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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분석] ‘죽은’ 장쩌민이 ‘산’ 시진핑을 잡을 수 있을까? -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 추도대회 엄수 - 엄중한 시기 중국, 장쩌민 사망이 일깨웠다 - 장쩌민의 죽음, 시진핑 노선에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 기사등록 2022-12-07 13:4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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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 추도대회 엄수]


지난 11월 30일 사망한 고(故)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국가주석의 국장(國葬) 격인 추도대회가 6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엄수됐다. 이날 오전 10시 추도대회 개시와 함께 14억 전 중국인이 3분간 묵념했고, 동시에 중국에서 주식과 선물, 외환 등 모든 금융시장이 거래를 중단했다.


이날 추도대회는 관영 중앙TV(CCTV)로 생중계되었으며, 시진핑 국가주석이 주임인 장례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각 단위별로 단체 시청을 했다.


[엄중한 시기 중국, 장쩌민 사망이 일깨웠다]


그런데 장쩌민 전 주석의 사망은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는 14억 중국인들에게 지금의 현실을 다시 깨닫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 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6일, 장쩌민 관련 특집판을 통해 “장쩌민(江澤民) 시대 중국 경제 성장의 교훈과 경고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도했다.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6일, 장쩌민 관련 특집판을 통해 “장쩌민(江澤民) 시대 중국 경제 성장의 교훈과 경고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면서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의 추도대회가 열리는 것에 맞춰, 장 주석 치하 중국이 직면했던 어려움과 이를 극복하며 이룬 성과를 조명하면서 그런 경험이 현재 중국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고 보도했다.


SCMP는 이어 “장쩌민은 처음에는 그렇게 대수롭지 않은 임시방편 지도자로 여겨졌지만 결국 장쩌민 팀은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중국을 고립에서 탈출시키며 중국 공산당이 동유럽 국가나 소련에 닥친 것과 같은 운명을 피하게 한 것으로 기억되게 됐다”면서 “특히 경제적으로 그가 시장 개혁과 국제 무역 규정을 추구한 것은 중국이 결국 미국과 맞먹는 G2국가로 올라서도록 이끌었고, 이는 장쩌민의 주요한 유산으로 널리 알려졌다”고 평가했다.


신문은 “장쩌민은 1989년 집권 당시 중국 당국에 의해 톈안먼 민주화 시위를 유혈 진압한 것에 대한 서방의 제재와 경제 개혁의 정체,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보수주의자들의 강력한 요구에 직면했지만 그는 그의 길을 갔다”고 회고했다.


이와 관련해 1991년 10∼12월 장쩌민이 소집한 11차례 밀실 회의에 참석한 10여 명의 연구원 중 한 명이었던 천둥치 전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 거시경제연구원 부원장은 SCMP에 “중국은 당시 선택의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었다”고 회고했다.


천둥치 부원장은 “연구원들이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의 붕괴와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국가들의 발전에서 얻을 교훈과 중국이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토론하도록 지시받았었는데, 이 과정에서 장쩌민은 친시장 개혁의 주요 사상을 인정하면서, 중국이 통제경제로 돌아가는 것을 막았고, 중국이 경쟁력과 경제적 위상을 키우는 굳건한 토대를 마련했다”고 증언했다.


특히 장쩌민의 이러한 개혁개방 기조는 1992년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로 힘을 얻게 된다. 남순강화는 1992년 1월18일부터 2월21일까지 80대 후반 나이에 공식적으로는 평당원 신분이었던 덩샤오핑이 우창, 선전, 주하이, 상하이 등 개혁·개방의 전초기지 격인 남부 지방 주요 도시들을 시찰하면서 행한 일련의 발언들을 말한다.


결국 개혁·개방의 설계자인 덩샤오핑이 남순강화를 통해 개혁·개방 지속을 적극적으로 강조했고, 장쩌민은 이를 배경으로 중국이 사회주의 시장 경제를 공식적으로 추진하도록 이끌면서 끝내 G2로 올라서는 데 성공했다.


중요한 것은 장쩌민의 그러한 선택의 시기와 지금의 시진핑 시기가 너무나도 닮아있다는 것이다. SCMP는 이와 관련해 “현재 중국은 30년 전과 비슷한 심각한 환경에 직면해 있다”며 “국내 경제는 2011년부터 성장이 둔화했고, 미국과의 무역 전쟁과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경제 성장률은 목표 달성에 실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지금의 중요한 시기에 시진핑의 선택이 장쩌민의 그것과 비교되면서 시진핑의 노선을 점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문은 이어 “이러한 중요한 선택의 시기에 중국은 '쌍순환'(수출 주도형 경제 체제를 개선하고 내수를 확대해 지속적인 성장 동력으로 삼는 것)과 국영 기업의 강화·확대를 향후 발전의 주제로 삼고 있다”며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중국이 더욱 내향적으로 돌아설 것이라는 우려를 이미 자아내고 있고, 개혁과 개방을 확대하라는 새로운 요구가 나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장쩌민이 선택했던 길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지금 중국이 나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곧 장쩌민은 개혁개방이라는 외부적 방향으로 중국의 노선을 잡았었는데, 시진핑은 이와 정반대로 내수중심의 폐쇄적 노선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지적인 것이다.


