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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섭일 칼럼] “개혁 안하면 천벌 받는다” 고르비선언의 세계사적 의미 - G7의 통일자문 콜-미테랑특사 문전박대한 한국정부 - 30년 후 분단 한반도, 북핵 위협 냉전시대 절망적 왕따
  • 기사등록 2022-09-18 06:41:47
  • 수정 2022-09-20 09: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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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샌프란시스코=AP/뉴시스]91세 일기로 타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과거 모습. 1990.06.05


고르바초프 덕에 통일했던 독일 지도자들은 그의 타계에 모두 애도의 매시지를 발표했다. AFP통신은 “중-동부유럽의 민주화는 고인이 당시 소련집권자였다는 사실 덕분이다”고 독일의 숄츠총리가 애도했다고 보도했다. “독일통일은 고인의 덕분이었다”고 그의 공을 기렸다. “소련사회주의연방 ‘페레스트로이카’의 아버지이며 20세기 최고 대정치인 고르바초프의 장례식이 9월3일 푸틴대통령의 불참한 가운데 논쟁적 유산을 남기며 거행되었다. 러시아 민주주의가 실패한 순간 그는 떠났다”고 그는 애도했다.


16년간 독일총리를 역임했던 동독 출신 여성총리 메르켈도 “1990년 코카서스에서 서독총리 콜과 회담한 고르바초프를 잊을 수 없다. 그때 평화와 자유 속에서 통독은 이루어졌다. 세계 유일무이한 대정치인이자 세계를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킨 대정치인이었다”고 조의를 표했다. 외신은 이렇게 보도했다. “소련연방이 1991년 사라짐으로서 냉전종식의 역사를 만들고, 그는 91세로 영면했다. 그는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묘지의 부인 라이사의 묘지에 묻혔다.”


한국 언론은 고르비의 장례식을 외신으로 대신했다. 통독시기에 “다음은 한국차례”라고 외쳤던 동독인들의 여망을 한국 통일부가 거부함으로써 통일과 평화에 실패한 유일한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탈냉전시대 탈락한 한반도의 비극의 역사궤적을 추적해본다.


[1989년10월 동독창설 40주년 고르비의 폭탄선언의 의미는]


1989년 7월 5일 고르바초프가 파리를 방문,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세계사의 유럽 대변동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나는 불소정상회담을, 곧이어 파리의 G7정상회담을 취재했다. 또 프랑스대혁명 200주년 기념 군사퍼레이드와 국제학술대회도 취재했다. 고르비의 파리방문은 G7정상회담 참여 타진과 1천억 달러 지원요청이 주목적이었다.


G7정상회담은 재빨리 긴박한 유럽대변동에 대한 외교 전략과 비상사태대책팀을 짰었다. 다가오는 세계 공산진영 해체 대책마련이 시급했다. 팀장에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을, 미소핵감축문제에 부시대통령을 지명했었다.


고르비는 불소정상회담에서 철의 장막해체, 동구진영의 자유화, 소련공산경제의 시장화를 위한 G7의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7월15일 G7정상회담은 소련에 1000억달러를 지원하는 대신 동구공산진영의 대전환을 위해 ‘동구개발은행(EBRD)’의 창설에 합의했다. G7은 EBRD에 1000억 달러 자금지원을 결정했다. 이렇게 소련멸망, 독일통일, 동서구 통합의 로드맵을 마련한 것이다.


프랑스혁명 200주년 세계역사대회는 1789년 프랑스혁명이 시작한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체제를 1917러시아공산혁명의 결과 공산주의 진영을 대체하는 세계의 주류체제요, 이데올로기로 선포했다. 학문적으로 레닌의 공산주의혁명이 부르주아혁명으로 억압했던 프랑스혁명이 세계주류의 정체성을 탈환한 것이다. 러시아혁명대신 자유민주-시장경제를 실현한 프랑스혁명을 학문적 이념적 주류로 대체했던 것이다.


