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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9-12 07: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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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해 푸단대학교 교정에 있는 모택동 동상 [사진=Why Times]


나는 20여 년 전에 중국 상해에 있는 푸단대학(复旦大学)에 외국인 교수로 근무한 적이 있다. 외국 교수 전용 아파트를 무상으로 지급 받고, 정기적으로 주변 지역 여행도 시켜 주고, 생활비 명목으로 매월 4,000 위안(元)을 월급으로 받은 기억이 있는 데, 내 월급봉투에 신수(薪水: xin shui)라는 단어가 쓰여 있어서 조금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있다. 


신(薪)은 “섶나무 신, 땔 나무 신”을 의미하고, 수(水)는 “물”을 의미하기 때문에, 신수(薪水 : xin shui)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땔 나무와 물”을 의미한다. 땔 나무와 물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생존에 가장 필요한 기본 요소이다. 노동의 대가로 생존에 필요한 기본 요소인 땔 나무와 물을 지급한다는 뜻에서 월급을 신수(薪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서양 문화권에서는 일상생활을 통해서 기본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이 소금(salarium)인 것 같다. 샐러리맨(salaried man)은 급여(salary)를 받는 사람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소금(salarium)의 어원 “sal”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월급이 짜다는 말도 소금과 관련이 있는 말이다. 실제로 로마시대에는 화폐를 대신해서 소금을 월급으로 지급했다고 한다. 병사를 의미하는 “soldier” 라는 말도 소금을 주다라는 뜻인 “soldare”의 “sol”에서 왔다고 한다. 로마 시대에는 냉장고, 얼음도 석빙고도 없어서 음식을 보관하기 위해서는 소금이 필요했던 것이다. 소금을 백금(white gold)이라 부를 정도로 귀했고, 일상생활에서 기본적으로 꼭 필요했던 것 같다. 화폐가 나오기 전이나 금이 귀했던 시절에는 따라서 소금이 화폐의 역할을 대신한 것이다.


중국 고대 관리들의 봉록(俸祿)의 형식은 토지, 실물, 화폐 등으로 지급됐는데, 상(商)나라와 주(周)나라 때 공경대부(公卿大夫) 등은 모두 그 지역의 조세를 받을 수 있는 자신의 봉지(俸地)와 채읍(采邑)이 있었다. 여기서 나오는 경제적 수입 중 일부를 상부에 바치고 나머지는 모두 자신의 봉록으로 삼았는데, 이 시기에 봉록의 형식은 주로 토지가 중심이어서 봉지의 크기가 봉록의 표준이 되었다. 그러나 춘추시대 말부터 수당(隋唐)까지는 봉지보다 실물로 지급하는 형태로 바뀌었고, 당대(唐代) 이후 명청(明清)까지는 주로 화폐로 직접 관리들의 봉록을 지급했다. 


진시황(秦始皇)이 도량형 단위를 통일한 후 관리들의 계급과 봉록은 모두 “석(石: 10말)”으로 표시했다. 한(漢)나라에 이르면 점차 직급과 봉록을 구분하기 시작하여, 직급은 만 석(재상), 이천 석(고급 관리나 지방 장관) 등 “석(石)”이라 부르는 단위로 표시하고, 봉록은 “곡(斛: 10말)”이라는 이름으로 지급했는데, 최고 직급인 재상은 월봉이 350곡 이었다. 이 후 한대(漢代)에 들어서 식량운송이 어려워지는 한편 경제가 발전하면서 양식을 화폐로 계산해서 지급하는 형태로 변하게 된다. 서한(西漢) 시대에는 봉록을 대체적으로 화폐로 지급했으며, 동한(東漢)서는 “곡식 반, 화폐 반”으로 지급했다.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에 들어서서 사회가 혼란스러워 지면서 봉록 제도에도 혼란이 생긴다. 위(魏)에서는 봉록을 옷감과 곡식 등 실물로 지급했고, 서진(西晉)에서는 봉록을 날짜로 계산해서 봄과 가을 마다 “쌀, 옷감, 돈, 밭, 잡역” 등으로 나누어 지불했다. 특히 관료들을 우대하기 시작하면서 점전제(占田制)가 실행되어 관리의 계급에 따라 경작지를 지급했다. 그러나 북위(北魏) 초기에는 신하들에게 봉급을 주지 않아서 탐오(貪汚)가 극심해 지기도 했다.