신문은 장쩌민과 시진핑의 외교적 돌파 방식도 비교를 했다. 장쩌민은 1998년 중국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타이타닉'이 상영되도록 했고, 미국 방송 프로그램 '60분'과 인터뷰를 했으며, 자국 농구 스타 야오밍이 미국프로농구(NBA)에 진출하도록 하며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이에 비하면 시진핑은 어떠한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미국과 등을 완전히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장쩌민은 또 코소보 분쟁이 한창이던 1999년 5월 7일 나토군에 의한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 대사관 폭격 사건 이후 벌어진 반미 시위에 적극적으로 대처했고, 2001년 미국 9·11 테러 후 미국의 테러 대응 노력을 지지하면서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위한 미국과의 양자대화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이러한 장쩌민의 대외개방 노선과 열린 외교로 인해 장쩌민의 13년 집권 기간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4배 뛰어올랐고, 2001년 12월 WTO에 가입한 후 20년간 중국의 경제는 12배 이상 커졌다.


물론 장쩌민에게도 문제는 있었다. 이에 대해 베이징사범대 판스타오 교수는 “그의 집권기 만연한 부패와 정치 개혁의 부재, 극심한 빈부격차는 비판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판스타오 교수는 그러면서도 “장쩌민 시대에 실현되지 않은 목표 중 하나는 15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제시된 법치의 실현이었는데, 이는 시진핑 집권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획기적 진전이 없다”고 평가했다.


[장쩌민의 죽음, 시진핑 노선에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장쩌민의 이러한 노선과 업적에 비해 시진핑은 지금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 일본의 닛케이아시아(Nikkei Asia)는 5일, 워싱턴 제임스타운재단의 선임연구원인 윌리 램(Willy Lam)의 칼럼을 통해 “장쩌민은 인민을 소중하게 여기는 지도자였으며, 또한 종종 공산당 핵심 간부들로부터 ‘친미주의자’라고 비판을 받을만큼 서양친화적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


윌리 램은 이어 “장쩌민이 WTO에 가입하는 것에 대해 중국공산당 고위간부, 특히 지역 당서기들이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그는 중국의 WTO 가입에 대한 워싱턴의 지지를 얻기 위해 클린턴 행정부에 상당한 무역을 양보하면서 기어코 목표를 이루었다”면서 “이런 뚝심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을 열매 맺게 했고, 그러한 지도력으로 지금의 중국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장쩌민은 더불어 중국의 경제를 공산당이 아닌 민간인들에게 대대적으로 개방했고, 민간주도의 경제체제를 확립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결정은 핵심 공산당 간부들의 격렬한 저항을 받기도 했다. 무려 2만여명의 공산당 간부들이 그러한 조치에 항의해 사임하기도 했으니 얼마나 반대가 컸는지 상상할만 하다.


장쩌민은 또한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생명공학 같은 기술분야에서 획기적 발전을 이룰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이러한 일련의 장쩌민 업적들이 그가 사망을 하면서 다시금 중국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가 주석 재직 시기에 있었던 일들이 이렇게 회자되는 것은 결국 시진핑 주석과 대비하면서 지금의 중국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생각하도록 만든다는 의미다.


외교만 해도 그렇다. 덩샤오핑과 장쩌민은 최소 2030년대 후반까지 세계 질서의 주요 규칙설정자로서 미국을 인정하면서 미국과 좋은 관계를 만들려고 노력을 했다. 심지어 친미주의자라는 말을 들어가면서까지 말이다.


그런데 시진핑은 덩샤오핑과 장쩌민에 의해 만들어진 중국의 소프트파워와 하드파워를 미국을 향해 공격적으로 투사하면서 미중충돌이라는 현상을 만들었다. 중국몽을 내세워 미국을 대체하는 중국의 비전에 대해 미국은 칼을 빼들었고, 급기야 중국이 갖고 있던 ‘세계의 공장’이라는 입지를 흔들리게 만들었다. 동시에 중국의 미래를 막을 수 있는 다양한 제재가 가해지게 되었다. 다 시진핑이 자초한 일이다.


특히 시진핑은 “동방은 흥하고 서양은 쇠퇴한다(동승서강; 東承西降)”는 주장을 하면서 중국의 힘을 과시하려 했지만 오히려 역공을 당하는 신세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시진핑의 평가가 장쩌민의 사망으로 중국내에 적극 부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핵심에 “시진핑에게 과연 중국의 지도자로서 혜안이 있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단져주었다. 특히 개혁개방이 아닌 마오쩌둥 시대로의 퇴행을 시도하는 시진핑에 대해 많은 중국인들이 시진핑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는 계기를 장쩌민의 죽음이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죽은 장쩌민이 살아있는 시진핑에게 어떠한 타격을 입히게 될까? 전 세계가 이를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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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EDUIN News 대표
    -전 OUR NEWS 대표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기획팀장
    -전 대통령실 홍보기획비서관
    -사단법인 한국가정상담연구소 이사장

    -저서: 북한급변사태와 한반도통일, 2012 다시우파다, 선거마케팅, 한국의 정치광고, 국회의원 선거매뉴얼 등 5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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