여기에 필자는 프랑스혁명 200주년 세계역사학대회의 아시아담당 간사를 맡아 한국위원회를 결성해 서울문리대 서양학과 민석홍 교수를 위원장으로 모셨고, 최갑수 교수를 간사로 임명했다. 갑신정변-동학농민전쟁 등 한말 근대화운동을 세계학계에 최초로 알렸다. 민위원장은 미국 하바드대 프랑스혁명연구 박사로서, 한양대 정창렬 교수가 “한말 동학농민전쟁”을 발표했다. 필자의 파리13대 박사논문 “프랑스혁명과 한말변혁운동 비교연구”(불어판)도 한말변혁운동이 세계 학계에 보고되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 붕괴로 독일통일, 냉전종식, 소련공산당해산, 공산진영 붕괴가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1989년 8월 여름바캉스를 빙자해 헝가리로 바캉스 갔던 동독인들이 최초로 서독으로 탈출했던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철의 장막’붕괴와 동독인 탈출을 묵인했다.


이에 앞서 10월 7일, 동독건국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고르비는 축사에서 폭탄선언을 터뜨렸다. “(공산당이) 개혁을 거부하면 하늘의 벌을 받는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공산주의 반개혁선봉장 호네커 동독 공산당서기장에게 고르비는 경고장을 날린 것이다. 그의 ‘천벌예언’은 베를린장벽 붕괴 후 현실화되었다. 호네커 동독당수가 장벽붕괴 후 모스크바, 칠레 등지 망명 후 통독사법당국에 체포되어 중형을 받았다.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대통령은 시민-군합동 봉기시위대에 쫓겨 헬기로 모스크바로 도주하다가 군부대에 체포되었다.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부부가 총살당했다.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대통령은 퇴임 후 공산당수를 계속하다가 헤이그의 유엔사법재판소 체포조에 붙잡혀 재판도중 옥사했다. 고르비의 “개혁안하면 천벌” 선언이 곧장 현실화된 셈이다.


[G7, 의회민주주의-시장경제조건 공산진영 정치경제개혁 지원]


서독총리 헬무트 콜은 베를린장벽 붕괴 후 거의 매주 주말 파리의 엘리제궁을 찾아 미테랑과 유럽대변동과 독일통일방안 등에 합의안을 마련했다. 통독, 미테랑은 동서유럽 통합작전을 집중 연구토론한 것이다. 이들은 고르비의 동독과 동구포기를 파리의 불소정상회담과 G7정상회담에서 협의했음으로, 1990년 10월 통독성공에 골인했다. 수년 후 미테랑이 동구의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등 동구 공산위성국들을 서구의 자유민주체제에 흡수통합에 성공했다.


미테랑은 동서유럽의 흡수통합 성공으로 오늘의 유럽연합(EU)이 출현했던 것이다. 1990년 10월 3일 독일통일에 이어 1991년 12월 24일, 고르바초프가 소련TV에서 “소련세계 공산당 해산명령”을 선포했던 것이다. 이렇게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 붕괴를 시발점으로 통독, 동서유럽통합, 냉전종식, 소련공산당 해산으로 세계평화는 이루어졌고, 21세기 탈냉전시대가 개막되었던 것이다.


미테랑은 1990년 11월 21일 파리에 유럽안보협의회(CSCE-북미유럽정상회담) 정상회담을 소집, “21세기 세계에서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체제가 유일 보편적 진리이다”고 선포했다. 이는 공산주의, 파시즘, 나치즘, (일본) 군국주의와 모든 전체주의들을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했다. 구소련공산당과 동서구 공산당, 그리고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공산당들이 거의 모두 1992년까지 전당대회를 열어 공산당 폐기와 동시 사회민주당으로 전향했던 것이다. 서구 이탈리아, 스페인공산당 등도 전향에 합류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과 글라스노스트(개방)에 이은 ‘소련공산당’의 해산은 21세기 세계이념지도를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로 판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다만 중국과 베트남은 등소평과 호지명의 개혁개방으로 시장을 자본주의로, 정치만 공산당으로 2분화했다. 쿠바 등 남미도 카스트로 사망 후 정치체제를 총리제로 변혁하여 대미관계개선으로 시장경제에 합류했다.