수당(隋唐)시기에 접어들면서 관리들의 봉록은 주로 쌀과 경작지 두 가지로 정리된다. 수(隋) 나라 관리들의 봉록은 중앙의 경관(京官)과 지방관(地方官)의 신분에 따라서 차등적으로 봉록을 지급했고, 봉록 이외에도 직분전(職分田)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당(唐) 나라 시대의 봉록은 세록(世祿: 자손이 대대로 이어 받음), 월봉(月俸), 직분전(職分田) 등 세 가지로 나누어서 실물, 화폐, 토지의 형식으로 지급했다. 세록은 주로 양식으로 1년에 한번 지급했고, 월봉은 매달 화폐 단위로 지급했다. 직분전은 현직 관리에게 주던 토지 사용권을 말한다. 주로 토지에서 나오는 세금의 형식으로 수익을 취했는데, 이 토지는 관직이 바뀌거나 은퇴를 하게 되면 나라에 반납했다. 


송대(宋代) 이 후는 화폐가 널리 유통되면서 봉록도 주로 화폐로 계산하여 지급했다. 당시 관료들은 정해진 봉급 이외에 의복, 식량, 차, 술, 고기, 땔감, 소금, 노비, 말 사료, 종이, 붓 등 각종 명목으로 보조도 받았다. 지방관은 직급에 따라서 대량의 경지를 지급 받기도 했다. 명대(明代)에는 양식과 같은 실물 경비를 돈으로 환산해서 화폐로 지급했다. 청대(清代)에는 관리들의 봉록을 은(銀)과 쌀로 지급했지만, 주로 지급된 것은 은(銀)이였다. 이 처럼 중국은 시대 역사상 왕조에 따라서 봉록제도의 차가 있었지만, 크게 보았을 때 실물 지급에서 점차 화폐 지급으로 발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나는 1993년에 요녕대학(遼寜大学)에 외국인 교수로 재직할 때 명절이면 교직원들에게 고기, 과일, 술과 같은 실물을 선물로 지급하는 것을 직접 보기도 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관원들도 오늘날의 공무원 신분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국가로부터 월급을 받았다. 조선 후기 우리의 녹봉체계를 보면 정1품 당상관(堂上官)의 월급이 쌀 38두(斗), 콩 20두(斗)였다. 문신은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무신은 정3품 절충장군(折衝將軍) 이상의 품계를 가진 관료들을 당상관이라 한다. 가장 말단인 정9품은 쌀 10두, 콩 5두를 받았다. 


1768년도의 서울 쌀 시세를 살펴보면 쌀 1말(斗)이 상평통보 1냥으로 거래됐다고 한다. 초가집은 평(칸) 당 10냥, 기와집은 평당 20냥 정도였다. 집값 단위로만 계산하면 월급이 그럭저럭 괜찮은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물가를 보면 월급으로 생활하기 힘들었다. 당시 관리들은 선비 출신으로, 선비라면 적어도 75권으로 된 주자대전(朱子大全)전집을 마련해야 했는데, 당시 가격이 16냥이나 되었다. 일반 생활 물가도 매우 비싼 편이어서 상투에 필요한 말총을 묶어 만든 망건(網巾) 1개의 가격이 1냥이었고, 겨울 옷 한 벌은 4냥 정도였다. 


당시의 이 같은 물가를 고려하면 그럭저럭 사는 정도였지만, 사실상 봉록에 감록(减祿)제도가 있어서, 조선 시대 관리들은 월급을 제대로 받는 달보다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달이 더 많았다. 그야말로 “서류상의 명목적인 월급”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감록(减祿)이란 감봉(减俸)을 말하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정부 재정이 부족해서 짜낸 묘안이다. 


그 중에 “흉년”이라든지 “중국 사신 접대 경비”로 감봉하는 경우가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부족한 녹봉에 감록으로 관료들은 월급만으로는 생활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이들의 생활은 월급이 아닌 수증(受贈)으로 이어가게 되었다. 수증이라는 말은 선물을 받는 것인데, 관료로서 중앙 관직에 있게 되면 지방 관리들에게 선물(촌지)을 받고, 반대로 지방직에 있을 때에는 중앙 관료에게 선물을 보내곤 했다. 오늘날 개념으로 보면 명백한 뇌물이겠지만, 국가 재정이 가난했기 때문에 수증은 늘 관례로 인정 되고 있었다. 


