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주섭일 칼럼] 6.25 “수호전사”, 프 몽클라르에 조선지휘봉 수여 의미 - 프랑스군 지평리 대승, 중공군 남진포기로 휴전기회 열었다. - 프놈펜의 한·미·일 3국공동성명, 서구형 가치동맹 의미 크다
  • 기사등록 2022-11-15 14:53:09
기사수정


▲ 프랑스 전쟁영웅 몽클라르 장군


“사랑하는 아들아, 언젠가 너는 내가 한국전쟁으로 떠나야 했던 이유를 묻겠지, … 너와 같은 한국의 어린이들이 길에서, 물 속에서, 진흙 속에서, 눈 속에서 방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한국에 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독일군과의 전투에서 이겼던 프랑스 전쟁영웅 몽클라르 장군이 1950년 11월 29일 유엔군의 일원으로 부산에 도착했다. 그는 르 피가로지의 1950년 6월 27일자 대석학 레이몽 아롱주필의 “유엔은 한국전쟁에 참전하라”는 사설을 읽었다. 그는 ‘유엔 프랑군대대’를 자비와 국민모금으로 편성, 이끌고 한국의 부산에 도착했다. 김일성의 공산군의 침공을 격퇴하기 위해 한국전쟁에 뛰어든 것이다.


[프랑스대대, 지평리전투에서 5만 중공군을 백병전으로 격퇴하다]


유엔사 미보병 23연대에 배속된 프랑스군 대대는 1951년2월13일 경기도양평 지평리전투에서 영하 20도의 혹한에서 중공군 39군3개사단 5만명의 공격을 맞아 5천600여명의 원형진지를 구축해 백병전을 전개했다. 프랑스군은 몽클라르 대대장이 프링스군 선봉에서 “철모를 던지고 빨강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총검과 개머리판으로 중공군 인해전술에 맞서 수동식 사이렌을 울리며 중공군의 공격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3일간 백병전에서 중공군을 모두 몰아내면서 탱크를 앞세운 미군기동대가 도착하면서 세계전쟁사에서 빛나는 지평리전투의 대승을 이끌어냈다. 프랑스대대가 지평리전투에서 중공군의 남진을 결정적으로 차단함으로서 6·25전쟁 휴전의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1951년 1월10일 전투에서는 1개 소대 25명의 병력이 총검돌격으로 북한군 1개 대대를 격퇴했다. 총검술 공격으로 승리한 프랑스군의 피해는 부상자 단 2명이었다. 이 전투를 지켜본 미군2사단 지휘부는 소대장에게 찬사와 아울러 미국 은성훈장을 수여했다. 미군이 선호하지 않은 총검돌격을 하는 프랑스부대의 전략전술은 구식전술로 치부되었으나 한국전쟁에서 프랑스군이 적군의 격퇴를 피해없이 승리하는 신전술로 인식되었다.


평더화이 중공군 총사령관은 지평리전투 패배로 후퇴 5일후 북경에 날아가 모택동주석에게 격렬한 백병전투의 패배를 보고하면서 “더 이상 남진이 어렵다”고 호소하여 중공군의 진격을 멈추게 만들었다.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은 승리 후 5일만에 지평리를 찾아 몽클라르와 프랑스군을 직접 격려했다.


지평리전투는 2차대전을 종식시키고 나치독일군을 대패시킨 미군의 “발지전투‘와 함께 세계전사상 사주방어전투의 2대 승리로 기록되었다. 한국보훈처는 6·25전쟁에서 프랑스군대대를 지휘하여 중공군의 전진을 포기하게 만든 몽클라르 장군의 전공을 높이 평가하여 2011년 2월 한국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프 2차대전영웅의 강력요구, 국민편성-모금성공 한국파병하다]


국가보훈처가 2020년 11월 7일 몽클라르 장군의 유족에게 조선시대 장군의 지휘봉을 전달한 것은 지평리전투에서 10배나 더 많은 대군인 중공군의 공격을 격파하여 한국전쟁의 승기(勝氣)를 잡아준 프랑스대대의 세계전쟁사에 빛나는 기록을 낸데 대한 감사의 뜻을 담고 있다.


특히 서두에 인용한 몽클라르 장군의 1950년 12월 당시 생후 11개월 된 아들에게 보낸 편지는 아들이 커서 글을 깨우친 후 읽으라며 보낸 것으로, “한국의 미래의 세대를 지켜주기 위해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고 쓰면서 아들의 이해를 당부했다는 것으로, 모두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몽클라르 장군의 한국전쟁 참전에는 남다른 난관이 가로 막았으며, 2차세계대전의 영웅으로서 육군중장 계급장을 대대장이 되기 위해 중령으로 자진 격하시키면서 참전한 비사가 있었다. 프랑스는 2차대전에서 히틀러의 위성정부 비시정권과, 수도 파리를 포함한 북부는 독일점령군지배로 양분되어 있었다.