고르비가 1991년 12월 24일 극적으로 소련공산당을 해산함으로서 러시아는 물론 동구와 세계의 공산정권에게 공산당 해산지침을 내렸던 것이다. 여기에는 1989년 7월 G7정상회담의 합의로 창설된 동구개발은행(EBRD)의 역할이 컸다. 자크 아탈리 총재는 동구의 민주화-시장화를 위해 동구공산정권에게 의회민주주의-시장경제의 즉각 실시를 조건으로 정치경제지원을 했던 것이다. 모든 공산국들이 서약하고 EBRD의 지원으로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 이행에 성공했던 것이다.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의 14년 외교경제특보 아탈리는 러시아를 포함한 모든 공산국들이 조건을 수락했기에 단시일 내 공산체제의 민주-시장체제이행에 성공했다고 자평했다. 그래서 고르바초프 후 보리스 엘친 러시아대통령의 계승으로 러시아는 급속히 서구민주체제로 이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러시아의 3대 대통령 푸틴은 결선투표제라는 민주선거에서 당선되었으나, 오늘 우크라이나를 무력침공해 러시아의 독재자로 비판받고 있다. 푸틴현상은 일시적인 역사적 반동으로 멀지 않아 끝날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1800여만 명 당원의 공산당 폐지에 성공함으로서, 1990년 러시아 대선에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경재개혁에 매진했다. 국영기업의 민영화, 국가보조금 삭감, 시장에 따른 가격과 통화가치 결정 등 시장경제를 처음으로 실시했다. 군비를 줄이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파병군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민주화프로세스는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었다.


푸틴대통령은 고르비의 업적을 “20세기 최악의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혹평했다. 그는 공산제국 멸망에 분개하는 러시아국민을 대변하는 전체주의정책을 쓰면서, 소련붕괴의 원한과 구소련제국 명예회복을 위해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침공은 오늘 실패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자유민주체제의 나토가입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뮌헨 G7정상회담, 한국에 콜과 미테랑 파견 한국지원을 결정 ]


1992년 7월 통일독일의 뮌헨에서 G7정상회담을 취재했다. 나는 오스트리아 빈의 국제원자력기구(IAEA) 이사회에서 북한 핵문제 취재를 마치고 냉전 종식 후 최초 G7정상회담을 취재했는데, 한반도문제가 의제에 올라 있었다. IAEA이사회에서 북한 핵문제가 토의되어, 영변핵시설에 대한 사찰제의가 있었기 때문에 긴장했다. G7회담 정치선언발표를 콜총리가 했다. 그는 한반도평화문제 2개항 선언을 발표했다.


콜은 첫째, 한반도통일을 격려하며 독일과 쌍둥이 분단국으로서 한반도통일을 적극 지원한다, 둘째, IAEA의 영변의 북핵 사찰을 한국정부와 공동으로 하기를 권고한다고 발표했다. 이미 노태우대통령이 1989년12월 통일과정의 서독을 방문, 콜 총리와 미테랑 대통령과도 각각 회담했었다. 노대통령은 1992년까지 남북기본합의서, 남북 핵폐기 협정, 유엔동시가입에 합의해 한반도데탕트를 전진한 것으로 국제여론의 호평을 받았다.


[데탕트 유일지도자 노태우, 남북기본합의서-핵폐기선언 성공했으나]


1993년 3월 콜 총리가, 9월에 미테랑 대통령이 각각 차례로 방한했다. 김영삼(YS)대통령과 한반도 통일과 북한핵문제 토의가 주의제였다. 미테랑은 북한핵문제를 협의한다고 밝혔고, 베트남평화회담장소였던 파리의 국제회의센터를 제공한다고도 말했다. 콜과 미테랑의 회담은 실패였다.


