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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02-23 06:3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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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무를 보았다. 아니 그가 나를 불러 세웠다.


왜 그냥 지나치는 거냐며 자기를 모르겠느냐고 했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내가 너를 어떻게 알겠느냐며 바라보았다. 그는 몹시 서운하다는 듯 잘 생각해보라고 했다. 난 여기 처음이야. 그리고 너도 처음 보는 거야라고 했더니 아니란다. 내 마음속엔 늘 자기가 있었단다. 그걸 자기는 금방 알아보았다고 했다.


순간 육십년도 더 된 기억의 실오라기 하나가 사르르 피어올랐다. 석류나무 한 그루가 눈앞에 와 섰다. 처음 보는 이 나무와 키도 비슷한 거 같다. 역시 잘 자란 것 같지는 않다. 보이는 나뭇가지도 별로 튼실해 보이지 않는다.


어릴 적 내가 살던 각골 우리 집 마당가에는 석류나무가 있었다. 한 해에 서너 개 겨우 열매가 열리는 나무였다. 내 키보다도 많이 크지 않아 쉽게 눈에 띄지도 않았지만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도 모르는 나무였다.


작은이모가 석류를 좋아했다. 이모는 황금빛 이를 드러내고 함박 웃고 있는 석류의 반을 쪼개 내게 주며 먹어보라 했다. 한 알을 손가락으로 떼 내어 입에 넣자 눈이 순식간에 찡그려지며 소름이 돋도록 신 맛이 나를 놀라게 했다.


네 엄마가 엄청 석류를 좋아 했느니라이모가 갑자기 엄마라 했다. 엄마가? 순간 나는 석류 알을 다시 입에 넣어봤다. 신맛이 아까보다는 좀 덜한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지 엄마는 왜 이리도 신 것을 좋아했을까. 맛보다도 석류 알의 황금빛 때문이었을까.


이모는 그 나무를 엄마가 심었다고 했다. 3년 만에 석류가 딱 한 개 열렸는데 그걸 엄마가 혼자 다 먹었다고 했다. 석류 맛이 어떤지 궁금했지만 이모는 입맛만 다셨을 뿐 그것으로 그만이었다고 했다. 다음 해엔 두 개가 열렸는데 하나를 먹으라고 주더란다


이모는 아기 이빨 같은 황금빛 석류 알을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하며 입에 넣었는데 새콤달콤한 맛이 신기할 만큼 좋았다고 했다. 그걸 아껴 먹느라 며칠을 한 알씩 두 알씩 떼어 먹었는데 오늘 것이 어제 것보다 더 맛이 있었고 그걸 다 먹는 동안 참으로 행복했다고 했다. 그런데 다음 해 석류가 여러 개 열렸을 때는 엄마가 이 세상에 없었다고 했다. 다음 해부터 이모도 석류를 보면 언니가 더 생각날 것 같아 아예 그걸 따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런 이모가 내게 석류를 따서 먹어보라 준 것이었다.


나처럼 그 나무도 늘 혼자였다. 큰 오동나무가 서있는 마당 귀퉁이에서 관심도 받지 못하는 나무였다. 석류는 해마다 세 개나 네 개씩만 열렸다. 그러다가 이모가 시집을 갔고 그 다음 다음 해에 새 집을 지어 이사를 하면서 이별을 했다. 나는 그걸 파다 심자고 했지만 할머니가 반대를 하셨다. 늙기도 했고 나무가 이쁘지도 않다는 거였지만 할머니도 어쩜 큰 딸이 떠나버린 안타까운 기억을 그곳까지 갖고 가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난 사실 참 아쉬웠다.


엄마가 심었다는 그 나무, 두 번 겨우 따먹고 가버린 그 석류나무, 엄마는 왜 그 나무를 심었을까. 석류를 좋아했다는 엄마와 덩달아 좋아하게 되었다는 이모를 생각나게 하는 나무, 그 석류나무를 오랜만에 만난 것이다.


그랬구나. 내 기억 속 깊이 잠재해 있던 그 나무가 먼저 나를 알아봤고 그래 나를 부른 것이었다. 미안하다. 너 아니었음 자칫 지나칠 뻔했구나. 사람의 기억은 늘 그렇게 흐려지고 잊혀 진단다. 그래도 널 보니 오래전의 기억인데도 이렇게 생생하게 떠올라 참 신기하다. 고맙다. 석류나무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무가 바르르 떠는 것 같다. 아주 작은 열매 두 개가 젖꼭지처럼 수줍게 톡 맺혀있다. 저게 자라고 나중엔 벙긋 벌어져 황금빛 이를 드러내겠지. 그러고 보니 그 나무에 달린 활짝 벌어진 석류를 여러 번 본 것 같다


이모는 그런 꼭 벌어진 석류만 땄는데 그런 게 더 맛이 있다 했다. 나는 부시도록 빛나는 석류 알을 보면서 침이 입에 고이는 것을 느꼈다. 먹고 싶기보다는 그 신맛이 먼저 느껴져서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석류나무를 만난 것이다.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요즘 들어 부쩍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컸었다. 이모도 가신지 삼년이나 되었다. 석류나무는 그런 내게 어머니는 잘 계신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이모와도 만났을 것이다. 두 분이서 어쩌면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까.


아직 형체조차 다 갖추지 못한 석류열매를 살짝 건드려 본다. 그래 잘 커서 열매가득 피어나거라. 고맙다. 엄마의 기억을 살려내 주어서. 이 또한 내겐 귀한 추억이 되겠다. 이파리 하나를 따서 수첩 속에 끼워 넣는 내 손등으로 바람 한 자락이 어머니의 손길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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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현 칼럼니스트 최원현 칼럼니스트의 다른 기사 보기
  • 『한국수필』로 수필,『조선문학』에 문학평론 등단.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사)한국수필가협회 사무처장. 월간 한국수필 주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조연현문학상·신곡문학상대상 수상,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그냥》등 16권,《창작과 비평의 수필쓰기》등 2권의 문학평론집, 중학교《국어1》《도덕2》,고등학교《국어》《문학》 등에 작품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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