프랑스정부는 유엔안보리가 한국전쟁에 파병을 결정했음에도 안보리상임이사국으로서 한국전 파병경비를 댈 수 없었다. 프랑스정부는 12명의 군사고문단파병을 궁여지책으로 결정했다. 몽클라르 장군과 중견군인, 많은 지식인들이 한국파병을 요구했으나, 2차대전 피해 복구 등으로 예산이 없었던 것이다.


몽클라르 장군은 국방차관과 협의하여 직접 전국을 돌면서 한국전쟁참전을 위한 참전군인 모집과 모금운동을 폈다. 특히 그는 전국을 순회하며 세계대전에 참전경험자들 가운데 우수경험자를 엄격한 심사를 단행하여 정예특별부대를 편성했다는 것이다. 부대를 몽클라르 장군 스스로 지휘한다고 말하자 국방차관은 중장으로 대대를 지휘하기에는 계급이 너무 높다고 거부했다.


몽크라르가 계급장을 중령으로 낮추겠다는 주장을 관철하여 프랑스대대의 한국전쟁 참전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몽클라르 장군의 계급이 강등된 것이 아니라 귀국 후 중장으로 복귀한다는 조건으로 허용되었다. 당시 한국주둔 미8군사령관 리지웨이 중장과도 경력이 비슷하여 아는 사이였고. 자기보다 낮은 장교의 지휘도 받는 어려움도 있었다.


미2사단 23연대에 배속된 몽클라르 장군은 프랑스 육사출신으로 1차대전 참전과 외인부대경험 및 2차대전 나치독일 점령하 드골장군의 레지스탕스로서 경험의 최고의 명장이었다. ‘라울 샤를 마그랭-베르느레’의 본명을 레지스탕스시절 랄프 몽크라를 변명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유엔기념공원에서 ‘턴 투워드 부산’ 묵념, 유엔군 영웅들 잊지 말자]


2020년11월11일 오전11시 부산의 유엔기념공원에서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려다가 산화한 유엔군 참전용사들을 추모하는 행사인 ‘턴 투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는 부산과 한국 등 6.25전쟁 참전 22개국에서 일제히 부산을 향해 묵념을 하여 6·25전쟁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세계적 행사이다.


“탕탕탕…” 21발의 조포가 발사되었다. 조포 21발은 국가원수에 대한 예를 갖출 때 쏘는 행사로서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묻힌 유엔참전용사들을 국가원수급으로 예우하면서 추모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2007년부터 시작된 이 행사는 “1950년 625전쟁에 참전한 전쟁영웅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대한민국을 지켜낸 오늘의 자유와 평화를 잊지 않겠다.”고 하는 후세의 결의와 각오를 표현하고 있다. 캐나다군 허쉬형제의 외손자로 세인트진 왕립군사학교 생도인 브라이언 카나카키직이 추모편지를 낭독했다.


이날 행사에는 오늘 생존 유엔참전용사들과 전몰참전용사들의 가족, 15개국 114명을 비롯해 한덕수 총리, 박미식 국가보훈처장과 각국 외교사절들이 참석했다. 6·25전쟁 때 치안유지를 담당했던 후버투스 호헌봄씨와 참전용사 앵버링크 등 2명의 네덜란드용사들과 영국군 참전용사로서 귀국 후 1988년부터 자비로 34년간 전우들을 매년 추모해온 영국의 네임스 그룬디 등 3명의 유해안장식이 거행되었다. 앵버링크 유족은 추모사에서 “한국의 자유를 위해 싸워온 것을 자랑으로 여긴 아버지는 ‘전우의 곁에 같이 잠들고 싶다는 뜻을 생전에 밝혔다”고 애도했다.


한덕수 총리는 이날 “한국사회를 흔들기 위한 북한의 어떤 시도도 결코 용나하지 않겠다.”라고 한국의 결의를 내외에 밝혔다. 유엔기념공원에서 ‘턴 투워드 부산’ 행사를 거행한 것은 문재인정권 5년 동안에는 볼 수 없었다. 더불어 민주당 대표 송영길 국회외교통일위원장은 연합뉴스TV와 인터뷰에서 “주한유엔군 사령부라는 것은 족보가 없다”고 밝혀 큰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 터졌다.