콜은 한완상 통일부장관이 수행기자들에게 “독일식 흡수통일 안 한다”고 회담 전 선언함으로서 세계 언론이 대서특필해 문전박대 후 귀국했다. 미테랑도 외규장각문서 반환문제로 비난함으로서 북핵 토의는 무산되었다. 1992 뮌헨 G7정상회담의 귀중한 20세기 최대의 유럽대변동의 해결사 콜-미테랑 최고대정치인들을 무참하게 문전박대함으로서 한반도평화는 완전히 악화일로를 걸었고, 세계적 난제로 남겨져 있다.


한반도의 진정한 자유민주-남북 데탕트 지도자는 노태우대통령 뿐이었다. YS는 앞에서 본대로 586주사파의 배후 한완상을 통일부장관으로 썼다가 국제망신을 당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첫 남북정상회담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국민혈세 5억 달러를 김정일에게 퍼주고 햇볕정책으로 북핵들러리를 섬으로서 한반도 평화를 침몰시켰다. 특히 586미전향주사파세력을 ‘젊은 피’로 대거 국회의원후보로 공천하여 국회와 정부요직등에 이들이 판치도록 만들었다


정치 지도자라면 당시 386비전향주사파들에게 전향조치를 하는 등 검증이 필수임에도 ‘운동권후보’로 무조건 국회의원 후보를 추천해 여의도정치를 비전향주사파 세상으로 만들었다. 독일 메르켈 총리는 통독 후 공산당을 금지시켰다. 독일은 2차대전 후 아데나워 초대총리가 공산당불법화를 단행했고, 빌리 브란트 사회민당수가 1959년 바트 고덴베르크 당대회에서 공산당 결별을 선언했다. 독일은 이중삼중으로 공산당을 금지시켰다.


노무현대통령은 대북포용정책으로 북한퍼주기를 계속했으며, 특히 586비전향주사파세력을 대거 정부에 기용하여 북한의 대남선전구호 “우리민족끼리”를 한미동맹대신 안보정책으로 대체했다. 그는 부시미대통령과 회담에서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삭제해달라고 로비해 성공했다고 자찬했었다. 2007년 김정일과 정상회담에서 북한에 ‘남포조선소 건설’등 퍼주기보따리약속을 했다. 그의 보사부장관 유시민은 통독을 “흡수통일이 아니라 협의통일”로 선전하는데, 세계사공부를 다시 해야 할 것이다.


문재인 5년은 586비전향주사파의 본격적 자유민주체제 파괴, 사회주의이행, 그들 패거리만의 이익독점으로 불평등빈국으로 전락시켰다. 특히 전교조의 종북적 사회역사교육으로 주사파에 물든 젊은 세대들이 날뛰는 세상으로 변질시켜 놓았다. 4.19 민주혁명으로 서구형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법치와 정의의 선진화를 달성시킨 장년-노인세대를 “꼴통”으로 몰아 죽이고 있다.


[공산당해산으로 탈냉전성공 고르바초프 영웅은 어떤 사람인가...]


2016년 총선은 586비전향주사파에 물든 젊은 세대의 집중지지로 민주당을 의회다수파로 만들었다. 민주당은 부패덩어리 이재명 당수의 대통령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주장하는 단말마적 범죄방패당이 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개혁을 하지 않으면 천벌받는다”는 고르바초프의 폭탄선언의 의미를 새삼 떠올린다.


고르비의 폭탄선언의 계기로 20세기 냉전시대가 자유민주주의-시자경제주도의 탈냉전시대를 거쳐 오늘 신냉전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한반도는 2차대전 후 김일성남침의 6.25전쟁시대의 고난시대를 오늘도 계속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공산당 총수가 공산당을 멸망시킨 고르바초프의 인생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세계공산주의 총수 고르비가 단칼에 공산당을 해산해 지구촌을 자유민주-시장주의-평화주의로 돌변시킨 20세기 대정치인의 지성과 정치역량이 어디서 나왔을까.


