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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10-09 21:5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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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시(西施)


중국의 서시(西施)라는 미인은 맑고 푸른 강물에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추자 물속의 고기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이 빠져서 잠시 헤엄치는 것을 잊어버리고 서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는 침어(浸魚)라는 별명을 얻은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미인이다. 그녀는 서한(西漢) 원제(元帝)의 후궁 왕소군(王昭君), 삼국시대의 초선(貂蝉), 당의 양귀비(杨贵妃)와 함께 중국의 4대 미인 중 한 명이다.


그런 미인이 월()나라의 첩자로 활동하여, ()나라를 멸망시키는 세계 최초의 여간첩이었다고 한다. 나는 퇴임 후 쑤저우(蘇州)대학에서 외국인 교수로 재직하면서 주말이면 건강을 위해 금계호(金鷄湖) 호수 주변을 뛰거나 교외의 가까운 산을 등반하곤 했다


특히 시 외곽에 있는 영암산(靈岩山)을 자주 올랐는데, 이 산이 춘추시대 오() 나라와 월() 나라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게 된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와신(臥薪)은 오 나라 왕 부차(夫差)가 섶나무 위에 누워 자면서 복수를 다짐하던 것을 말하며, 상담(嘗膽)은 월나라 왕 구천(勾踐)이 항상 곁에다 쓸개를 놔두고 앉으나 서나 그 쓴 쓸개의 맛을 보면서 복수를 다짐했다는 고사성어를 말한다.


월나라 태생인 서시(西施)가 월나라 왕 구천(勾踐)의 지령을 받고, 오 나라 왕 부차(夫差)의 애첩으로 오 나라에 가서 그 나라를 멸망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금도 영암산(靈岩山) 입구에는 서시가 거주했던 관왜궁(館娃宫) 건물이 존치되어 있고, 산 정상에는 부차(夫差)가 자결했다고 추정하는 장소도 보존되어 있다. 서시(西施)가 부차(夫差)에게 국력 쇠퇴를 목적으로 운하를 준설하도록 간청하고 후에 월나라 군사들이 침략할 때 바로 그 운하를 통해 공격했다는 운하(運河)의 흔적도 볼 수 있다.


서시(西施)는 춘추시대 월나라 저라산(苧蘿山), 지금의 절강성 제기시(諸曁市) 출신으로 원래 이름은 시이광(施夷光)이며, 이광(夷光), 서자(西子), 완사녀(浣沙女)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그녀가 살았던 마을은 저라산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뉘어 있는데, 서시는 서쪽에서 살았기 때문에 서시 (西施)라고 부른다.


그녀의 아버지는 나무꾼이었고, 어머니는 사의(紗衣:갑옷)를 빠는 전문 세탁업 완사(浣沙)였는데, 이 때문에 서시의 고향 마을의 냇물을 완사계(浣沙溪)라 부르기도 한다. 서시는 용모가 출중했지만 신체는 비교적 가냘픈 편이었다. 비록 깊은 산속에서 자라난 시골 처녀였지만 확실히 그녀의 자태는 고금에 등장하는 경국(倾国)의 미인이었다.


서시가 등장하기 전부터 오 나라와 접해 있던 월나라는 사이가 좋지 않아 싸움이 잦았다. 오 나라는 6대 왕 합려(闔閭) 때 전성기였다. 합려는 기원전 496년 신흥국 월나라를 공격했다가 적의 화살로 손가락을 부상당하게 되면서, 왕위 계승자인 차남 부차(夫差)에게 복수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사망한다. 왕위에 오른 부차는 섶나무 깔개에서 잠을 자며(卧薪), 설욕을 되새기면서 충신 오자서(伍子胥)의 도움으로 국력을 키워간다.


드디어 기원전 494년 부차가 월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국력을 키운다는 첩보를 입수한 월나라 왕 구천(勾踐)3만의 군대를 이끌고 오 나라를 선제공격했으나, 구천은 5천여 군사와 함께 회계산(會稽山), 지금의 소흥(绍興)에서 오 나라 군사에 포위된다. 그리고 구천은 부차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인질로 끌려간다.


오 나라에서 3년간 부차(夫差)의 수레를 호위하는 등 비참한 인질 생활을 겪고 구천(勾踐)은 기원전 490년 범려(范蠡)의 도움으로 월나라로 돌아와 국력을 키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구천은 쓸개를 걸어두고 매일 그것을 핥으면서(嘗膽) 치욕을 되씹는다


구천勾踐)은 부차(夫差)에게 금은보화를 예물로 바치며 환심을 사며 한편으로는 미인계로 복수할 계획을 수립한다. 그래서 신하 범려(范蠡)와 문종(文種)에게 전국에서 미인을 찾도록 한다. 미인을 찾던 중 문종은 서시를 발견하고, 그녀를 궁으로 데려와 다양한 기예를 가르치고 남자를 유혹하는 기교와 정보수집 방법 등을 교육시킨 후 오 나라 부차에게 예물로 보낸다.


마침 호색한이던 부차는 서시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후궁으로 삼고, 고소대(姑蘇薹)에 기거하게 하고, 그녀를 위해 왕손 웅()을 시켜 영암산(靈岩山)에 별궁 관왜궁(館娃宫)을 신축하게 한다. 관왜궁은 구리, 옥돌, 주옥 등의 화려한 자재로 지어졌고, 회랑(복도)은 나무 신발을 신고 걸어가면 발소리가 영롱하게 들리도록 하는 특별한 공법을 사용했고, 인공 연못과 인공 동굴도 만들었다. 부차는 서시의 미모와 교태에 빠져 국사를 게을리 했고, 서시의 간청으로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려 서시가 뱃놀이를 즐길 수 있게 운하를 건설하는 등 국가 재정도 낭비했다. 이처럼 부차가 서시를 총애하며 국사를 등한시 하자 드디어 구천이 오를 공격할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구천은 범려 등의 보좌를 받으며 국력을 키우던 차에 부차가 제() 나라를 공격하고 이어서 진() 나라와 전쟁을 하자, 기원전 473년 부차 23년에 오 나라의 도성 고소(姑蘇), 지금의 소주(蘇州) 외각을 공격했다. 부차는 도성 서쪽 고소산(蘇山)으로 도망쳤으나 포위되어 오 나라는 멸망하고 부차는 스스로 자결해서 죽는다.


서시의 종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오가 멸망한 후에 구천의 부인이 서시의 미모를 보고 구천이 그녀를 좋아하게 될까 두려워서 오 나라 사람들에게 서시가 나라를 멸망케 한 요부라고 믿게 하면서 그녀를 자루에 넣어 강물에 빠트려 죽게 했다는 설이다. 후에 강에서 조개가 발견되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서시의 혀라고 했다. 지금도 소주 지역 식당에서는 서시혀(西施舌)”라 불리는 조개로 만든 요리를 식당 메뉴로 볼 수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서시와 범려(范蠡)가 사랑에 빠져 오 나라가 멸망한 후에 월의 왕 구천이 범려에게 하사한 봉작(封爵)도 포기하고 밤중에 서시를 데리고 인근 태호(太湖)로 도망을 가서 세상을 피해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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