그는 “유엔에서 예산을 대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주한미군에 외피를 입힌 것”이라고 밝히며 미군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했었다. 집권당인 더불어 민주당은 송대표와 같은 이른바 전대협주사파 세력인 586비전향정치인의 집권으로 평화프로세스라는 구실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반미, 자주, 통일”이라는 전대협 종북슬로건을 공공연히 부르짖었다.


특히 문재인은 유엔연설에서 휴전종식선언을 제의하는 등 유엔의 뿌리를 뽑는 작업에 나섰던 것이다. 브룩스 전 한미연합사령관은 “송영길발언 끔직해, 유엔군 족보는 송영길의 말보다 오래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의 정통성도 유엔의 인정에 따라 확립됐다”고 밝혀 586주사파의 논리를 정면으로 허물기도 했었다.


오늘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제적 지위가 김일성의 남침을 계기로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지키기 위한 유엔군 참전이라는 역사적 진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한국군 62만1479명과 유엔군 15만1129명 전사, 한국군 45만742명, 유엔군도 10만3460명이 부상한 대전쟁이 김일성의 남침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6·25전쟁은 72년이 지난 오늘에도 휴전상태로 북한 김정은이 최근 3개월간 60여개의 미사일을 쏘아대면서 전술핵무기로 남한을 선제공격할 것을 호언하고 있다.


[프놈펜회담, 한·미·일 공동성명 서구 수준 가치동맹의 의미 크다]


6.25전쟁 발발 72년만에, 한·미·일 3국 정상이 역사상 처음으로 김정은의 미사일 핵도발에 대해 미국이 확장억제 강화방안을 확인하는 한·미·일 3국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바이든 미대통령, 윤석열 한국대통령, 기시다 일본수상은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역사상 최초의 3국 공동성명에서 미국의 북핵 대응을 위한 확장억제를 천명하고 유엔안보리 결의에 따른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공약을 재확인했다.


특히 북한이 다시 핵실험을 강행할 경우, 국제사회의 단호한 대응에 직면할 것이라고 성명은 천명했다. 특히 바이든 미대통령은 “한국과 일본에 대한 방위공약은 철통같다. 핵을 포함해 모든 범주의 방어역량으로 뒷바침된다”고 밝혔다. 또한 3국 정상은 3국간의 경제안보대화체를 신설운영하기로 합의했다.


한·미·일 3국 정상의 공동성명은 한반도와 대만문제에 대한 현상유지를 표명했다. 특히 바이든 대통령은 한반도 등 동북아에 미군 증파의지를 표명함으로서 김정은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강력한 대응마저 밝혀 동북아와 한국의 안보중요성을 강조했다. 6·25전쟁에 유엔군의 한국파병은 자유민주주의 가치동맹차원에서 이루어졌고, 한·미·일 3국 공동성명은 2차대전 후 최초의 가치동맹으로써 안보적 국제공조라는 사실에서 뜻이 깊다.


6·25전쟁은 21세기에 종점으로 향해 가는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냉전에서 승리를 견인했던 구미안보기구 나토와 국제공조도 최근 우크라이나전쟁 지원을 계기로 굳게 다져지고 있다. 몽클라르 장군의 프랑스인 모금에 의한 프랑스대대의 6·25전쟁 참전은 중공군에 대한 백병전-육박전의 전승효과를 보면서 북한공산군의 남침야욕에 대한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다.


프랑스는 세계최초로 자유민주주의체제를 프랑스혁명의 승리를 통해 세계를 자유민주체제의 지속적 발전을 통해 정치이념적 정통성을 확립한 나라이다. 우리 보훈처가 11월11일 11시 “턴 투워드 부산” 행사를 주최하면서 몽클라르 장군 미망인에게 ‘조선지휘봉’을 전달한 것은 자유민주주의 동맹국으로서 민주정통성의 공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필자: 주섭일, 419민주혁명 공로자회고문, Why Times고문, 전중앙일보 국제문제 대기자-파리특파원, 정치학박사.

TAG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whytimes.kr/news/view.php?idx=13452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주섭일 Why Times 고문 주섭일 Why Times 고문의 다른 기사 보기
  • 언론인/ 사회와 연대 회장
    정치학 박사
    전 중앙일보 파리특파원-국제문제대기자

    저서: 사회민주주의의 길(사회와 연대, 2008) 등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사회와 연대, 2017)
    특파원이 추적힌 북한 핵(사회와 연대, 2016)
    한반도 통일대박과 1990 독일통일 (사회와 연대, 2014)
    북의 3대 세습과 평양의 봄(사회와 연대, 2011)
    정치변화와 사회민주주의 (사회와 연대, 2002)
    김정일과 부시의 대타협(두리미디어, 2008)
    새정치와 이원적 민주주의 (사회와 연대, 2012) 등 다수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정치더보기
북한더보기
국제/외교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