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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10-09 21:5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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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Why Times]


얼굴이 화끈거린다. 너무 부끄럽고 화가 난다. 어떻게 이렇게 당할 수 있을까. 그래도 내 딴엔 꽤나 신중한 편이고 상황판단도 잘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오늘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랑을 하면 눈에 콩깍지가 낀다지만 사람이 일을 당하려면 눈에 꺼풀이 씌워지는지 참으로 불완전한 존재가 사람인 것 같다.


전화가 왔다. 금융감독원 은행 전산보안팀이라고 했다. 순간 보이스피싱이라는 판단에 속으로‘놀고있네’ 하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런데 한참 후 메시지를 확인해 보다 깜짝 놀랐다. 웹 발신으로 늘 내게 금융관련 정보를 보내주고 있는 k은행의 메시지에 아까 전화가 왔던 그 내용이 담겨 있었다. ‘금융감독원 은행 전산보안팀 이동수 과장입니다. 본인 앞으로 해킹유출 연락 드렸으나 부재중으로 연결 안됩니다. 빠른 보안 강화 하세요. 1588-xx99. 직통전화 070-7671-4437’이라는 내용이었다.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는데 k은행이 보낸 것을 보면 진짜 나한테 무슨 문제가 생겼나 보네? 속으로 생각하며 전화를 걸어봤다. 1588 전화는 통화중이이서 그 아래 안내된 직통전화로 걸어봤다. 했더니 이동수과장이란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그는 김경수라는 37세의 남자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가 내 이름으로 외국에서 물품을 구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수원지방검찰청 사이버수사대에서 수사를 하고 있으니 거기서 연락이 올 거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바로 전화가 왔는데 검찰청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스마트폰으로 지금 네이버나 다음에서 검찰청을 검색하여 들어가 피해 접수 신고를 하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검찰청 사이트에 들어가니 거기에‘개인정보침해신고센터’가 있었다. 그곳에 개인정보유출신고를 하라고 했다. 


나는 신고자명, 전자우편, 제목, 내용 등 필수 입력사항을 그의 안내대로 작성하고 등록을 했다. 그러자 그가 질문을 해왔다. 수사과정에서 충분히 물어볼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그런데 그의 질문에 답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조금씩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피해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라지만 k은행 외에도 거래하는 은행이 어디 어디며 잔고는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왔기 때문이다.


난 금융 업무에는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다. 오직 집에 있는 내 컴퓨터에서 별도 보관의 공인인증서만 사용한다. 그는 내가 집에 들어가게 되면 계좌에서 얼마나 피해가 있는지를 확인해 보자고 했다. 오늘은 늦게 들어간다고 했더니 내일 열시에 전화를 하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은 후 k은행으로 전화를 했다. 사실을 이야기 했더니 보이스피싱이라며 계속 피해자가 나오는 것 같다고 한다. 은행에서 보낸 메시지였다고 했더니 그들이 그 번호로 메시지도 보낸 것이라 했다. 혹시나 해서 나도 통화가 되는 순간부터 녹음버튼을 눌렀었는데 확인을 해보니 28분 35초나 되었다. 그렇다면 난 그 28분 35초 동안 사기꾼인 그가 하자는 대로 했고, 시키는 대로 했고,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도 했던 것이다.


이미 칠순을 넘기고 산전수전 다 겪으며 세상을 살아왔다는 내가 그런 자의 손에서 놀아났다고 생각하니 어이가 없고 창피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놀아났다는 게 화가 날뿐 아니라 그 사실이 믿어지지도 않고 그것을 인정하기는 더더욱 싫었다.


물론 계좌번호나 공인인증서로 무얼 하라고 하면 당연히 의심하고 더 이상 대응을 하지 않았겠지만 은행에선 스마트폰에 바이러스가 침입했을 수도 있으니 스마트폰을 초기화 하던가 서비스센터에 가서 점검을 받으라 했다.


젊었을 때 나는 사람을 너무 잘 믿어버려 문제가 되곤 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오며 나이가 들어가자 그런 믿음이 오히려 불신으로 바뀌고 그렇지 않을 것까지도 의심하는 게 더 자연스러워져 버렸다. 순간순간 자책도 했지만 세상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다그치곤 했다.


문득 1991년 이형호 군 유괴사건을 영화로 만든 <그놈 목소리>가 생각났다. 그 목소리처럼 내 귀에도 그 자의 목소리가 남아 있다. 피해를 입은 건 없으니 없던 일로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영 자존심이 상한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못 하게 혼내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아홉 살 상우가 없어지고 44일간이나 유괴범의 피 말리는 협박전화를 받던 부모에게 범인의 목소리는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을까. 그렇다고 어떻게도 해 볼 수 없는 상황, 그 부부의 안타까움과 절망이 새삼 온 몸으로 느껴진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도 참 답답한 인간이다. K은행에서 온 메시지에 금융감독원 전산보안팀 것이 왜 들어있겠는가. 금융감독원이면 금융감독원에서 직접 보내지 k은행을 통할 건 뭐며, K은행이 보내는 것이라면 그런 연락이 왔다고 K은행이 보내야 할 것 아닌가. 조금만 깊이 생각을 했어도 금방 알 수 있는 것인데 그들의 꼬임에 넘어갔으니 여전히 이 험악하고 복잡한 세상을 살아갈 자격이 의심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자기에겐 어떤 불행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는 그런 일도 당하지 않을 걸로 자신한다. 그래서 일이 닥치면 너무나도 쉽게 당하는 것을 많이 본다. 그것은 사람들이 너무 이기적이어서 자신에게 어떤 작은 손해라도 생길 것 같으면 쉽게 흥분하고 당황하여 이성을 잃기 때문일 것 같다. 그러니 이왕 벌어진 일이라면 서두를 게 아니라 차분하게 대응하는 것이 옳으련만 그렇지 못하는 것 또한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상황은 달라도 나도 이번만이 아닌 것 같다. 차를 운전하다 접촉사고가 났을 때도 내 잘못이 아니건만 더 당황하고 초조해 하던 것도 그렇고, 확인되지도 않은 소문에 벌컥벌컥 흥분하고 화를 냈던 것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번의 28분 35초는 이런 내게 참 좋은 공부가 되었다.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 시간동안 나는 없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온 동안 나의 무지와 몰이해로 아니면 내 욕심을 위해 나도 모르게 이번 같은 일이 더 있지는 않았을까. 직접 의도가 없었다 해도 내 욕심만을 채우기 위해 남을 생각지 않았다면 그자와 내가 무엇이 다른가.


어쩌면 이 일에 오히려 감사를 해야 할 것 같다. 참으로 복잡하고 무서운 세상, 남은 삶을 제대로 살아가려면 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한다는 하늘의 소리만 같다. 28분 35초, 나를 잃어버린 시간이었지만 나를 회복시키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게 이런 28분 35초가 다시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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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현 칼럼니스트 최원현 칼럼니스트의 다른 기사 보기
  • 『한국수필』로 수필,『조선문학』에 문학평론 등단.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사)한국수필가협회 사무처장. 월간 한국수필 주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조연현문학상·신곡문학상대상 수상,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그냥》등 16권,《창작과 비평의 수필쓰기》등 2권의 문학평론집, 중학교《국어1》《도덕2》,고등학교《국어》《문학》 등에 작품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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