공(功)과 과(過)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한국 현대사를 조금만 알면 이승만 대통령의 혜안과 지략 없이는 대한민국의 건국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분은 지금까지 잘못 씌워진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올해 행정안전부가 주관한 3.1절 기념행사에서 공시된 독립운동가들 사진 속에 이승만 박사가 빠진 사건은 생각하는 국민들을 뜨겁게 분노케 했고, 심지어 “이것도 정권교체의 결과냐”고 따지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이승만 대통령을 보는 오늘의 시각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예화다.


필자는 역사적으로 큰 인물에 대한 평가는 항상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평가하는 사람의 지식이나 지득하는 정보의 양에 따라 항상 가변적일 수 있다. 필자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나의 20대의 관점이 인생의 산전수전을 두루 겪은 70~80대가 되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반성해 보는 형식을 통해 지금 이승만 박사에게 들씌워진 잘못된 프레임의 정체를 밝힘으로써 민족의 큰 어른으로서 그분의 공헌에 합당한 존경과 사랑을 받는 위치를 되찾아 보고자 한다. 이것이 4.19세대와 그분 사이를 화해로 인도하는 방도가 아니겠는가.


2. 나의 20대와 이승만 대통령


1960년 4월 나는 서울대 정치학과 3학년 학생으로서 부정선거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자유당 정권에 뜨거운 분노를 느끼면서 4.19 시위대열에 참여했다. 선거부정은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철학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 민주주의에 대한 범죄다. 그러나 식민통치시대를 살아온 당시의 기성세대들은 부정한 권력에 저항하기보다는 거기에 순응하면서 살아온 체질 때문에 저항은 생각조차 못 할 때였다.


그러나 대학의 젊은이들은 민주주의 교육을 받고 살아온 세대들이기 때문에 권력의 부정을 용서하지 않고 거기에 맞서 시위하기에 이르렀다.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부정한 권력을 상대로 싸움을 시작하자 국민들도 이에 가세, 부정부패 정권은 타도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당시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는 3학년생이었는데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 아는 것은 너무 제한적이었다.


그가 상해 임시정부 초대대통령으로서 독립운동가였으며, 미국을 무대로 한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는 정도 이상의 지식이나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다. 다만 85세의 고령인 대통령이 3선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을 획책하고 부정선거로 정권만 유지하려는 노욕에 사로잡힌 독재자로만 알았다.


그뿐만 아니라 1960년대 아시아, 아프리카를 휩쓰는 시대정신으로서의 근대화를 외면하고 자기의 비서실장 출신을 부통령으로 당선시켜 후계자로 삼으려고 부정선거를 획책, 수많은 청년 학생들의 목숨을 빼앗고 다치게 한 범죄자로만 보았다.


3. 4.19혁명 50주년과 이승만


2010년은 4.19혁명 50주년이었다. 바이블에서 말하는 희년(禧年)이었다. 이 해 연초에 박범진(朴範珍)전 의원이 4.19혁명 50주년을 맞이하여 자기가 경영하는 미래정책연구원에서 “4.19세대가 본 이승만 대통령의 공(功)과 과(過)”를 평가해보는 세미나를 기획하였는데 필자에게 주제발표를 부탁했다. 나는 이를 수락한 후 이승만 대통령 관련 자료를 국회도서관에서 3개월간 불철주야 연구한 끝에 4월 15일 논문을 발표했다. 내가 이 글을 쓸 때는 대학생이 아니라 3선 국회의원을 지냈고 국회 외무위원으로 세계 각국의 정치를 두루 섭렵한 축적 위에서 집필했기 때문에 이승만 박사에게 씌워진 두 개의 프레임을 비로소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하나는 소련 공산주의자들이 만든 프레임이었다. 소련은 1946년 3월 5일 서울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 제1차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고 그들이 북한에 동구형(東歐型)의 위성국가로 세운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앞세워 북한의 모든 토지를 무상몰수, 무상분배하는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다. 소련은 이처럼 미소 합의를 짓밟고 궁극적으로 한반도를 공산화할 전진기지로 그들이 선점한 북한 지역에 그들의 앞잡이를 내세워 위성 정권을 수립한 것이다.


이에 반해 이승만은 미소가 합의한 신탁통치를 반대하면서 유엔 감시하의 자유 총선거를 통한 통일국가 수립안을 내놓고 미국 등 유엔회원국들의 지지를 얻어 유엔방식을 통한 대한민국 건국을 추진했다. 이에 당황한 소련은 이를 방해하는 각종 책동을 펼쳤으며, 그 중 하나의 심리전 목표로 “이승만이 통일을 바라는 민족의 염원을 외면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획책한다”면서 “소 남한 단정 타도, 이승만 타도"를 내세웠다.