1931년 3월 2일 코카서스지방의 농촌마을 프리볼노예에서 1931년 3월 2일 출생했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소련집단농장에서 대기근의 기아고통을 겪었다. 동네 초등을 나와 중학입학 후 아버지의 2차대전 참전으로 농사를 지었다. 소련의 승전 후 그는 노동영웅이 되었다.


그는 19세에 모스크바대학 법학부에 입학, 정치사상을 전공했다. 마키아벨리, 홉스, 루소, 볼테르, 헤겔을 공부해 서유럽의 17-8세기 계몽사상에 통달했다. 그는 구미의 대통령제를 공부했으며 특히 서구민주주의 정치의 “견제와 균형” 원리를 연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산당 활동가였던 그는 모스크바대 청년동맹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충실한 당원이었으나, 스탈린의 전제적 공산정치에는 “유보적” 자세를 취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특히 고향 스타볼노예에서 20년간 청년동맹서기장으로 일하던 중 후루시초프의 스탈린비판 비밀연설에 감명을 받고 반부패 반관료 개혁에 기여했다.


그는 “20차 공산당전당대회 세대”로 호칭되었다. 그는 그래서 신세대스타로 부각되어 브레즈네프서기장의 주목을 받았다. 병든 브서기장의 후임자로 유력시된 쿨라코프 농업답당 정치국원의 장례식의 명연설을 주목한 브레즈네프가 직접 공산당중앙위원회서기로 그를 발탁했다.


고르비는 1982년 브레즈네프 사망한 후, 연이어 안드로포프서기장이 사망하자 경제와 공산주의 이념담당 서기로 제2인자로 급부상했다. 그후 1985년 3월 체르넨코서기장 사망 후 반대파를 제거하고 공산당서기장에 올라 공산당개혁을 본격화했다.


모스크바방송TV-타스통신-이스베스차 당기관지에서 공산주의와 지도부 우상화를 금지해 페레스트로아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슬로건으로 고르바초프 개혁시대를 열었다. 그는 골수 공산당 간부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숨은 민주-시장주의자 보리스 엘친을 지명해 개혁동반자가 되었다. 그는 7개월만에 정치국 전원을 교체했고, 공산당 스몰니연구소를 개혁전위로 지정했다. “국제시장기준에 맞추어 모든 상품의 품질개량을 해야 한다”며 “개혁 방해군은 모두 꺼져라!”고 외친 것으로 유명하다.


고르비의 소련공산당해산의 근원은 18세기 서구의 계몽사상의 세례를 받은 러시아 차르여제의 계몽군주부터 연원된 것이다. 고르비의 대개혁도 민주화-시장화의 대혁명이었던 셈이다. 실로 그의 “개혁 않으면 천벌 받는다”는 선언은 16세기 데카르트의 이성의 발견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자연의 섭리에서 나왔다.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에 심취했던 학생시절의 영향으로, ‘신의 섭리’를 자연의 섭리로 대체한 성언(聖言)이라 하겠다.


*필자: 주섭일 (4.19민주혁명 공로자회 고문, Why times 칼럼니스트, 전중앙일보 국제문제대기자-파리특파원 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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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학 박사
    전 중앙일보 파리특파원-국제문제대기자

    저서: 사회민주주의의 길(사회와 연대, 2008) 등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사회와 연대, 2017)
    특파원이 추적힌 북한 핵(사회와 연대, 2016)
    한반도 통일대박과 1990 독일통일 (사회와 연대, 2014)
    북의 3대 세습과 평양의 봄(사회와 연대, 2011)
    정치변화와 사회민주주의 (사회와 연대, 2002)
    김정일과 부시의 대타협(두리미디어, 2008)
    새정치와 이원적 민주주의 (사회와 연대, 2012)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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