이처럼 조선 정부는 경제적으로 가난해서 “작은 정부”를 추구했다. 그래서 월급을 받는 관료들은 고작 5,000여 명에 불과했고, 그 중에서 4,500여 명은 직업군인이기 때문에 실제 정부 관료는 500여 명에 불과 했다. 그래서 인사를 담당하는 이방(吏房), 세금을 담당하는 호방(戶房), 형벌과 노역을 담당하는 형방(形房) 등 지방 아전(衙前)들까지 급여를 지급할 수 없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월급도 없는 “무보수 명예직”으로 정부에서 빈 껍데기 완장만 채워주었기 때문에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업무를 핑계로 늘 백성들을 괴롭혀 왔다. 사실상 중앙 정부가 지방 향리(郷吏)들의 부정을 방조한 것이다. 조선의 관리제도는 솔직히 말하면 부패와 부정이 싹틀 수밖에 없는 제도였다.


1774년 영조 5년 때 호구인구는 170만 명이고, 총 인구는 710만 명 정도였다. 이 때 군인을 포함한 모든 공무원이 5,000명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서 현재는 대략 5,100만 명의 인구에 군인을 제외한 순 연금 대상 공무원이 약 11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도 2021년에도 신규로 6,450명을 더 충원한다는 계획이다.


문 정부 출범 당시 향후 5년 간 17만 4천 명의 공무원을 더 충원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조선시대에는 공무원의 수가 너무 적어서 공무원들의 비리와 부정이 난무했다면, 현대는 공무원의 수가 너무 많아 필요하지도 않은 하찮은 일을 전담하는 공무원직도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수입에 비해 세금이 높은 프랑스, 덴마크, 벨기에, 스웨덴, 핀란드 같은 국가는 GNP의 40% 중반의 세금을 내지만 의료, 교육(대학), 주택 문제 등은 모두 국가가 책임지고 있다. 국민은 그야말로 식비와 여행비 등만 벌면 된다. 


이에 비해서 한국(28.4%)은 캐나다(33.0%), 미국(24.3%), 호주(28.5%) 등과 비슷한 세금을 내지만, 교육과 주택 문제 등은 모두 국민들이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있다. 기획재정부 통계 자료에 의하면 2020년도 10월 현재 국세 수입이 전년(30조 1,000억)에 비해 10% 증가한 33조 3,000억에 이른다고 한다. 일반 국민들의 수입 증가율에 비해 세금 증가율이 훨씬 더 많아서 염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까지 전 국민의 40%가 노예 신분으로 궁핍하게 살았고, 경제적 조건도 빈약하여 하루 세끼 먹기도 힘들게 생활해 왔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 후 6.25를 겪으면서 여전히 동남아에서도 빈곤한 나라에 속했다. 


6.25 전쟁 이후 어린 시절 나의 어머니는 우리 5남매 중에서 남자 3형제가 각각 이방(행정원), 호방(세무원)과 형방(경찰관) 등의 지방 향리(郷吏)라도 되기를 희망하셨던 말씀이 기억난다. 비교적 부유했던 지주의 5대 독자 집 며느리로 시집을 와서 토지개혁으로 농지를 모두 잃고 특별히 먹고 살아 갈 경제적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나 얄팍한 권세라도 부려보고 싶은 욕망의 말씀이셨을 것이다. 


그런데 1960년 대부터 우리의 경제 상황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통계 자료를 보면 1968년도 병장과 이병 월급이 각각 600원과 390원에서 30년이 지난 2019년에는 405,700원과 306,100원으로 대략 700배 정도 올랐고, 1968년도 나의 소위 초봉 4,300원이 2020년도에 초봉 171만 원으로 약 400배 정도 올랐다. 나는 전역한 후 대학원 학생 시절에 월급 15,000원 짜리 조교를 거쳐, 15만 원에 문간 방 전세로 신혼 생활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건강 걱정하는 것 이외에는 매달 집 사람과 함께 연금을 수령하면서, 경제적으로는 부족함 없는 노후 생활을 살아가고 있다. 비록 어린 시절부터 성인 초반기까지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많이 겪어왔던 세대였지만, 그래도 건국 이래 최고의 경제적 호황을 누린 시대를 살아 왔다는 행운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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