소련이 획책한 이 목표는 분단이래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국내외 모든 좌익들과 친북세력들이 하나같이 공유해오고 있다. 그러나 이 프레임은 허구였고 실효(失效)된 지 오래다.


다른 하나는 정적들이 만든 독재자 프레임이다. 정치 세계에는 반드시 정적(政敵)들이 있게 마련이다. 당시 학력, 경력, 경륜, 리더십에서 이승만을 능가할 수 없는 정치인들이 이승만을 제압할 유일한 수단이 있었다면 그것은 3선개헌과 부정선거 실패를 명분으로 그분에게 “노욕에 사로잡힌 독재자” 프레임을 씌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프레임의 타당성과 관련, 한가지 특기할 것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 제3세계 국가의 어느 독재자도 주권자인 국민들의 하야(下野) 요구를 받아들인 일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모든 독재자들은 권력과 정권의 운명을 일치시켰다. 그러나 이승만은 불의, 부정에 항의한 학생들이 옳았다고 평가했고, 부정선거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지고 하야하라”는 주권자인 국민의 뜻을 받아들여 권좌에서 물러났다.


다시 자유롭고 공정한 민주 선거를 통해 제2공화국이 탄생함으로 해서 그가 세운 대한민국의 주권재민 원칙은 전혀 손상되지 않고 살아났다. 이승만 대통령 후에도 5.16, 5.18등 헌법외적(憲法外的) 정부의 출현이 없진 않았지만, 그가 깔아놓은 민주정치의 궤도는 항상 다시 복원(Resilient)되었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국체는 한번도 바뀌지 않았다. 이 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더 이상 독재자의 프레임’을 쓸 이유가 없어졌다. 벌써 벗겨 버려야 했다.


4. 25년후면 대한민국 건국 100년이다


우리는 바야흐로 건국 100년을 25년 남겨두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세우면서 한국에서 자유민주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 두 가지 조건을 만들어 두었다. 하나는 지정학적 운명을 대륙세력의 후미(後尾)국가에서 해양세력의 대륙진출 교두보로 바꾸었다.


태평양 쪽에서 한반도를 읽었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체제를 유지해야 대륙진출 교두보가 되어 자본과 기술을 끌어들이고 수출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둘째는 한미상호방위동맹의 체결이다. 한미간에 정치적 가치를 공유해야 안보협력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정변으로 민주주의가 여러 번 붕괴위기에 처했으나 곧 원상이 회복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조건하에서 한국은 지난 70년 동안 전쟁 없는 평화 속에서 엄청난 발전을 이룩, 제2차대전 후 신생국 중에서 맨 처음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


앞으로 건국 100년쯤에는 통일도 성취되고 나라의 국격도 세계사의 중심대열에 합류할 만큼 높아질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국내외의 모든 갈등을 화해와 협력을 통해 하루빨리 극복하고, 특히 남남갈등은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 4.19세대와 이승만 대통령 간에 조그마한 인식의 앙금이 남아있더라도 그것도 이제 훨훨 털어 버려야 한다.


이제 통일문제의 구심력은 선진화에 성공한 대한민국에 있다. 남북한은 민족은 같지만 국가가 다르다. 국가발전의 주체는 “우리민족끼리”와 같은 민족이 아니라 국가다. 북한이 지구 최빈국인 데 반해 한국이 지금 세계랭킹 10위권의 경제 강국이 된 까닭이다. 우리에게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지만 북한에는 주권이 수령에게 있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국가만이 통일과 발전을 주도한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한다.


5. 글을 맺으면서


필자는 이러한 회상을 통해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한 이승만 대통령의 혜안과 지도력에 새삼 감사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소화, 감당할 수 없는 국민들에게 문맹퇴치운동을 실시, 88%의 문맹률을 14%로 줄여 민주정치를 감당할 국민들로 변화시켰다.


국민의무교육제, 지방자치제 실시 등이 바로 그 예다. 또 공산당들의 사소한 선전, 선동에도 쉽사리 넘어가 버릴 만큼 가난하기 짝이 없는 한국을 자유민주국가로 만들어야 했던 것이 그가 당면했던 가장 어려운 건국과업이었다. 더욱이 하루를 멀다 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좌익 폭동들과 반민특위(反民特委)를 전후한 국내 소요 등 수많은 혼란을 제압하면서 농지개혁을 통한 자영농 건설로 '재산의 주인과 정권의 주인'을 일치시켜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던 분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다.


이제 남은 일은 모든 분야에서 화해와 협력을 통해 남남갈등을 조속히 극복하고 모두가 하나 되게 만드는 일이다. 모두 합심 협력하여 건국 100년을 승리로 맞이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갈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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